지난 2022년 전주역사박물관에 다녀왔던 내용입니다. 3F 기획전시실에서 개관 20주년 특별전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역사 바로알기! GOGO~
전시를 열며
전주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도시입니다. 2022년은 전주역사박물관이 개관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며 광복 7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주역사박물관에서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 특별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전라북도 총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호남평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해 우리나라 미곡 생산의 거점 지역이었습니다. 전라북도는 1899년 군산항 개항 이후 일제에 의한 경제 수탈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헐값에 토지를 대규모 매입 후 농장을 설립하여 경제적 수탈을 본격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수탈의 흔적을 1. 일제강점기, 전주의 흔적, 2. 기록으로 남겨진 농촌의 흔적, 3. 굴곡진 도심의 흔적의 주제로 살펴보고자 합니다...(이하생략)
개관 20주년 특별전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
1. 일제강점기, 전주의 흔적
전주는 조선 3대 도시로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가 위치하여 자원이 풍부하였습니다. 지리적으로 전주는 동쪽의 용진면·소양면, 서쪽의 이서면, 남쪽의 상관면·구이면, 북쪽의 삼례읍으로 완주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1896년(고종 33년)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하면서 전라도는 전라북도와 남도로 분리되었고, 전북 도청은 전주에 자리하였습니다. 1914년 군현들의 통폐합으로 전라북도는 1부 14군 체제로 개편 되어 1부는 군산, 전주는 14개 군의 하나였습니다. 전주군은 고산현을 병합하여 20개 면과 173개 리로 편제되어 전주부성 일대는 전주면이 되었습니다.
1931년 전주면을 전주읍으로 개편하고, 1935년 10월 전주읍을 전주부로 승격시켜, 전주군을 전주부와 완주군으로 분리하였습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모든 부가 시로 개편되면서 전주부는 전주시로 개칭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전주 사진(위) 설명
1.전주시가 전경 | 2.전주시가 | |
3.풍남문 | 4.전주부 역통 | 5.전주 은행목통 |
6.전라북도청 전경 | 7.전주지방법원 | |
8.조선식산은행 전주지점 | 9.전주우편국 |
전주부성은 전주에서 군산까지 양곡을 수송하기 위해 개설한 전군 도로로 인하여 1907년 서벽이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1911년 동벽 철거에 이어 1912년 가로정비와 개설된 도로를 따라 도시가 확장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본정, 本町) 근처 전주천변에서 거주하였던 일본인들은 중앙동(대정정, 大正町)으로 상권을 확장하였습니다. 또한 1921년 전라감영에 전북 도청이 들어섰고, 선화당이 도청사로 활용되다가 신청사들이 건립 되었습니다.
전주 안무주장 주병 / 일제강점기(좌)
전주 안무주장(安武酒場)에서 만든 주병(酒甁)으로 병에는 안무주장 제499호 라는 제조 일련번호가 적혀있다.
전주 본정 도촌주장 술단지 / 일제강점기(우)
전주 본정(本町) 도촌주장(圖村酒場)의 술단지다. 단지의 윗부분에 제156호와 측면에 주장(酒場)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2. 기록으로 남겨진 농촌의 흔적
전라북도는 동쪽으로 소백산맥, 북쪽으로 금강 하류, 남쪽으로 노령산맥을 경계로 동진강과 만경강이 흘러 서해로 유입되는 곳에 위치합니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으로의 쌀 반출 전진기지가 된 전라북도는 군산을 기점으로 전주, 정읍, 부안, 김제, 옥구 등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대지주의 집중도가 가장 높았던 지역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에서는 우리나라의 토지 관련 법령을 개정하여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해 주는 혜택을 제공해주며 이들의 이주를 장려하였습니다. 1910-18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 입시토지조사국에서 ‘토지 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전국의 모든 택지와 경지에 대해 필지별로 측량하고, 소유자와 지가 및 지위 등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제작하였습니다. 이는 근대적 토지소유 제도를 성립시켜 토지침탈을 원활히 하고, 근대적 지세 제도를 적용하여 안정적으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좋은 조건 속에서 저렴한 가격에 토지를 매입한 일본인 자본가들은 곳곳에 대농장을 설립하여, 기업 운영 형태와 비슷하게 농장을 경영하였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발전을 명분으로 토지 개량, 농사법 개량, 관개시설 개량에 나섰고, 농사에 근대적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막대한 부 축적의 기초를 닦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인 소유경지 비율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르게 농장 지주로서의 면적을 소유한 지역은 전라북도였습니다. 1910년 일본인 소유 면적 5천 정보 이상을 가진 지역은 전남·북, 경남, 황해, 충남, 경기 6개 도(道)였습니다. 이 가운데 전남·북은 2만 정보를 소유하여 우리나라의 일본인 소유경지의 약 49%를 차지하였습니다. 이 당시 도별 일본인 소유경지 비율을 보면 전북은 무려 18.9%를 차지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1916년의 경우 전북의 김제, 옥구, 익산, 전주에 일본인 소유 경지 면적은 58%에 달하였습니다.
이등 농장은 일본인 대지주 이토 초베에(伊藤長兵衛, 1875~1952)가 전북 삼례에 농장 사무소를 두고 전주, 익산, 김제 등의 경지를 소작제 농장 경영으로 운영하였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시가현 오미(滋賀県近江) 출신으로 직물을 취급하는 포목 상점을 운영하였고, 한국으로 건너와 와타나베 타매 키치와 함께 ‘이토오와타나베기업조합(伊藤渡邊起業組合)’을 설립하였습니다.
이들은 각각 40,000원 10,000원 총 50,000원의 출자금으로 1906년 4월 삼례면 신금리와 석전리 소재의 논 400여 두락과 밭 80여 두락의 땅을 매수하였습니다. 농장 사무소의 위치는 전라북도 전주군 삼례면 삼례리 901번지 일대로 지금의 삼례 농협 자리입니다. 당시 사무소 내 건물로는 사무실 건물 1동, 창고 3동, 사택 1동 등이 있었습니다.
산미증식계획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급격한 인구 증가와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로 인하여 쌀 부족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을 늘려 본국으로 가져가려는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밭을 논으로 만들고, 개간과 간척사업을 대규모 실시하였으며, 수리 시설 확충을 위해 수리조합을 설립하고, 종자와 농기구를 개량하였습니다.
1910-14년 전북 쌀 생산량은 연평균 1,126천 석이었던 것이, 1930-40년은 연평균 2,047천 석으로 82%가 증가하였습니다. 쌀 생산량은 2배로 증가함과 동시에 일본으로 실어 나른 쌀은 4배로 늘어났습니다. 실제로 전북에서 생산된 쌀은 군산항을 통해 1916년 234천 석이었던 것이, 1926년 908천 석, 그리고 1929년에는 894천 석이 일본으로 반출되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어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만주에서 잡곡을 대량으로 수입하였습니다.
이렇게 산미증식계획의 추진과정에서 토지 회사와 지주들은 일본으로 쌀을 반출시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나, 우리 농민들은 소작료 인상과 수리 조합비, 종자 개량 비용 등을 떠맡게 되어 생활이 어려워졌고, 가난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화전민 또는 도시 빈민이 되거나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3. 굴곡진 도심의 흔적
일제강점기, 일본은 전라북도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크게 변화시켰고, 만경강 유역에 진출한 거대 농장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도로와 철도, 수리조합을 구축하였습니다.
1908년 개통된 전군도로(국도 제26호선)는 전주에서 군산까지 길이 46.4km의 도로입니다. 이 도로는 호남평야의 쌀을 군산으로 편리하고 빠르게 운송하여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로, 산업화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전주와 익산, 김제, 군산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도로뿐만 아니라 철도 노선도 연결되었습니다. 1910년 통감부는 호남선 노선을 확정하였고, 본선은 대전-가수원-두계-논산-강경-이리-김제-광주-송정리-영산포-목포를 통과하며, 지선은 이리-군산을 연결하였습니다. 호남선은 1911년 10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14년 1월에 완공하였고, 호남선 지선인 군산선은 1912년 3월 6일에 개통하였습니다. 군산선과 함께 강경-이리 구간 역시 같이 개통되었고, 1921년 철도가 내항까지 연장되며, 1924년 6월 1일 임피역과 개정역이 간이역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만경강 주변 대규모 수리 시설이 산미증식계획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옥구서부수리조합(1908년), 임익수리조합(1909년), 임익남부수리조합(1909년), 전익수리조합(1910년), 임옥수리조합(1911년)이 당시에 만들어진 수리조합입니다.
1920년 이후 익옥수리조합은 저수지 건설과 간척사업을 시행하였고, 이에 대아리저수지(완주군 고산면)와 경천저수지(완주군 경천면)를 만들어 논에 공급하는 용수를 확보하였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고산천변의 어우리에서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65km의 새로운 대간수로를 건설하여 만경강 유역의 논에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였습니다.
전주초등학교 일제 석물 / 일제 강점기
일제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목적으로 전주초등학교 교정에 일본 천황의 사진을 보관한 봉안전을 건립하였다. 이 표지석들은 봉안전 주변에 세웠던 것으로 인애원(仁愛園)·지성원(至誠園)·대화원(大和園)·충후원(忠厚園)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전주부성의 서벽 철거(1907년)를 시작으로 1911년 동벽 철거 등으로 전주 호남제일성은 모두 헐리고 현재 풍남문만 남아 있다. 또한 일제강점 전북에서 생산된 쌀은 군산항을 통해 1916년 234천 석이었던 것이 1926년 908천 석 그리고 1929년에는 894천 석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농민들은 소작료 인상과 수리 조합비, 종자 개량 비용 등을 떠맡게 되어 생활이 어려워졌고, 가난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화전민 또는 도시 빈민이 되거나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하게 되었다. 도로와 철도, 수리시설 등이 생겨 우리나라를 발전시켰다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목숨을 바친 애국자들은 테러리스트인가? 반문해 본다. 이미 황국신민화 교육에 빠진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떠나라 일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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