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본향이었던 전주는 1392년(태조 1)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되었으나, 1403년(태종 3) 전주부(全州府)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설치되어 호남지역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이에 전주성과 그 주변을 담채로 그린 지도를 열 폭 병풍으로 만들었다. 첫 번째 폭과 마지막 폭에는 전주부의 변천 과정과 전주성 내외의 주요 장소의 위치, 간단한 연혁 등이 기록되었다. 객사(客舍), 풍남문(豊南門), 패서문(沛西門), 경기전(慶基殿), 조경묘(肇慶廟) 등 전주부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글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1. 전주의 위치와 환경
전주시는 전라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완주군이 그 주변 대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형세로 서쪽 일부와 서남쪽 일부만 김제군과 접하고 있다. 위경도상으로는 동경 127°, 북위 35° 부근에 해당한다.
전라도는 노령산맥을 경계로 산악지대인 좌도(21개군)와 해안평야지대인 우도(36개군)로 나뉘는데, 전주는 그 접경에 위치하고 있다. 즉 산간지대의 산물과 평야지대의 산물이 모두 모여 교환되는 “결절지(結節地)의 위치”가 전주의 큰 지리적 특성이다. 전주중심가는 산지와 구릉에 둘러싸인 분지형태이며, 전주시가지 대부분은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며 남동방 전주천변에서 북서방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주시의 동ㆍ남ㆍ북동쪽은 모두 노령산맥에 속하는 산지로 북동쪽에 종남산(終南山), 동남동쪽에 만덕산(萬德山), 남동쪽에 고덕산(古德山), 남남서쪽에 모악산(母嶽散) 등이 시 외곽 완주군에 자리하고 있다. 시내에는 동쪽에 승암산(僧巖山, 306m), 남쪽에 남고산(南固山, 273m)ㆍ완산칠봉(完山七峰, 163m), 북북서쪽에 건지산(乾止山) 등이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 밖에 서쪽에 홍산(洪山, 216m), 천잠산(天蠶山, 153m), 전주천변에 다가산(多佳山) 등이 있다.
하천은 만경강의 상류가 되는 전주천(全州川), 삼천천(三川川)이 있다. 전주천은 남동쪽 노령산맥의 분수계인 임실군 관촌면 슬치(瑟峙, 250m)에서 발원하여 남관, 신리를 지나 대성동의 각시바위에서 승암산과 남고산의 규암층을 짜르는 협곡을 통과한 후 한벽당 부근에서 반석천(盤石川)과 합류된다. 이곳 근방에서 전주천의 방향이 동서방향으로 바뀌어 흘러서 남천(南川)이라 부른다. 전주교와 매곡교를 지나 완산다리 부근에서 다시 방향이 바뀌고 다가산에 근접하면서 흘러 이부근을 서천(西川)이라 한다. 진북사 지나 한일고 부근에서 모래내가 합류하여 가련산 남쪽 기슭의 사평리(沙平里)를 지나 팔복동 추천대(楸川臺)에서 삼천과 모아진후 삼례교 부근에서 고산천(高山川)ㆍ소양천(所陽川)과 합류하여 만경강이 된다. 추천대에서 삼례교까지의 유로(流路)를 추천(가리내)이라 부른다. 삼천천은 정읍군ㆍ임실군 등 노령산맥 서사면에서 발원하여 전주시의 남서부를 흘러서 전주천과 합류한다.
전주천의 소지류(小支流)는 반석천, 남고천, 모래내 등이다. 반석천은 남고산 성벽내의 물이 모아져서 전주교대 동편을 지나 임업시험장에서 전주천에 유입된다. 남고천은 구이면 평촌리와 경계에 있는 보광재(280m)에서 발원하여 흑석골을 지나 남문시장의 전주천 맞은 편에 있는 곤지산(102m) 동쪽 기슭에서 전주교 서편의 전주천에 흘러든다. 모래내는 기린봉 북쪽 기슭에서 발원한 관선천이 인후동을 지나 서쪽으로 시가를 통과하여 고속터미널 남쪽을 지나 전주천에 유입한다.
전주시가의 지하에 자갈층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전주는 노령산맥 서사면의 곡구에 위치하여 여기에 전주천ㆍ삼천천이 흘러 빙하기에 저위해수면으로 침식기준면이 낮아져서 골짜기에 이들 하천의 토사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것이다. 오목대 밑으로 해서 시내를 관통하던 전주천이 서쪽으로 유로를 변경하면서 넓은 충적지를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양은 적황색토로 덮여 있으며 전주천ㆍ삼천천 등의 주변저지는 모두 충적토이다. 암석은 대부분이 화강암으로서 화강편마암 석영의 틈입(闖入)이 보이며, 동부는 대천계(大川系)에 대비되는 전주통(全州統)으로 불리는 변성퇴적암 종류가 넓게 분포한다. 특히 능선부에는 규암이 노출되어 특이한 경관을 나타낸다. 서부는 중생대 쥐라기의 마상화강암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기후는 남부내륙형의 기후에 속한다. 연평균기온 12.9°C, 1월평균기온 -0.4°C , 8월 평균기온 25.3°C이며, 연강수량은 1,296㎜이다. 산악의 영향으로 지형성강우가 많다.
2. 풍수지리
전주(全州)는 온고을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물산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노령산맥에서 뻗어내린 기린봉, 승암산, 고덕산, 모악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사람 살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다만 서북쪽이 열려 있어서, 풍수지리적으로 이를 비보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덕진제방, 숲정이, 진북사(鎭北寺) 등이 그것이다. 건지산(乾止山)이라는 명칭도 그렇다. 북서쪽이 건방(乾方)에 속하므로,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기 위해 건지산이라 한 것이다.
1541년(중종 20) 전주사람 50여명이 연명으로 올린 소에, “(전주부의) 지형이 남쪽은 높고 북쪽은 허하여 바닥기운이 분산하기 때문에, 진산 이름을 건지산이라 하고, 제방을 쌓아 이름을 덕진(德津)이라 하였으며, 절을 창건하여 건흥사(建興寺)라 하고, 서쪽에 있는 조그만 산을 가련산(可連山)이라 했습니다”라 한 것은 그런 비보 풍수를 말해준다.
그런데 전주 주산과 관련해 이런 주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의 지리서들에는 진산이 건지산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원래는 기린봉이 주산이라는 것이다. 기린봉이야말로 기골이 장대하고 주산으로서 품격을 갖추고 있으며, 건지산은 주산으로서는 너무 약한데 기린봉에 왕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이 기를 누르기 위해 조선왕조는 일부러 주산을 건지산으로 잡았다는 것이다. 최창조선생도 그런 논리를 펴고 있다. 결국 전주에 왕기가 흐른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주는 일찍이 후백제의 왕도로 자리하였고, 이후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시련도 적지 않았다.
[글 출처: 전주역사박물관]
3. 전주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이었다. 풍패란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 말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데서 비롯되었다. 전주이씨의 시조는 통일신라 문성왕(재위 839~857) 때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며, 그 부인 경주김씨는 태종 무열왕의 11대손으로 군윤(軍尹, 향직)을 역임한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 태조 이성계는 시조 이한의 21대손이 된다.
전주세거시 그 선대들의 가계형편이 어떠했는지 분명치 않지만, 태조의 6대조 이린(李璘)이라는 인물이 주목된다. 이색이 찬한 「환조신도비(桓祖神道碑)」에 이린이 시중 문극겸(侍中 文克謙)의 사위로 나와 있는데, 고려사 이의방 열전에 이린은 이의방의 동생이며, 문극겸의 사위로 나온다. 이렇게 볼 때 환조신도비에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이린은 1170년 정중부, 이고 등과 함께 무신난의 주역인 이의방의 동생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태조의 선대는 전주지방의 토호로 추정된다.
이성계 집안이 전주를 떠난 것은 그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 때이다. 이안사는 지전주사(知全州事)가 자신이 가까이 했던 관기에게 산성별감(山城別監)의 숙청을 들게 하자 관기를 몰래 빼돌렸으며, 이에 지전주사와 산성별감이 이안사를 처벌하려 하자 그의 외향인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삼척에 새로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마찰을 빚었던 그 산성별감이었으며, 이에 이안사는 바닷길을 통해 동북면 의주(宜州, 德源)로 거처를 다시 옮겼다.
이 시기는 몽고에 저항하던 시기로, 아마도 이안사가 전주의 토호로 반독립적 세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지방관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된다. 삼척으로 떠날 때 170여호가 따랐다는 사실은 그가 전주의 토호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그가 동북면으로 가는 유이민의 하나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조선은 건국직후 태조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설치하는 등 전주가 왕실의 본향임을 분명히 하였다. 현재 전주문화유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기전, 조경묘,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객사, 풍남문, 전주사고 등도 풍패지향과 관련되거나, 그런 의미를 담고 건립된 것들이다.
그런데 경기전을 제외한 나머지 조형물들은 조선후기에 건립되었다. 풍남문이라는 편액과 조경묘 조성이 영조대에 이루어졌으며, 객사를 풍패지관이라 명명한 것도 이 때쯤의 일로 추정된다. 또한 오목대 이목대 조경단 등은 조선말 고종대에 건립되었다. 이는 조선말로 가면서 풍패지향 전주에 대한 조선왕실의 관심이 증폭되었음을 말해준다.
영조대는 당쟁의 폐단에서 벗어나 조선왕조를 새롭게 중흥시키려 했던 시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문벌중시 풍조가 고조되고 있던 시대이다. 고종대는 조선왕조의 국기조차 흔들리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왕실의 본향을 기념하는 조형물들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는 것은 곧 조선왕조가 재도약을 꿈꾸면서 왕실의 뿌리를 굳건하게 하려 하였음을 의미한다. [글 출처: 이동희 '전주문화유적분포지도' , 전주역사박물관]
[아래 사진: 전주국립박물관 / 전주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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