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남원 실상사를 찾아가는 길목에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남겼던 곳의 포스팅이다. 인월-월평마을-영월사-중군마을-실상사(實相寺)-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동편제마을,비전마을(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 생가)-국악의 성지-관음사 등을 돌아보았다. 필자는 같은 장소를 2023년 3월 5일, 8월 4일 방문하였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은 보물 제41호(1963년 01월 21일 지정)로 약사전(藥師殿)에 모셔져 있다. 아래 사진은 약사전(藥師殿)현판과 어간문의 꽃문살이다.
보물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신라말)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이 땅의 허리를 이루며 가로질러 뻗어온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끝나며 또아리를 튼 곳에 실상사가 자리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세간에는 예로부터 도선국사의 비기를 빌어 실상사를 이 땅, 이 민족의 흥망을 담당하는 절로 여겨왔다.
약사전에 모셔진 불상(보물 제41호)은 9세기에 들어 조성하기 시작한 철불 가운데 비교적 초기에 모셔진 불상이다. 세간에서는 이 불상을 두고도 역시 이 땅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바람을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학자들은 제각각 근거를 들어 ‘아미타불’이니, ‘노사나불’이니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세간에서 무슨 의미를 더한들, 부처님이 무슨 이름으로 불린들 무슨 대수랴!
병이 들어도 변변하게 치료해줄 의사도, 약도 없는 깊은 산골에서 중생들이 마지막 의지하여 아픔을 빌어 달랠 곳은 오직 부처님뿐이었을 것이다. 저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을 안고 와서 고통을 호소하고, 낫기를 빌며 지극하게 오체투지하니 어찌 불보살의 감응과 가피가 없었겠는가! 이로써 언제부터인지 이 부처님은 중생의 병고를 씻어주는 ‘약사여래불’로 불리었다.
지금의 전각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95년부터 시작된 발굴에 의하면, 약사여래불이 자리한 곳에 전각이 처음 자리잡은 것은 불상이 조성된 시기보다 상당 기간 뒤의 일이다. 이 점을 들어 이 불상이 보광전의 주불로 모셔져 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유와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불상이 언제부터 약사여래불로 불리었고, 이 전각에 <약사전>이라는 현판을 걸었는지 알지 못한다. 실상사발굴보고서에 의하면, 현 약사전 부지 위에 처음으로 건물이 선 것은 고려 초기이다. 그리고 다른 기록에 의하면 조선 세조 14년(1468년) 화재로 대가람의 전각이 모두 전소된 뒤 가람이 2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기에 이 불상 역시 오랜 세월 들판에 방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약사전 해체시 드러난 약사전 종도리에 쓰여있는 상량문에 “噫 藥師鐵佛 獨坐土野中 순치 16년 기해 칠월 초3일 중창(효종 10년 1659년)”
“강희 40년 신사 유월 초7일 약사법당 삼중창(숙종 27년 1701년)”이라는 내용이 보이는 바, 중창 이전 들판에 계실 때도 이 불상이 약사불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각 안 좌우 화반벽에는 1700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악비천도’ 벽화가 있으며, 어간문의 꽃문살은 수준 높은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 1883년 함양의 유생 양재묵 일당의 방화로 실상사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 없어질 때도 건재하던 이 전각이 흰개미에 의해 기둥이 약해져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래서 2012년 4월부터 문화재청의 지원과 감독 아래 해체보수 공사가 시작되어 2013년 12월에 마무리하였다.
한편, 2015년 이 약사전에 약사여래 뒤편 불화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을 새로 봉안하였다.
“하나 그대로 전체, 전체 그대로 하나, 한 먼지 그대로 우주, 우주 그대로 한 먼지”라고 한 부처님의 진실한 뜻이 지금 여기 역사 현장에서 바로 증명되는 시대가 되었다. 현실은 신화시대를 넘어 역사의 시대, 신앙의 시대를 넘어 과학시대, 한반도 시대를 넘어 지구촌 시대, 그리고 우주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불사에 함께 한 대중들은 부처님의 진실한 뜻, 우리 역사와 전통, 21세기 시대정신을 잘 살리는 불사를 하고자 발원했다.
일찍이 사람들은 자신이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우주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인도사람들은 인도 땅을, 한반도 사람들은 한반도 땅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았다.
우리도 그 토대 뒤에서 대중의 발원에 따라 역사시대, 과학시대, 지구촌 우주시대의 한반도 지리산에 어울리도록, 우리 민족의 슬픔과 기쁨, 좌절과 희망이 서린 지리산과 지역사회의 자연생태, 역사문화, 그리고 오늘 우리 삶과 함께 하는 실상사가 되도록 하고자 노고할매와 약사여래를 불일불이(不一不二)하게 모셨다.
천년 세월을 고통받는 생명들과 함께 해온 약사여래의 원력으로 세상과 나의 아픔이 함께 치유되기를 기원한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 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 / 보물 제41호
통일신라 말 지방의 여러 선종 사찰에서 쇠를 녹여 많은 불상을 만들었는데, 이 불상은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는 2.69m이다. 무릎 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붙였다. 두리뭉실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런 얼굴, 넓은 가슴에 갸름한 허리 등으로 보아 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을 띈 이 불상은 온유함과 생동감을 보이던 앞 시대의 불상과 달라 신라 말 불상의 변천 양상을 가늠케 한다.
Iron Seated Buddha of Silsangsa Temple
Of the many iron Buddha statues from the late Tongil-Silla period, this 2.69m high statue is the oldest one. Because its original form was damaged, the lower part of the knees have been repaired. The broken hands have been later discovered and re-attached. Its round head, curly hair, broad chest and slim waste show character- istics of a Silla kingdom Buddha statue. Because its stern and hard face differs from the gentle and vigorous faces of other Buddha statues made before, it helps us identify the aspects of the changes in Buddha statues from the late Silla kingdom.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
▪ 보물 제41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번지 실상사
내용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266㎝. 꼿꼿한 자세로 앉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이 불상은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현재 광배(光背)는 없어졌고 사각대좌(四角臺座) 위에 앉아 있다.
나발(螺髮)로 처리된 머리 위에는 높이 14㎝, 밑변 48㎝나 되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었으나, 머리와는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있다. 얼굴은 넓적하여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얼굴 길이보다는 너비가 더 넓다. 이마는 좁은 편이지만 박진감이 넘친다. 비교적 넓은 얼굴에 가늘고 긴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 이마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아담한 코, 두터우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입 등이 조화 있게 잘 배치되어 있다. 목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삼도(三道)를 표현하였는데 음각선 처리가 아닌 굴곡진 모양으로 나타냈다.
두 손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1987년 복원불사(復原佛事) 때 나온 원래의 철제 손들도 같은 모양의 것이어서 나무 손은 후보(後補)하면서 원래의 철제 손을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다른 손가락은 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왼손은 무릎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은 맞잡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므로 이 불상이 통칭 약사불(藥師佛)이 아니라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크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걸치고 있다.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내려오는 U자형의 굵은 띠 모양 옷깃 안으로 넓게 터서 가슴이 많이 노출되었다. 그 아래로 엄액의(掩腋衣: 대의(大衣) 안에 입는 내의(內衣)로, 왼쪽 어깨에서 내려와 오른쪽 겨드랑이로 들어가도록 둘러 입는다.)가 보인다. 옷주름은 부드럽고 유연한 물결 주름인데, 특히 팔의 주름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처리하였다.
대좌는 흙으로 만든 사각형의 대좌이나, 현재는 허물어진 부분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복원이 가능한 편이다.
특징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조성이 부쩍 늘어난 철불의 한 예이다.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불상 양식이 보다 해이해지고 활력이 감퇴된 양식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 나온 아랫배 등에서는 아직도 긴장감이 나타나 있으나, 8세기에 나타나던 유연한 탄력감이 아닌 경직되고 이완된 모습을 보여 준다.
신체비례 면에서 보면, 858년작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3년 지정)이나 863년작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보다는 약간 고식(古式)이다. 865년작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867년)과는 거의 동일한 비율을 보이고 있어 대체적으로 9세기 중엽 불상들과 같음을 볼 수 있다.
형태나 선 같은 것은 대체로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도 친연성이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과도 상통하고 있다. 즉 옷주름의 세부 수법은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편으로, 어깨나 팔의 계단식 주름, 다른 부분에 물결식 주름을 보이는 것 등은 동일하다. 이것이 더 진전되면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평행 계단식 옷주름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불상은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서 당시 철불상의 실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지리산 실상사는 2015년 10월 25일(일) 약사전 철조여래좌상(신라말, 보물 제41호) 후불탱화 봉안법회을 열었다.
‘지리산생명평화의 춤’이라는 제목의 이 후불탱화(가로690cm × 세로184cm)는 재료는 전통한지에 수묵과 채색을 했으며 불교세계관에 나오는 수미산을 지리산으로 형상화하여 지리산의 역사와 마음을 담았다. 이호신 화백이 그렸다.
약사여래 후불탱화를 모신 인연
불기 2559(2015)년 10월 25일 (임시명판입니다. 영구명판을 제작중입니다.)
드디어 “하나 그대로 전체, 전체 그대로 하나. 한 먼지 그대로 우주, 우주 그대로 한 먼지”라고 한 붓다의 진실한 뜻이 지금여기 역사 현장에서 바로 증명되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현실은 신화시대를 넘어 역사의 시대, 신앙의 시대를 넘어 과학시대, 한반도시대를 넘어 지구촌시대 그리고 우주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서둘러야 한다. 대승정법으로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한국불교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대범하게 도전해야 할 때이다. 그를 위해 한문불교를 넘어 우리말불교, 과거불교를 넘어 오늘불교, 인도·중국불교를 넘어 한국불교, 한국불교를 넘어 지구촌불교, 나아가 우주시대불교를 모색하고자 한다.
자연스럽게 불사에 함께 한 대중들은 붓다의 진실한 뜻, 우리 역사와 전통, 21세기 시대정신을 잘 살리는 불사를 하고자 발원했다. 일찍이 사람들은 자신이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우주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인도사람들은 인도 땅을, 한반도 사람들은 한반도 땅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았다. 우리도 그 토대 위에서 대중의 발원에 따라 역사시대, 과학시대, 지구촌 우주시대의 한반도 지리산에 어울리도록 생명의 아픔을 품어 안는 약사여래 뒤편에 모실 불화, ‘생명평화 춤’을 조성했다. 당연히 우리 민족의 슬픔과 기쁨, 좌절과 희망이 서린 지리산과 지역사회의 자연생태, 역사문화, 그리고 오늘 우리 삶과 함께 하는 실상사가 되도록 하고자 노고할매와 약사여래를 불일불이(不一不二)하게 모셨다.
약사전에 계시는 약사여래는 천년세월을 고통 받는 생명들과 함께 해왔다. 지난 2556(2012)년 4월 약사전 해체보수를 시작으로 2557(2013)년 12월 약사여래 복장 봉안, 2558(2014)년 1월 전각 복원, 그리고 2559(2015)년 10월 25일 약사여래 뒤편 불화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을 조성하여 봉안한다.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붓다의 진실한 뜻을 시대의 정신에 맞게 꽃피우고자 하는 불사에 1665명이 함께 했다. 동참자들의 간절한 정성을 받아 이호신 화백이 수고하셨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담아 감사드린다.
약사여래 뒤편에 모시는 불화 불사에 함께 한 인연공덕으로 한 분 한 분의 가정에 일체의 고난과 액난이 소멸되고 평화와 행복의 꽃 피어나길, 우리의 발원이 우리사회 곳곳에 두루 퍼져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 생명평화 세상이 실현되길 간절히 축원 올린다. 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59년 10월 25일(음 을미년 9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주지 비구 응묵 삼가 쓰다.
▪출가대중 조실: 태공 월주 대종사 | 회주: 도법 종사 | 선덕: 연관 | 한주: 월선 각묵 진오 | 교무: 정화 | 시자: 승묵 | 주지: 비구 응묵 | 산내암자 감원: 해강 법광 정인
▪재가대중 공양주: 대비심 이경애 | 총무: 시우 | 교무: 능유 | 관리: 무우 이구 | 기획실장: 수지행 | 실상사중창불사 추진위원장: 안상수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위대한 지혜의 완성이란 뜻으로, 산스크리트어 mahā-prajñā-pāramitā이다.
▪마하(摩訶): 크다, 위대하다, 많다, 뛰어나다
▪반야(般若): 지혜, 특히 진리의 본질을 통찰하는 지혜
▪바라밀(波羅蜜): 완전한 상태, 최고의 상태
즉, 모든 번뇌와 고통의 근본 원인인 무지(無知)를 없애는 지혜, 진리(空)를 통찰하고 깨달음을 얻는 지혜, 자비(慈悲)와 연민을 실천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보물 제41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복장유물과 원래의 철제 수인(手印)의 발견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41호로 선정된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의 복장유물이 2013년 2월 공개되었다. 현재 철조여래좌성의 수인은 목재로 되어 있으며, 원래는 철제 수인이었으나 1980년대 중반에 목재로 대체되었다. 2009년에 실상사의 노후된 건물로 인해 해체 보수가 필요하게 되었고, 철불의 원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 결과 훼손 상태가 나타나 긴급보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2013년에는 철불상의 보수를 겸한 작업으로 내부를 다시 확인해 철제수인과 <관무량수불경*>과 <묘법연화경**>다리나 및 서지류 등 다양한 고려, 조선시대 복장유물들을 재확인하였다. 발견된 철제수인으로 인해 원래는 약사불이 아닌 아미타불상임이 밝혀졌으며, 이는 양 손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인 아미타불의 특징이었다.
위 사진의 철조여래좌상 등 부위를 통해 복장유물과 철제 수인이 확인되었다. 현재는 나무로 복원되었다.
*“관무량수불경”은 한자로 “觀無量壽佛經”이라 쓰며, 영어로는 “The Visualization Sutra of Amitayus Buddha”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전은 아미타불(무량수불)의 무한한 수명과 인도적인 성격을 설명하는 대중적인 부처 경전 중 하나입니다. 경전 내용에는 아미타불의 본래 모습, 그의 가르침에 따른 구원법, 그리고 부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무량수불경”은 불교에서 중요한 경전 중 하나로 여겨지며, 특히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믿음과 구원에 관한 신앙심을 가진 불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경전입니다.
**“묘법연화경”은 한자로 “妙法蓮華經”이라 쓰며, 영어로는 “The Lotus Sutra”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전은 불교의 중요한 경전 중 하나로 여겨지며, 매우 폭넓은 내용과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묘법연화경”은 부처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르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존재가 부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강조합니다. 특히, 부처의 대중에 대한 자비와 깨달음을 널리 퍼뜨리는 의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경전은 대표적인 대승불교 경전 중 하나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묘법연화경”은 여러 나라와 문화에서 다양한 해석과 해설을 받아들여져 불교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경전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불기 2559년 10월 25일(음 을미년 9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주지 비구 응묵이 쓴 글이 여운을 남긴다.
세간에서 무슨 의미를 더한들, 부처님이 무슨 이름으로 불린들 무슨 대수랴!
병이 들어도 변변하게 치료해줄 의사도, 약도 없는 깊은 산골에서 중생들이 마지막 의지하여 아픔을 빌어 달랠 곳은 오직 부처님뿐이었을 것이다. 저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을 안고 와서 고통을 호소하고, 낫기를 빌며 지극하게 오체투지하니 어찌 불보살의 감응과 가피가 없었겠는가! 이로써 언제부터인지 이 부처님은 중생의 병고를 씻어주는 ‘약사여래불’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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