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남원 실상사를 찾아가는 길목에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남겼던 곳의 포스팅이다. 인월-월평마을-영월사-중군마을-실상사-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동편제마을-관음사 등을 돌아보았다.
전촌동편제마을(前村마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조선조 숙종(1674년~1720년)초에 운봉읍 밀양 박씨가 황산대첩비 옆 북천에 낚시를 하다가 대첩비 입구의 소나무 숲이 우거져 아름다운 풍치에 이끌리어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이 마을의 시초이며, 그후로 김씨, 이씨, 강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주변관광지 황산대첩비지, 피바위, 국악의 성지, 실상사, 지리산허브밸리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도내 주요 유적지
남원시에는 황산대첩비지, 피바위, 정산봉, 여원치마애불 전주시에는 경기전, 오목대, 조경단, 만경대 암각서, 완주군에는 위봉산성, 진안군에는 은수사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설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대표적인 곳으로 남원시에는 고남산 제단, 완주군에는 태조암, 장수군에는 뜬봉샘, 임실군에는 상이암, 순창군에는 만일사 등이 있다.
남원 황산대첩비지 / 南原 荒山大捷碑址
이 곳은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군의 최고지휘관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고 특히 자신들의 침략과 관련된 흔적들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황산대첩비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으로 쪼아지고 파괴되었다.
이후 1957년 파괴된 황산대첩비를 수습하고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기 위해 보호각을 세웠고 비를 복원하여 비각 안에 보존하고 있다. 1963년 국가 사적 제10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남원 황산대첩비지 / 南原 荒山大捷碑址
「운성지 雲城誌」* 번역본 1994
자헌대부 호조판서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 동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신 김귀영은 교서를 받들어 짓고, 봉헌대부 여성군 신 송인봉은 교서를 받들어 글씨를 썼으며,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신 남응운은 교서를 받들어 전서를 쓰다.
만력 3년(선조 8년, 1575) 가을 본도 감사 박계현朴啓賢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운봉현 동쪽 16리에 황산이 있는데, 이곳은 태조 대왕이 전공을 세운 곳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명이 바뀌어져서 길가는 사람이 머뭇거리며 그곳을 가리켜 보고자 해도 그 곳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천백 년 이후에 높은 언덕은 무너지고 낮은골짜기가 메꾸어 진다면 더욱 혼미하여 그곳을 알 수 없게 될까 두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의 큰 비석을 세워 그 지역을 기록하고자, 고을의 노인과 어린 사람들이 함께 관아에 찾아와 하소연하기에 그곳을 지키는 신하로서 감히 이를 보고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삼가 이 사실을 올리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상께서 그의 장계를 수긍하여 전라도에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김귀영에게 글을 짓게 하니 나는 임금의 명을 받들매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삼가 살펴 보건대 고려 말엽의 국운은 위태로웠다. 태조께서 남원을 출발하여 운봉을 넘어 황산에 이르러 정봉 위에 올라 산세를 살펴보고서 병영을 설치하고, 크게 용맹을 내어 분격한 나머지 열 곱절이나 되는 적을 하루가 못되어 소탕하였다. 이는 근래 2백년 사이에 나라가 평정되어 풍파가 일지 않고 호남 영남은 평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이 전투의 승리에 의한 것이다. 남녘 백성들이 이에 감격하고 존경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비를 세워 우러러 사모하려 하니 어떻게 이를 그만두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보면 태조의 크나큰 공훈은 역사에 기록되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천지에 드높고 고금에 휘황찬란하다. 그 업적이 이 황산과 더불어 함께 할 것이니 굳이 조그만 빗돌에 이를 기록하여야 무궁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녘의 산 가운데 드높은 산은 무려 수백 곳이 있지만 태조의 위대한 공업이 이루어진 것은 때마침 이 산에 있으니, 이는 하늘이 높은 산을 창조하심으로부터 그 아름다움을 함께 일컬어 숭고한 산봉우리로 만세에 우러러 볼 수 있게 함이다.
기수岐水 북쪽에 사냥을 하는 것은 수레와 병사를 선별함인데 돌 북에 이 사실을 기록하였고, 회서 淮西를 평정한 것은 변방을 평정한 것인데 많은 신하들이 이 사실의 기록을 청하였다.
이로 미루어 태조의 무예와 승리의 전공 드높고 커서 만세에 길이 그 덕화를 입혀주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 사실을 큰 빗돌에 기록하고 거북과 용이 새긴 전각을 지어, 이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과 길가는 나그네들이 우러러 바라보고 고개 숙이어 사모하는 마음 세상이 다하도록 잊지 않게 함이니, 이 또한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귀영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헌송獻頌** 하는 바이다.
*1957년 발간된 『운성지(雲城誌)』(운성은 운봉의 옛 지명)
**헌송獻頌: 바치며 칭송하다.
황산대첩비 荒山大捷碑 / Hwangsan Battle Monumen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3년(1380)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이곳에 황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현종 8년(1667) 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1882)에 다시 고쳐 지었으며 이때 어휘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웠다.
새로 세워진 대첩비는 높이 4.25m로, 용을 새긴 이수(螭首)와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를 갖추고 있다.
아래 사진은 대첩비각과 파비각의 사이에 보이는 비석으로 1973년 현충일에 신석호 짓고, 김기승 쓰고, 남원군이 세운 황산대첩기념비(荒山大捷紀念碑)이다.
파비각 破碑閣 / Pabigak Monument House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때 세웠던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들을 모아 안치하였다.
황산대첩사적비 荒山大捷史蹟碑 / Hwangsan Battle Memorial Stone
이 비는 고종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이다.
일제강점기 때 황산대첩비와 비각 등이 함께 파괴되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기록되어 있다.
*화수산(花水山): 화수리(花水里)에 있는 황산대첩비지가 있는 산으로 지도에는 해발450m라 나오지만, 실제 평지에서 약20m 높이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야산이다.
아래 사진을 확대해 보면 화수산비각(花水山碑閣)으로 보인다. 이수와 비신이 탈락되어 있고, 지대석도 있으나 파손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인지, 복구 전인지는 모르겠다.
어휘각 | 御諱閣 / Eohwigak Pavilion
이 어휘(御諱閣)은 조선 태조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고려 우왕 6년, 1380)이 자기 혼자만의 공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지를 석벽에 새긴 유적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렷하였던 그 성적(聖蹟)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본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御諱閣內譯
이 御諱閣은 李太祖께서 荒山大捷 翌年 庚申年(1381)에 本 石壁에 都元帥인 自己와 八元帥 四從事의 名單을 刻하게 命하시여 自己單獨의 功이라기 보다는 同功一体의 大捷이었다는 聖旨를 表하였던 唯一의 遺蹟이었던 것이다.
春風秋雨 565年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하였던 그 聖蹟이 1945年 1月17日 새벽 倭帝 毒手로 本碑殿을 爆破하는 同時 鐵釘으로 쪼아버려 現在 그殘影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 다시 한글로 해석합니다.
어휘각내역 御諱閣內譯
이 어휘각은 이태조께서 황산대첩 익년 경신년(1381)에 본 석벽에 도원수인 자기와 팔원수 사종사의 명단을 각(세기다)하게 명하시여 자기단독의 공이라기 보다는 동공일체의 대첩이었다는 성지를 표하였던 유일의 유적이었던 것이다.
춘풍추우 565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하였던 그 성적이 1945년 1월17일 새벽 왜제 독수(일본의 나쁜 손)로 본비전을 폭파하는 동시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황산대첩비문
고려 운수가 다하려 함에 간악한 신하들이 조종을 어지럽혀 밖으로 오랑캐를 불러들였으니 어떻게 난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태조께서 왕명을 받자와 병사를 출정하되 군법을 따르시니 그 위엄 빛나고 빛나며 그 정신 위로 하늘에 솟구쳤네. 하얀 무지개 태양을 꿰뚫으니 승리의 조짐 앞서 알았고 하늘이 상서 내려주시고 땅은 승리 소식을 전해 주었다.
황산의 승리여 이에 한 번의 노여움으로 무예를 휘날려 우리의 깃발과 우리의 북소리 울려 퍼졌네. 철없는 왜적이 어린 날개 짓으로 감히 범에게 대항하려 하다니 제 목숨을 스스로 내주는 격이다. 정수리를 맞춤에 투구가 기울자 이미 예리한 살촉은 목구멍을 꿰뚫었다. 벌떼와 개미떼처럼 몰린 왜적들은 하염없이 길을 잃고 통곡하였다. 수많은 소는 골짜기에 가득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올라서니 사면에서 이미 무너짐에 어느 누가 감히 대적할 수 있겠는가? 우뢰와 번개처럼 공격하니 대나무 깨지는 듯 기왓장 무너지듯 피와 살이 낭자하고 사람과 신의 가호로 하루아침에 말끔히 쓸어버리니 삼한이 다시 창조되었고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바다건너 공물을 올린지도 어언 2백여 년
남녘의 백성들이 마음놓고 밭갈이하며 부모 섬기고 자식 기름은 모두 그의 공덕이시다.
이에 사모하고 축원하여 마음 속에 새겨 두었으니 더욱 오랜 세월 흘렀지만 어제처럼 생생하다. 만력 5년에 빗돌을 마련하고 이를 기록하여 황산 옛 터에 세웠으니 길이 무너지지 않게 하며 영원토록 성하게 하여 이 비석과 함께 있게 함이라.
만력 5년 정축(1577) 8월 일 현감 박광옥 세우다.
다음 이야기는 가왕 송흥록 · 국창 박초월 생가(비전마을)와 전촌동편제마을 포스팅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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