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다시 마주하게 될지 몰랐다. 가장 많이 가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를 연결하는 구간에 백제 무왕과 관련된 유적지가 밀집해 있다. 한여름 유적지 주차장 앞에서 선홍빛 배롱나무꽃이 반겨준다.
익산 쌍릉의 무덤 주인이 누구인가? 한참 많은 논란이 있었다. 대왕릉의 인골을 통해 가장 근접한 연대는 역시 백제 30대 무왕이다. 그래서 소왕릉은 왕비의 무덤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런 논란에 익산 쌍릉의 정식 명칭이 무왕릉으로 변경된듯하다. 하지만 완전한 변경도 아닌 것이 유적지의 안내판은 아직도 익산 쌍릉이다. 여기에 하나 더해진 것은 익산 왕릉원이다.
익산 쌍릉 (益山 雙陵) / 사적 Historic Site
굴식돌방무덤 2기가 남북으로 180m 거리에 있어 쌍릉이라고 불렸으며, 백제 30대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전한다. 쌍릉은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무덤으로, ‘말통*대왕릉’ 이라 부른다고 쓰여 있다. 봉분이 큰 북쪽 것을 대왕릉, 작은 남쪽 것을 소왕릉이라고 한다. 모두 둥그런 봉분을 쌓았으며, 무덤방은 화강암을 매끈하게 다듬어서 백제왕릉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고분들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1917년 일본인이 발굴하였는데, 이미 도굴되었지만 썩고 남은 목관과 관 꾸미개, 토기 등을 수습하였으며,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7년과 2019년에 다시 발굴조사하였는데, 대왕릉 무덤방에 있던 인골은 7세기 전반에 사망한 50세 이상의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따라서 쌍릉은 641년에 죽은 백제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으며 미륵사, 왕궁성 등 무왕의 익산 경영과 직접 관련되는 무덤으로 추정한다.
*말통: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과 같은 의미, 말은 서 의 뜻인 ‘마’, 통은 동으로 ‘마를 캐는 아이’ 를 가리킴.
Royal Tombs in Iksan
These two burial mounds are presumed to be royal tombs of the Baekje kingdom (18 BC-660 AD) dating to the 7th century. Located about 180 m apart on a mountain ridge, the two tombs are known as Ssangneung, meaning “Twin Tombs,” in Korean. The larger burial mound to the north is presumed to have belonged to a king, while the smaller one to the south is presumed to have belonged to his queen. Below each burial mound is a stone chamber tomb made of smoothly cut granite. These tombs were first excavated by Japanese historians in 1917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At the time, the tombs had already been robbed, and the few remains, including decaying coffins, earthenware, jade ornaments, teeth, and coffin nails, were retrieved. The tombs were surveyed again in 2017 and 2019. During these excavations, human bones were discovered in the larger burial mound. These bones belonged to a male in his 50s or later who died in the early 7th century, which suggests that the tombs belong to King Mu (600-641 AD), the 30th ruler of the Baekje kingdom, and his wife.
백제왕도 익산_익산 쌍릉
익산 쌍릉은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한다. 오금산 서쪽 능선에서 뻗어 내린 낮은 구름상에 2기의 원형 봉토분이 약 180m의 거리를 두고 북쪽에는 대왕릉 남쪽에 소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쌍릉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쌍릉(雙陵)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라고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금마군조에서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왕비)의 능이 있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이다.” 라고 쌍릉의 피장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절요』 충숙왕 16년조(1329년)에는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조상 호강왕의 능을 발굴(도굴)하였다....” 라고, 쌍릉의 도굴사실을 전하고 있다.
익산쌍릉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12월에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조사되었다. 조사결과는 13행으로 기술된 약식 보고서와 유리건판사진 및 조사당시 봉분 및 석실의 실측도로만 전해지고 있어서 그 구체적인 조사 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 소왕릉에 대해서는 대왕릉과 동일한 형식으로 되어있고, 규모의 크기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7년~2019년까지 익산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쌍릉을 재조사하였다. 이는 익산쌍릉의 명확한 정체성을 파악하고, 향후 효율적인 보존·정비 방안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익산 쌍릉_대왕릉
대왕릉 발굴조사 결과
봉분의 규모는 직경 25m, 높이 4m 내외로 확인되었으며, 봉분은 제석사지 목탑지 기단조성과 같은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봉분 내에서 조사된 석실묘의 구조는 단면 육각형의 7세기대 백제 사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확인되었다. 잘 다듬어진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벽석 위에 1매의 고임석을 두고 2매의 천장을 올린 형태이다. 짧은 연도를 두고 현실 내 중앙에는 목관을 안치하였던 화강암제 관대(길이 270cm, 너비 84cm, 높이 25cm)가 놓여있다.
석실 규모는 길이 401cm, 너비 175cm, 높이 225cm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왕릉보다도 큰 규모이고, 석재를 다듬은 기술과 구조의 치밀한 짜임새 등을 볼 때, 매우 공력을 들여 만든 석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 내 관대 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상자 안에는 102 조각의 인골이 담겨 있었다. 인골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피장자의 성별이나 생전상황들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확인되었다.
대왕릉의 석실 앞쪽으로는 길이 21m, 너비 4-6m 규모의 묘도가 조사되었으며, 웅장한 규모의 묘도를 통해 장례가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묘도가 조성되기 전, 석실을 중심으로 봉분의 일정한 범위에서 표시적 성토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사실은 대왕릉의 석실축조 완료 시점과 장례 행위 간에 일정한 시간적 차이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익산 쌍릉_소왕릉
소왕릉 조사결과
봉분의 규모는 직경 13m, 높이 3m 정도로, 대왕릉에 비해 서 작지만, 봉분 끝 주변으로 서쪽 6m, 동쪽 13m 길이 이상의 범위에 성토하여 묘역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전방부(남쪽 일원)는 봉분 성토층이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완만한 경사의 성토부를 조성하고 있다. 성토부가 끝나는 지점에는 장방형의 석재(길이 60~100cm)를 세워 반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석렬을 시설하였다. 봉분의 축조는 대왕릉에서와 마찬가지로 석실을 중심으로 층층이 다져 쌓은 판축기법이 이용되었다.
석실은 봉분의 남쪽에 치우쳐 위치하며,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두고 있다. 석실묘의 구조는 잘 다듬어진 판석을 이용해 뒷 벽과 양쪽 긴 벽을 세웠으며, 그 위로 1매의 고임석을 놓고 2매의 뚜껑 돌로 덮었다. 내부 중앙에는 1매의 화강암제 관대(길이 245cm, 너비 63cm, 높이 20cm)를 놓았다. 짧은 연도를 가지며, 현실과 연도는 각각 1매의 석재를 이용해 이중으로 폐쇄하였다. 전체적인 구조는 대왕릉의 석실과 동일하며, 석재의 가공양상 및 짜임새의 치밀함도 매우 유사하다. 다만, 그 규모가 길이 343cm, 너비 128cm, 높이 178cm로 대왕릉에 비해 작다.
묘도는 봉분의 전방부(남쪽일원)에 형성된 성토부를 수직에 가깝게 절개하여 조성하였는데, 그 규모는 길이 15m, 너비 4~6m, 최대깊이 3m이다. 묘도의 중앙에는 배수로를 길게 시설하였다.
소왕릉 조사에서는 2기의 묘표석이 출토되었다. 1기는 석비 형태로 석실묘 입구 부근, 다른 1기는 석주 형태로 봉분 내에서 확인되었다. 모두 일제강점기 교란 범위 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원래 위치는 알 수 없다. 2기 모두 글씨가 없는 무자비(無字碑)*로서 벽사의 의미로 세웠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소왕릉은 대왕릉과 비교하여 봉분, 석실, 묘도 등의 규모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석실의 구조 등 전반적인 양상은 거의 동일하다.
*무자비(無字碑): 럭셔리크로우의 개인적인 가설로 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도 죽기 전 자신의 업적이 많아 비석 하나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실제 무자비(無字碑):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비가 발견 되었다. 그런데 백제의 무왕 때(출생 미상~사망 641년) 어느정도 시기가 겹친다. 소왕릉의 주인이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 또는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그 주인공이라면 같은 이유로 업적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던게 아닐까? 이후 측천무후가 백제의 왕비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모방했다면?
일제강점기 당시 대왕릉 내에서는 옥제장구, 금동좌금구, 유문목제, 소소도제완 등이 출토되었고, 소왕릉 내에서는 목관의 본체와 뚜껑을 결합하고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 관식도금교구와 도금투금구가 출토되었다.
사비기 백제의 왕도 익산이 재조명되고 있다. 무왕(서동)의 생가터가 바로 근처이고, 오금산도 가깝다. 더욱이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제석사지도 근처이다. 하나하나 밝혀지는 백제의 역사에 오늘도 근처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사진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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