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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익산왕궁리유적(益山王宮里遺蹟)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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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왕궁리유적(益山王宮里遺蹟)

익산왕궁리유적(益山王宮里遺蹟)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백제의 성터. 이곳에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과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이전해지며, 이 유적지가 왕도였거나 왕도와 직접 관련된 곳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사적 제408

 

왕궁리 유적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의 명칭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금마저(金馬渚)라 지칭되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금마군(金馬郡)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금마군에 소속되었으나, 근대 행정개편시에 금마면과 왕궁면으로 분리되었다.

왕궁리 유적에 관한 유래는 마한 기준도읍설, 백제 무왕천도 및 별도설, 안승 도읍설, 후백제 견훤도읍설 등 다양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을 확인하기 위하여 1976년 및 1977년도에 부분적인 시굴조사가 시행된 후, 1989년도에 이르러 본격적인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유구들은 크게 3시기로 구분되는데, 첫째 백제 말경에 해당되는 유적, 둘째 통일신라 초기 유적(성벽), 셋째 통일신라 초기-말기 경에 해당하는 유적(사찰) 등이다. 발굴조사에 따른 실제 유적의 존재 시기와 성격은 많은 진전을 보게 되었다. 초창기 유적의 성격은 출토유물 등을 통해서 유적은 왕실이나 관부와 관련된 유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으며, 가장 늦은 시기의 유적은 사찰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마한과 관련한 설 및 후백제 견훤 도읍설은 뚜렷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백제 말기의 유적은 현존한 5층 석탑을 중심으로 한 북편의 동서 석축과 석탑 남측의 동서석축 및 주변의 많은 건물지가 해당된다. 그러나 백제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의 건물지는 사실상 구분이 거의 어려운 상태이다. 이러한 까닭은 백제가 멸망하였으나 건물은 그대로 계속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 건물지는 총 6기가 조사되었다. 건물지 중 탑의 서편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건물지는 정면(동서) 13.55m, 측면(남북) 11.28m 규모였다. 건물의 칸수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의 내부는 중앙에 한 변이 6.3m 크기의 정방형(正方形) 방 2개를 두었다. 이 2개의 방 사이는 2.5m 정도의 복도와 비슷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 방의 사방에는 벽체의 기초기설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이 벽체부 기초는 작은 돌과 기와편 등으로 섞어 쌓은 것이었다. 또 이 벽체 사이사이에는 초석이 중심거리 1.5m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각 방의 한 변에는 초석이 4개씩 놓여 있다. 왕궁리 유적 초기 건물의 특징은 초석하부에 적심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초석을 바로 놓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초석의 배치는 건물지의 하중에 따른 다른 배려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백제 말기의 유구로는 석탑의 남측 및 북측석축이 있다. 석축은 총 연장 길이 143m 정도이며 최고 2m 이상 높이로 쌓았으나, 지금은 잘 남아 있는 곳이 높이 0.85m 정도에 불과하다. 석축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석축은 바닥 층에 1-2단 정도 남아 있을 뿐이며, 부분적으로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곳도 있다. 석탑의 북측 석축은 동서 165m 정도 조사되었다. 이 석축은 통일신라 사찰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석축 앞을 탑 주변까지 매몰하여 평지로 만들었다. 이 석축의 하부인 구지표층에서는 중국 수(隋)시대의 청자연화문병편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유적은 현존하는 성벽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 성벽은 직사각형으로 구축되어 있다. 성벽의 규모는 남~북 길이 493.44m, 동~서 길이 235m이다. 성벽의 너비는 3m내외로 전체적으로 비슷하다. 성벽의 구조는 아직 전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남성벽 동서 양측에 정면 11.45m 규모의 동·서문지가 드러났고, 서성벽에서도 정면 8.6m 내외의 서문지가 조사되었다. 남성벽의 중심부에서도 중문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 성벽의 안팎은 너비 0.8m 정도의 부석시설(敷石施設)이 드러났다. 이 부석시설은 성벽의 내측면에 있는 곳, 외측면에 있는 곳, 내외측 양면에 있는 곳 등이 확인되었다. 이 부석시설의 설치는 성벽과 접한 상태여서 성벽보호를 위한 기능이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건물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건물지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데, 백제 말경의 건물을 지속하여 사용하거나, 필요시 개증축하였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통일신라시대 초기~후기의 유적은 사찰터이다. 사찰터는 토층과 출토유물 등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지어져 가장 늦게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현존하는 5층 석탑은 이 사찰과 관련된 유적의 유물이다. 사찰의 중문지는 심한 파괴로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건물의 배치는 남쪽으로부터 석탑, 금당지, 강당지가 차례로 나타났다. 석탑은 주변에 대한 정밀한 조사결과, 창건 당시 조성된 것이 아닌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회랑은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찰 중심건물과 함께 존속되었던 유적은 강당지, 서편에 2기의 건물지와 석탑 동편에서 조사된 건물지 1기 및 통일신라 후기의 와요지(瓦窯址)이다. 5층 석탑은 지대석을 맨 밑에 놓고 단층기단으로 조립하고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 별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탑 양식은 백제의 미륵사지석탑이나 정림사지석탑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기와가마터(瓦窯址)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조성되었다. 위치는 석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40m 동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 와요지는 크기나 형태, 내부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동일시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가마의 구조는 앞인 남쪽에 넓고 움푹 패인 회구부가 자리잡고, 차례로 화구부, 연소실, 소성실, 연통순으로 구성되어있다. 연통부는 파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천장은 대부분 무너져 내려 벽체가 가마 내에 쌓인 채 확인되었다. 측면 벽체는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화구부의 이맛돌과 붓돌은 2기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마의 구조는 반지하식으로 일반 통일신라시대의 양식과 동일하며, 기와와 함께 등잔이나 완, 도가니 등이 함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작은 토기를 동시에 구웠을 가능성이 있다.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된다. 백제시대의 유물로는 기와류, 토기류 등이 대부분이다. 백제 기와류는 수막새, 인장기와, 평기와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수막새는 연화문수막새와, 태극문수막새, 소문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연화문수막새는 공주와 부여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7세기경의 볼륨이 낮고 여린 듯한 문양과, 미륵사지에서 많이 출토된 드림새가 작은 복엽단판의 고운 수막새, 연꽃잎의 가장자리가 하트형태와 비슷하게 처리된 것 등이다. 태극문수막새는 공주 공산성 및 부여 부소산성 등지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문양은 세 종류가 조사되는데, 중앙에 작은 듯한 둥근 자방을 배치하고 편평한 드림새에 4조의 곡선의 양각선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배치하는 것, 볼륨이 크고 주연부로 가면서 점차 가는 문양을 역시 등간격으로 4분하여 곡선으로 처리한 것, 자방을 중심으로 연화문과 볼륨 있는 문양을 겹치게 하여 4분하여 곡선으로 처리한 것 등이다. 소문수막새는 출토 유적이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부여의 부소산성을 제외하면 거의 확인이 어렵다.

인장기와는 도장을 기와 제작시에 찍은 것으로서, 판독은 ‘수부, 전부갑와, 전부을와, 사조, 미사, 과지, 기유, 상부(首府, 前部甲瓦, 前部乙瓦, 巳刀, 未斯, 戈止, 己酉, 上部)’ 등이다. 이들 인장기와의 내용은 백제 행정지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최고의 관청기관을 지칭하는 것, 간지를 의미하는 것 등으로 확인되었으나 명확한 뜻은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백제토기는 대형항아리, 전 달린 토기, 뚜껑, 바리, 시루 등 다양하다. 이들 토기중 대부분은 파편이 많지만 기형과 태토의 질은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것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이는 기와와 함께 국가가 관장한 가마에서 구워 부여 및 왕궁리 유적으로 동시에 공급하였을 가능성을 높게 하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류는 수막새, 암막새, 명문와, 평기와 등이다. 막새는 복엽단판연화문 수막새, 복엽중판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괴운문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이들 막새는 대부분 금당지와 강당지에서 출토되었다.

명문기와는 문양을 타날하는 도구에 함께 새겨 압인되는 것이 대부분이나, 기와 성형시 건조전에 가는 철사나 나뭇가지 등으로 눌러 쓴 것도 있다. 이들 명문은 ‘대관사, 대관관사, 관궁사, 정역, 풍도사전…, 삼백…,(大官寺, 大官官寺, 官宮寺, 丁易, 風道使前…, 三百…)’등이다. 이들 명문의 내용은 사찰 이름, 숫자 등이 확인되었으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출토유물 중에는 중국 수(隋)나라시대의 청자연화문병편과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백자 박산로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왕궁리 유적 [益山 王宮里 遺蹟] (고고학사전, 20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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