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놓으려 합니다.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한 동학혁명기념관의 묵직한 울림부터, 남원 땅에 남아있는 동학농민군의 흔적까지... 아직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사진 폴더 안에 가득합니다. 앞으로 천천히, 시간을 쪼개어 그날의 감동과 역사의 숨결을 여러분께 생생하게 전달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삼례뜰은 반봉건·반외세 투쟁에 앞장 선 역사의 현장이다. 1892년 11월(음) 삼례뜰에서 수 천명의 동학교도들이 삿된 종교를 퍼뜨린다는 죄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고 시위를 하였다. 전라감영의 무력진압을 각오한 삼례집회는 실은 탐관오리에 대한 투쟁이었다.
1894년 9월(음) 10만 여 농민군이 항일투쟁의 오색 깃발을 앞세우고 다시 삼례뜰에 집결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일본군과 탐관오리들을 쫓아내기로 결의한 농민군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농민군은 스스로 의병이라 불렀고, 집강소 통치를 실현한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이 넘쳤다. 동학농민혁명의 제 2차 기병을 알리는 삼례봉기는 근대 민족·민중운동의 출발이요 새로운 한국사회를 밝히는 위대한 횃불이었다.
동학농민군 출진상
1894.10월의 삼례농민봉기는 국권수호를 위하여 일어선 반일항전의 출진(出陣) 이었다. 일본군의 국권침탈만행에 분연히 떨쳐 일어선 10만여 동학농민의병은 주적을 관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고 오직 애국단심·구국의 일념으로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이곳 삼례에서 북진을 시작하였다. 2004년 10월 10일
![]() |
![]() |
폐정개혁 12개조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쌓인 원한을 씻고 서정(庶政)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하게 징벌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하게 징벌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는 소각한다.
6. 갖가지 천인들의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의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락한다.
8. 무명의 잡세는 모두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일본인과 내통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한다.
11. 빚은 공적인 것이나 개인의 것이 나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한다.
대동의 장
▫동학농민봉기 삼례집회 당시의 농민군중 운집의 터를 재현
조형물: 힘-하나 되어
▫민초 농민들의 뜻이 하나로 결집된 의지의 기치, 또는 이상의 푯대, 힘을 상징
▫누구든 소망을 담은 돌을 얹어놓는 행위를 통한 무한다수 공동제작의 개념, 참여의식의 발현에 의한 지속적인 확산과 계승을 의도
![]() |
![]() |
농민군 4대 명의
1.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不殺人 不殺物 불살인 불살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忠孝雙全 濟世安民 충효쌍전 제세안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逐滅倭夷 澄清聖道 축멸왜이 청징성도)
4. 군사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앤다. (驅兵入京 盡滅權貴 구병입경 진멸권귀)
*권귀: 권세 있는 귀족을 뜻함.
![]() |
![]() |
추념의 장
▪이름 없이 스러져간 농민군들의 넋을 위로하고 추념하며 자아존재와 역사와 우주, 즉 ‘나’-‘동학농민군상’-‘하늘’이 거울에 중첩 반추되는 영상속에서 하나되는 체험을 통하여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핵심인 인내천 사상을 인과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사유의 장으로서, 경건의 돔으로 조형.
![]() |
![]() |
▪이상세계에서 서로 일체화로 어우러진 동학농민군들의 역동적 모습을 표현하여 현실에서 이루지못한 그들의 한을 달래는 의미와 함께, 독립적공간을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대기와 빛과 시야가 통과되어 주변환경과 유기적 일체공간을 이루는 투조구조는 산화한 농민군들의 영령들에게 부여하는 완전한 자유의 상징.
동학농민혁명봉기비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를 세우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는 조선 말기 외세의 침투와 사회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에 등장한 구호이자 이념입니다. 문자 그대로 “왜(일본)와 양(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義)를 떨쳐 일으킨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특히 1893년 동학(東學)의 보은집회에서 공식적으로 제창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 |
![]() |
전봉준 재판기록 중에서
“일본이 개화를 핑계대고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민간에 알리지 않고 또 격서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도성에 들어와 왕궁을 부수어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에 초야의 사민들이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개탄스러움을 참을 수 없어 의병을 모아 일본과 싸워서 그 사실을 따지고자 함이다”
![]() |
![]() |
전봉준 대장이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지금 나라가 어지러울 때 스스로 마음을 속이며 어찌 일순간이라도 명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일본 침략자들이 구실을 만들어 군대를 동원해 우리 임금을 핍박하고 우리 백성을 어지럽히니 어찌 그대로 참을 수 있겠는가. (중략) ···의(義)로써 죽음을 같이하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중앙은 사발통문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발통문(沙鉢通文)
고부군수의 탐학에 반발하여 관아 습격을 계획하며 작성한 문서
1893년 | 42.5×30cm || 복제품(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장 / 시도지정유산 제233호)
1893년 음력 11월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관아 습격을 계획하며 작성한 문서로,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없게 사발 형태로 동그랗게 둘러쓴 것이 특징이다. 주요 내용으로,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첨하고 인민을 괴롭힌 탐관오리들을 처단할 것
4. 전주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향할 것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례뜰의 입지 조건
삼례뜰이 재기병 장소로 선택된 것은 삼례가 전주에서 멀지 않은 역촌으로서 길이 사방으로 트여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삼례의 주막에 모여 재기병을 결의하고 통문을 날렸던 것이다.
삼례뜰에 집결하는 농민군
어느덧 삼례뜰에는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농민군, 그리고 무기와 군량미를 실어 나르는 대열이 끝없이 이어졌고, 전주성을 점령하고 집강소 통치를 실현한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삼례 제2차 기병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커다란 위기감을 느낀 호남 농민군은 “나라를 구하는 의병 대열에 합류하라” 는 통문을 날렸고 마침내 전국의 농민군은 집강소 통치를 잠시 접고 일본군을 물리치고자 삼례뜰에 다시 모였다.
척왜척양(斥倭斥洋): 왜와 양 오랑캐를 물리치자!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
1894년 9월(음) 삼례뜰에서 동학농민군은 당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백성들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날의 기억이다...
'완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정취 가득했던 완주 안수산 안수사 방문기 (2023년 11월) (13) | 2025.06.14 |
---|---|
완주 종남산 송광사 꽃양귀비 & 연등 (28) | 2025.05.17 |
완주 송광사 연꽃 &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 이야기 (101) | 2024.07.04 |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 완주 되재성당 [성지순례] (71) | 2024.05.09 |
완주 화산 꽃동산 (춘산에 핀 철쭉과 겹벚꽃, 겹황매화, 꽃잔디, 금낭화, 산딸나무꽃) (64) | 2024.04.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