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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 완주 되재성당 [성지순례]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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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천주교의 성지가 널리 분포되어 있습니다. 오늘 올리는 완주군 화산면에 있는 되재성당은 전주 럭셔리크로우의 천주교 성지순례 세 번째 장소입니다.

완주군 화산면 되재성당
완주군 화산면 되재성당

 

되재성당지 앞 주차장 푯말
되재성당지 앞 주차장 푯말

 

▪천호성지-도보 5시간, 차 20분-17.7㎞

▪백석 공소-도보 50분-2.13㎞

▪수청리 공소(산행)-도보 3시간-7.01㎞

▪수청리 공소(주행)-차 30분-15.7㎞

되재성당 전경
복원된 되재성당 전경
되재성당지(升峙聖堂址)
되재성당지(升峙聖堂址)

 
되재성당지 | 升峙聖堂址 | Doejae Catholic Church Site /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119호
되재성당은 1895년에 세워진 최초의 한옥 성당으로, 서울 약현성당(藥峴聖堂)*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초기 성당의 모습은 제8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뮈텔주교(Gustave Charles Marie Mutel)의 일기**에 그려진 도면과 제1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주교(Florian Demange)가 찍은 사진 자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바실리카 교회건축양식을 한식 목구조에 적용한 한옥 성당이었다.

되재성당지_드론촬영
되재성당지_드론촬영

단층 한식 목구조 건물로 기와를 얹은 팔작집이었으며 평면은 장방형인데 제단과 출입구를 나란히 배치하여 제단을 향하는 공간의 깊이를 확보하였다. 또한 남녀를 구분하는 당시 풍습에 따라 출입문을 따로내고 내부 중앙에 가림막을 설치하였다. 성당의 부재는 논산 쌍계사의 부재를 사용하였다.

되재성당지_드론촬영
되재성당지_드론촬영

 

이처럼 되재성당은 서양 문화가 한국에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념물이다. 그러나 초기 성당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1954년 공소 건물을 새로 세웠다가 2006년 복원사업을 통해 일부 복원되었다. 성당 구내에는 성당 외에 사제관과 기술학교인 태극계명학교 등이 있었고, 성당 뒤편에는 전라도에서 활동했던 두 명의 프랑스 선교사(조스 신부, 라푸르카트 신부) 묘가 있다.
*약현성당(藥峴聖堂):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고딕 양식 성당 건물로 1892년 9월 준공 / 대한민국 사적 제252호

Jesus Christ
Maria

 
Doejae Catholic Church Site / Jeonbuk-do Monument
Doejae Catholic Church was established in 1895. It was the second Catholic church built in Korea, after Yakhyeon Catholic Church was built in 1892 in Seoul. It was also the first Catholic church to be built in a traditional Korean style. The church was destroyed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and in 1954, a chapel-of-ease was built on its former site. The current building, built in 2006, is a recon- struction of the original church.

Maria
Maria

 

The original building's design was confirmed through drawings of its plans found in the diaries of Gustave Charles Marie Mutel (1854-1933), the 8th vicar apostolic of Korea, as well as through photographs taken by Florian Demange (1875-1938), the 1st vicar apostolic of Daegu. The single-story building with a tile hip-and-gable roof applied the layout of a Christian basilica to a Korean-style wooden structure. It featured a rectangular layout with the main altar and the main entrance facing one another on the opposite ends of the building. This unconventional layout maximized the space facing the altar. To uphold the Confucian principle of separation of the sexes, wooden partitions were installed down the center of the church to create left and right aisles for men and women, respectively, that were accessed by separate doors. These features make Doejae Catholic Church a valuable example of the process by which Western culture was adopted in Korea.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뮈텔 주교 일기 (Mutel 主敎 日記)

정의 및 개설

제8대 조선대목구장인 주교 뮈텔이 교회 활동 및 선교사들의 업무 보고 등을 기록한 일기.

이 일기는 뮈텔 주교가 교구장에 임명된 소식을 접한 1890년 8월 4일부터 지병으로 선종(1933년 1월 23일)하기 직전인 1933년 1월 14일까지 약 42년 5개월 동안 그 자신의 개인 사정과 교회 활동 및 선교사들의 업무보고 내용, 당시 조선사회의 정치, 외교, 사회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관심사를 기록하였다.

되재성당지_드론촬영
되재성당지_드론촬영

 

편찬 / 발간경위

이 일기는 뮈텔 주교가 사망한 후 서울대목구 주교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1958년 대전대목구가 설정되는 시점에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다가 다시 프랑스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의 고문서로 이장되어 보관되었다. 1983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최석우 신부가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배세영(裵世榮, Marcel Pélise) 신부의 협조로 복사본 일부를 입수하였고, 1984년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일기 전체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인수하였다.

필기체 원문의 판독과 이를 활자체로 타이핑하는 작업은 벨기에 샤미스트(Samist)로 전주교구에서 활동하던 디디에(Didier, 池正煥) 신부가 담당하여, 1984년 말에 일단 완료하였다. 동시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이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2008년 12월에 마침으로써 총 24년 동안 모두 8권의 시리즈로 완간해 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서지적 사항

원문은 주로 프랑스어 필기체로 기록되었으며, 가끔 라틴어 문장이나 한글, 한자 등으로 기록된 단어들도 있다. 전체 분량은 6,000여 쪽에 이르며, 원문 판독이 쉽지 않아서 마이크로필름으로 된 원본을 다시 인화한 뒤 원문을 판독하였다. 한글 번역본의 경우, 여러 한국인 프랑스어 전공자들이 초벌 번역한 것을 최석우 신부가 일일이 검토하여 교열하고 필요한 부분에 각주를 달아서 감수 작업을 하였고, 직접 번역도 하였다.

복원된 태극계명학교(太極啓明學校)
복원된 태극계명학교(太極啓明學校)

 

내용

일기에는 교구장 임명과 부임, 선교사들의 인사이동과 연례사목 보고, 본당과 공소의 변모, 교세 확대와 교안(敎案) 발생, 베네딕도회, 메리놀회의 한국진출과 대구, 원산, 평양, 연길지역 대목구나 지목구 설치, 교육기관과 양로원, 보육원 등의 설립, 경향신문과 경향잡지의 간행, 순교자의 시복(諡福)주1 재판과정, 시복식과 유해발굴 관련 내용 외에도, 구한말 외교관계와 동학(東學), 의병(義兵), 일제의 침략과 합병과정, 3 · 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내용들까지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과 종탑
되재성당과 종탑

 

한옥 종탑이 고풍스럽다
한옥 종탑이 고풍스럽다

한옥 종탑의 종
한옥 종탑의 기와

한옥 종탑의 종
한옥 종탑의 종

 

되재성당 종탑
되재성당 종탑

사제관(사택) 앞 되재성당 비석
사제관(사택) 앞 되재성당 비석

 

되재성당
박해가 시작되면서 전국 신도들의 피난처가 되었던 고산지방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1년 이었다. 초대 본당 신부인 우도(오) 신부는 차돌박이에 부임하여 성당을 설립하려다 뜻을 이루지못하였으나, 1893년 비애모(우) 신부*가 부임하여 1894년 정월 되재에 정착하여 성당 공사를 착공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 전쟁으로 1895년 가을에서야 완공하였고, 1896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뮈렐 주교에 의해 축성식을 가졌다. 성당 건물은 한국가옥의 전통양식인 팔작기와 지붕의 목조와 가로서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한강 이남에서는 첫 성당 건물이었다. [사제관 앞 비석 본문]

*비애모 (P. Villemot)신부: 되재성당 1대 신부 (1893~1898)

한강 이남 첫 성당_되재성당
한강 이남 첫 성당_되재성당

 

1906년 베르몽(목) 신부는 애국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신성학교를 설립하여, 1908년 태극계명학교로 개명하고 태극계명 측량 강습소를 열어 측량기술 요원을 양성하였다. 되재본당은 1929년 진산 지방리 본당을 세웠고, 이를 발전시켜 1935년에 금산 본당을(수정 삭제된 부분)분리 신설하였다. 1944년에는 도시화 현상으로 교세가 감소하여, 수청리 공소로, 다시 고산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되재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병화를 입어 전소되고, 1954년 다시 그 자리에 공소강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 선교사의 묘소 앞
프랑스 선교사의 묘소 앞
프랑스 선교사(라푸르카트, 조스 신부) 묘
프랑스 선교사(라푸르카트, 조스 신부) 묘

 

두 선교사 묘지 위의 대리석 십자가는 되재본당에 사목방문 오셨던 뮈텔주교가 1897년 1월 22일에 세웠다.

라푸르카드 신부 (Lafourcade, Arnaud;1860~1888)
라푸르카드 신부 (Lafourcade, Arnaud;1860~1888)

 

∴ 라푸르카드 신부 (Lafourcade, Arnaud;1860~1888)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아르날도, 한국 성은 나(羅). 1860년 11월 4일 프랑스 우르퀴 에서 출생했다. 1883년 2월 19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86년 9월 26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해 12월 1일 조선을 향해 출발해 이듬해 서울에 도착하는 그는, 임시로 블랑 주교의 주교관에서 얼마 동안 지내다가 전라도 지방에 파견되었다. 그는 한 해 동안 34개의 공소를 방문하여 1,770명 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성인 52명에게 세례성사를 베푸는 등 매우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공소 순방 중에 험한 산길을 찾아 헤매거나 불편한 잠자리,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등 여러가지 힘든 사정으로 인해 본래 강인한 성격에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였음에도 차츰 건강이 나빠져, 결국 부임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장티푸스까지 겹쳐 더욱 심한 고생을 했다. 되재본당에서 홀로 외로이 임종을 준비하고 있던 중, 1888년 7월 10일 우연히 이곳을 방문한 베르모렐(Vermorel)신부와 동료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선종했다. 나이는 만 28세였다. 며칠 후 앞산에 초빈(草殯)했다가 몇 달 후에 수청리로 모셨다. 이후 비에모(Villemot)신부가 1896년 10월 요왕골의 조스 신부의 유해와 함께 이곳으로 이장해 모셨다.

조스 신부 (Josse, Jean Baptiste; 1851~1886)
조스 신부 (Josse, Jean Baptiste; 1851~1886)

 

∴ 조스 신부 (Josse, Jean Baptiste; 1851~1886)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한국 성은 조(趙). 1851년 10월 19일 프랑스의 브와소에서 신앙심 깊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187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80년 파리외방 전교회에서 교육을 받은 뒤, 1881년 10월 26일 선교지인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가, 상해에서 리델(Ridel)주교를 만났는데, 그의 지시로 일본의 나가사키로 건너가 그곳 인쇄소에서 일을 도우며 동료 신부들과 함께 조선말을 배우면서 입국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주교 성성식을 갖기 위해 일본에 왔던 블랑(Blanc)주교를 수행하여 1883년 10월 1일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부엉골과 여러 공소를 순회하며 사목했는데,1884년 9월에는 전라도 지방의 사목을 맡게 되었다. 1886년 전라도 함열지역 공소를 순회하던 중 쇠약한 몸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안대동 공소에서 선종했다. 나이는 만 35세였다. 조신부의 시신은 안대동에 초빈(草殯)했다가 수개월 후 요왕골에 임시로 묘지를 썼다. 그 후 되재성당 주임 비에모 신부가 1896년 10월 라푸르카드 신부의 유해와 함께 이곳으로 이장해 모셨다.

선교사 묘지에서 본 되재성당
선교사 묘지에서 본 되재성당

선교사 묘지에서 본 되재성당
선교사 묘지에서 본 되재성당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되재성당_2024년 05월

성당 측면의 기둥과 마루
성당 측면의 기둥과 마루

 

되재성당 내부 액자_1895년 이후 사진
되재성당 내부 액자_1895년 이후 사진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인 되재성당(전북 고산, 1895년 이후)

되재(현 고산) 본당은 비에모(M.P.P. Villemot, 禹一模;우일모) 신부가 1893년 4월부터 전북 완주군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설립되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비에모 신부는 1895년에 되재(현 화산면 승치리)에 전통한옥 형태의 팔작 기와에, 단층 5칸으로 된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비에모 신부가 이처럼 산골에 본당을 정한 것은 아직 박해의 여파가 남아 있었고, 이로 인해 신자들이 주로 전라도 북부 산간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되재 본당이 설립된 뒤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성당 주변에는 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많은 신자들의 쉼터였을 마루
많은 신자들의 쉼터였을 마루

 

되재성당 내부
되재성당 내부

 

성당 내부 중앙은 칸막이가 있어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가 이용하며 앞쪽 문부터 노인, 장년, 어린이가 신을 벗고 출입할 수 있도록 마루로 되어 있다.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가 이용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가 이용

 

성당의 오른쪽
성당의 오른쪽(여자)

 

성당의 왼쪽
성당의 왼쪽(남자)

 

역대 신부님들의 사진
역대 신부님들의 사진

 

제단(祭壇)
되재성당의 제단(祭壇)
베드로 목상과 바오로 목상이 보인다
베드로 목상과 바오로 목상이 보인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뒤로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목상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 목상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이사야 53장 5절

 

옛날 프랑스 선교사들이 활동할 당시의 십자가
옛날 프랑스 선교사들이 활동할 당시의 십자가

 

되재성당 실내
되재성당 실내

 

되재성당 좌측(남자)
성물

되재성당 내부 좌우의 벽면에는 1처소 ~ 14처소까지 십자가의 길을 표현해 놓았다.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되재성당의 역사 신문기사
되재성당의 역사 신문기사

 

기사 내용 일부 발췌
...1895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비에모 신부의 기록은 되재가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였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비에모 신부는 주일미사에 400여명의 신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들었다고 기록에 남겼다.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신앙인들이 어떻게 함께 모여 살게 되었을까.
되재가 위치한 전북 완주군 고산면 일대에는 산과 골짜기가 많아 박해시대 당시 전국 각처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한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 교우촌이 넓은바위, 천호, 차돌박이, 석장리, 되재 등 무려 50여곳이나 됐다고 한다.

되재성당 앞에서
되재성당 앞에서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현재 천호성지에 안장돼 있는 이명서(베드로), 손선지(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 한재권(요셉)순교성인 4위김영오(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110여명이 이 지역 출신이다.

성당 앞 예수 그리스도상
성당 앞 예수 그리스도상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생기자 되재에 성당이 세워졌다. 1895년에 완공되고 이듬해인 1896년 뮈텔 주교에 의해 축복식을 가졌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단층 5칸 되재성당은 우리나라 첫 한옥 성당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2004년 7월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1886년 한불조약: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한미조약 체결로 서양인들이 공공연하게 들어와 활동하게 되자, 1세기 간에 걸친 조선정부의 천주교 탄압정책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선교사의 전교활동이 1886년의 한불조약으로 가능해졌다.

되재성당
성당 앞 예수 그리스도상

되재성당_2024년 4월
되재성당_2024년 4월

 

되재성당 종탑_2024년 4월
되재성당 종탑_2024년 4월

 

되재성당_2024년 5월
되재성당_2024년 5월

 

되재성당지_드론촬영
되재성당지_드론촬영
되재성당_2024년 4월
오늘도 되재성당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

참고로 순례객을 위해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오전 11시 되재공소에서 미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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