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2월 05일에 다녀온 전주 한옥마을 역사관 이야기 시작합니다.
전주 한옥마을의 역사를 알고 한옥마을을 즐기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겠죠? 위치도 한옥마을 중심에 있어서 주변의 많은 시설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역사관 Chronicle of Jeonju Hanok Village
두 개의 한옥 전시실이 있습니다. 좌측에는 상설 전시실 및 사무실이, 우측에는 기획전시실이 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역사관의 현판은 기본적으로 찍어주고, 아래 벤치에 있는 작은 그림도 찍어봅니다.
꽃심 지닌 전주한옥마을 이야기 / The story of Jeonju Hanok Village
전주한옥마을의 역사는 건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을 살았던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 길가의 나무와 꽃, 골목의 바람과 햇살, 마당가 우물의 깊은 바닥에도 한옥마을의 역사가 숨 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900여 채의 전주한옥마을은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져서 오늘에 이르렀을까요?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 속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전주한옥마을 Jeonju Hanok Village
• 행정구역: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교동 일원
• 면 적: 298,260㎡
• 인 구: 619세대, 1,164명(남 554/여 610) 2018년 6월 현재
• 건축물: 947동(한옥 735, 비 한옥 212) 2018년 6월 현재
한옥마을은 조선왕실의 탯자리 / Hanok Village, the Root of the Joseon Royal House
조선은 건국(1392년, 태조 원년) 후 현재의 한옥마을 중심부에 경기전(1410년, 태종 10)을 세우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을 모셨다. 이후 전주사고, 조경묘, 오목대비, 이목대비를 세워 조선왕실의 뿌리로 성역화하였다. 왕조의 성지였으므로 주변에 민가가 거의 없었다.
일본인, 전주 최대상권을 차지하다 / The Japanese Grip on the Largest Business District in Jeonju
을사늑약(1905년)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전주에 들어오면서 다가동 근처 전주 천변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전주부성 안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 거주할 수 있었고 평민들은 성 밖에 거주했다. 1907년에서 1911년까지 성곽이 철거되자 일본인들이 성 안을 점거했다. 1910년대부터 30년대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으로 시가지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확장되면서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주인, 한옥촌을 형성하다 / Hanok Villages Built by the People of Jeonju
일본인들이 풍남문 서쪽을 장악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전주 사람들은 풍남문 동쪽인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이렇게 형성된 한옥 군락은 서양풍 선교사촌, 학교, 성당 등과 어울리며 이색적인 도시 경관을 갖게 되었다. 당시 한옥마을 거주자는 부유하고 학식 있는 상류층 지식인 계급이 많았다.
한옥마을, 변화를 맞이하다 / Hanok Village in the Face of Changes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옥마을은 부촌이었다. 문화연필, 백양메리야쓰 같은 유명 기업이 한옥마을에 자리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업화시기를 거치면서 기업들은 공단으로 이전하고 사람들도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또한 양옥과 아파트 도입으로 한옥마을은 정체성 위기에 처한다.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다 / Designated as a Hanok Conservation Area in 1977
한옥마을은 수백 채가 모여 있는 그 모양만으로도 장관을 이루었는데 그와 관련한 일화가 전해져온다. “당시 어른들 이야기를 들으면 박정희 대통령이 전주를 방문했는데 기차 타고 가면서 보다가 한옥이 좋다고 하니까 도시보존계획 세워서 묶었다고 해요.”(한옥마을 주민 남경춘 인터뷰 중에서) 실제로 1977년도에 풍남동, 교동 일대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된다.
1980년대, 빈민가로 변해가다 / 1980s : Turning into a Slum
한옥보존지구로 묶이면서 개발행위가 제한되고 규제가 강해지면서 주민 불만과 불편이 높아졌고 떠나는 주민들이 많아졌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한옥마을은 빈민촌으로 전락했다. 고향이기에 어쩔 수 없이 머무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뜨내기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좀도둑이 많고, 쥐 많고, 지붕 새는 것이 한옥마을 3대 자랑이라고 할 정도로 쇠락하게 되었다.
1987년, 건축규제를 완화하다 / 1987: Construction Restrictions Eased
집이 무너져도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없는 극심한 규제 속에 주민 반발이 높아졌고, 1987년 전주시는 한옥보존지구를 ‘제4종 미관지구’로 변경하고 건축규제를 완화하였다.
1997년, 미관지구를 해제하다 / 1997: Type 4Zoning Cancelled
10년 후인 1997년, 미관지구가 폐지되면서 법적 규제가 사라짐에 따라, 양옥이 다수 들어섰다. 그러나 건설경기불황과 IMF 여파로 신규 가옥이 많이 지어지지는 않아, 크게 훼손되지 않고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새천년을 맞아 다시 한옥을 살리다 / A Breath of New Life to Hanok in the New Millennium
1996년 대한민국이 한일월드컵을 유치하고 이듬해 전주가 개최도시로 선정되면서 한옥마을은 다시 한 번 꿈틀거린다. 한옥마을 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99년 ‘전통문화특구 기본 및 사업계획’이 작성되었다. 세계인이 전주를 찾아올 때를 대비해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보여줌으로써 전통문화도시 전주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자는 의도였다.
2002년~2010년, 한옥보전제도를 만들다 / 2002-2010: A New Hanok Conservation Plan
2002년 전주시한옥보전지원조례가 제정되고 이를 통해 한옥의 개·보수가 지원되었다. 2003년에는 전통문화구역 지구단위계획으로 지정·고시되었다. 2004년 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을 결성하였고, 문화관광부·전주시·문화계가 공동으로 TF팀을 구성하였다. 민관의 공동 노력으로 2005년 전통문화중심도시 조성 선도사업에 선정되었고, 2006년 전주 전통문화도시육성기본계획이 확정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재정 투입으로 가장 전주다운 한옥마을 만들기에 성공했다.
2010년 이후, 한옥마을 전성시대를 열다 / 2010 and Onward: Heyday for Hanok Village
보기 좋은 한옥들과 다양한 체험시설이 늘어나고 은행로에 실개천이 놓이는 등 크고 작은 변화를 거치면서 전주 한옥마을은 오늘에 이르렀다. 2014년 이후 전주한옥마을은 해마다 국내 관광지 최상위에 올랐으며, 2017년 상반기에 발표한 빅데이터 조사결과(이동통신사, 카드사, 공공분야) 한옥마을을 찾는 연간 관광객은 1,067만 명으로 집계됐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체험 안내 / How to Enjoy the Interactive Virtual Reality Zone
1. 바닥에 그려진 발 모양 위에 선다.
Stand on the footprints marked on the floor.
2. 벽에 걸려 있는 VR 안경을 착용한다.
Put on the VR goggles found on the wall.
3. 몸을 천천히 회전하면서 화면에 있는 동그라미를 찾는다.
As you turn slowly, find a circle on the screen.
4. X자 포인트를 동그라미에 3초간 맞추면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Align the X mark on the circle for 3 seconds, and you will be relocated to the next spot.
5. 다음 사람을 위해 VR 안경을 다시 벽에 걸어둔다.
Be sure to place the VR goggles back on the wall for the next person in line.
※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13세 미만의 어린이는 보호자의 동행 및 지도하에 체험 가능합니다.
For safety reasons, children aged under 13 must be accompanied and supervised by a guardian.
※ 체험 중에는 발 모양 위에서 벗어나지 마시고, 제자리에서 체험해 주세요.
Do not step off the footprints marked on the floor. Please stay in place during your interactive experience.
※ VR 안경 착용 시 주변 상황이 보이지 않으므로 손을 뻗거나 몸을 크게 움직여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You can not see the real world when you wear VR goggles. Please make sure that you do not reach your arms out excessively or make big motions in order to stay safe.
※ CCTV 촬영 중 / Under CCTV surveillance
상설 전시장은 전주 한옥마을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된 모습을 설명해주는 공간이었습니다. 이제 기획 전시실로 가 볼까요!~ gogo!
왼편에 이목대요, 오른편에 오목대라 / Imokdae on the left, Omokdae on the right
전시를 열며
전주한옥마을역사관은 한옥마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이목대와 오목대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왼편에 이목대요, 오른편에 오목대라》 특별전을 선보입니다. 이번 전시명은 19세기 사애(沙崖) 민주현(閔胄顯, 1808~1882) 선생이 만든 가사, 완산가(完山歌)에서 전주의 명승인 이목대와 오목대를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누어 표현한 것을 인용하여 이목대와 오목대의 사이에서 두 곳을 두루 조명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습니다.
이목대(梨木臺)와 오목대(梧木臺)는 전주 이씨 발상지이자 조선 왕조의 모태(母胎)로서 많은 유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목대’는 풍패(豐沛)의 근간이 되는 곳으로,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 때부터 전주 이씨가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며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오목대’는 조선의 역사가 태동하기 시작했던 곳으로, 1380년(고려 우왕 6)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전주의 친지들과 승전 잔치를 벌이며 조선 건국의 포부를 드러낸 곳입니다. 조선 건국주 태조 이성계와 그 직계 선조들의 자취가 이목대와 오목대에 오롯이 남아있으며, 두 곳 모두 고종 황제의 친필 비문이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뛰어납니다.
이목대와 오목대는 전주가 조선 왕조의 뿌리이자,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며, 오래전부터 전주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왔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목대와 오목대에 얽힌 이야기와 조선 왕조의 본향이라고 일컫는 전주, 그리고 한옥마을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부. 목조이안사가 살았던 터 ‘이목대(梨木臺)’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1274)는 전주를 떠나기 전까지 이목대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목대(梨木臺)는 발산(鉢山)에서 뻗은 산줄기 끝의 둔덕을 일컫는 지명 이며, 이름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배나무가 많았던 곳이라 하여 '배꽃 리(梨)' 자를 붙여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이목대가 있는 발산 자락의 마을(현 자만벽화마을)은 목조가 전주를 떠나기 전까지 전주 이씨가 대대손손 살았던 터이다. 그리하여 발산은 조선을 건국한 이씨(李氏)들이 발원한 산이라는 뜻에서 발이산(發李山) 또는 발리산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 목조가 나고 자랐으며, 그 흔적은 옛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주읍지(全州邑誌)』에 따르면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 은 발산(發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이라고 불리는데, 발리산 남쪽 아래에 있는 자만동(滋滿洞: 現 校洞)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하며, 『완산지(完山誌)』 에서는 목조가 “전주에 살던 유년 시절, 수백 년 묵은 고목나무인 장군수(將軍樹) 를 둘러싸고 여러 아이들과 진법(陣法)을 익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목대에는 목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목조의 유허비가 있다. 이 비석은 고종 광무(光武) 4년(1900)에 세워진 것으로서,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즉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고종 황제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설립 이후 황실의 고향 전주를 성역화하기 위해 오목대, 이목대, 완산에 각각 비를 건립하였는데, 그중 이목대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세웠으나 1986년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자만벽화마을로 옮겨졌다. 오늘날 이목대는 오목대와 함께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활자본 | 1413년 | 디지털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태조실록(太祖實錄)》은 태조 원년(1392)부터 7년(1398)까지 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史書)이다. 모두 15권 3책이며,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태조실록》 제1권 첫머리에는 태조의 가계 내력 및 고려말 왕조 개창 이전까지의 약사(略史)와 태조의 활동을 수록한 총서(總序)가 있다. 총서에는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목조가 전주의 토호였으나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지방관들과 갈등을 빚은 일로 삼척으로 이주하였다가, 후에 해로로 동북면 덕원부(德源府: 宜州)로 옮겼는데,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의 민호 170억 호 등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분이 목조(穆祖) 이다.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사방(四方)을 경략할 뜻이 있었다. 처음에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그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산성별감(山城別監)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官妓)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州官)이 안렴사(按廉使)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穆祖)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 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家)나 되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번째 기사 中
완산지(完山誌) 영인본 | 1911년 | 전북대학교 제2도서관 소장
「완산지」는 조선후기에 편찬된 완산(전주)읍지이다. 이 문헌에는 목조 이안사의 유년기를 보 여주는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虎隕石)에 관한 설화가 등장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발산 아래에 장군수라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목조가 어렸을 때 여러 아이들과 함께 이 나무 밑에서 진법을 익혔다고 한다. 호운석에 관해서는 목조와 여러 아이들이 발산의 바위 아래에 서 큰 호랑이를 마주쳤는데, 갑자기 바위 언덕이 무너져내려 아이들은 깔려 죽고, 목조만 살아남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영인본 | 1973년 | 전북대학교 제2도서관 소장
「용비어천가」는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용비어천가 1장에는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 태종(太宗)을 해동육룡으로 비유하고 있으며, 그중 첫 번째 용이 바로 전주 자만동에서 살았던 목조 이안사이다. “해동 육룡(海東六龍)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우리나라의 여섯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서, 하는 일마다 하늘의 복을 받으니...)-「용비어천가」 제1장 中-
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
탁본 | 1900년 | 디지털자료 | 전라북도금석문대계 1권(2007)
이목대에 세워진 비석이다. 전면에는 고종 황제가 ‘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전서로 썼으며, 후면에는 ‘광무4년’이라고 적혀 있다.
완산지(完山誌)
필사본 | 조선후기 | 디지털자료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미지 제공
『완산지』 중 ‘장군수’와 ‘호운석’에 관한 설화 내용
장군수는 발산 아래에 있는 듯하다. 세속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목조가 아이들과 놀이를 하면서, 여러 아이들을 모아 큰 나무 아래에서 진법(陣法) 익히기를 즐겨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나무를 ‘장군수’라 하였다고 한다. 장응두(張應斗) 의 「부사기(府司記)」에 있기를, “동남쪽과 남쪽 방향 사이에 하나의 큰 나무가 있었으니 이름이 ‘장군수’다. 우리 목조가 아이들과 놀이를 하면서, 이 나무 아래에 단정히 앉아 있으면, 여러 아이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앞에 늘어서서 절을 하는 것이, 마치 관청에서 아침에 조회를 하는 모습과 흡사하였다. 그런 까닭에 후대인들이 그 나무의 둘레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며, 또 담장으로 둘러싸고 빈 중앙에 여러 가지 화초를 심고, 베거나 뽑지 못하도록 사람을 시켜 수호케 하여 노인들이 대대로 이어 전한 지 200여 년이 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져 없어지고 옛터만 완연하다.”라고 하였다.
호운석은 한벽당의 앞쪽 1리쯤에 있다. 세속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목조가 어렸을 때, 여러 명의 아이들과 발산의 남쪽 산기슭 아래에서 놀다가, 폭풍우를 만나 바위 아래에 피하였는데, 큰 호랑이가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목조가 여러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호랑이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씹을 수 없고, 단지 한 사람만 해할 뿐이니 옷을 던져 이를 시험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그러자 여러 아이들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이가 제일 위이니 먼저 옷을 던지라.”하였으므로, 즉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호랑이가 목조의 옷을 씹자 여러 아이들이 목 조를 끌어내니, 호랑이는 즉시 도망쳤고, 언덕이 갑자기 무너져서 아이들이 죽었으나 목조는 화를 면했다. 그 돌은 지금도 물 가운데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내용 출처: 전주시 전주문화원 편, 『(완역) 완산지』, 전주: 전주시 전주문화원, 2009, 185~186쪽,
2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꿈꿨던 ‘오목대(梧木臺)’
오목대는 고려 우왕(禑王) 6년(1380) 금강으로 침입한 왜구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오자 당시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였던 이성계가 운봉 황산 에서 이들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둔 후,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선조들이 살았다는 전주에 들러 종친들과 승전 잔치를 열었던 곳이다.
오목대 승전 잔치에서 이성계는 흥에 취해 한나라 고조의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대풍가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숙적 항우를 타도하고 통일국가를 실현시킨 뒤 자신의 고향인 패현에서 부른 노래이다. 위화도 회군 8년 전,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종친들 앞에서 대풍가를 읊었다는 것은 자신이 훗날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겠다는 야심을 비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종 광무(光武) 4년(1900)에는 고종 황제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기리고,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제액(題額)을 쓴 비석을 오목대에 세웠다. 앞면의 제액은 고종이 직접 쓴 글씨이고, 뒷면의 글은 태조가 왜구를 무찌른 승전기(勝戰記)를 고종이 짓고 김영목(金永穆)이 쓴 것이다.
오목대는 과거 이 일대에 오동나무가 많았기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현재 오목대 언덕에 있는 누각은 1988년 전주 시민의 뜻을 모아 세워진 것이며, 누각에는 ‘오목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래서 오목대는 언덕을 부르는 이름 이면서 언덕 위에 지어진 누각을 뜻하기도 한다. 오늘날 오목대는 전주한옥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한옥마을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관광 명소이자 주민들의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목판본 | 1531년 | 전북대학교 제2도서관 소장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集成編)으로 지리적인 면뿐만 아니 정치·경제·역사 ·행정·군사·사회·민속·예술·인물 등 지방 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친 종합적 성격을 지닌 백과전서식 서적이다. 이 책에는 이성계의 종사관 이었던 정몽주가 오목대 잔치에서 마치 고려 왕조를 비웃는 듯한 이성계의 대풍가를 듣고 홀로 말을 타고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고려의 국운을 한탄하며 읊었던 우국시가 실려 있다. [남고산성은 따로 포스팅 합니다.]
千仞岡頭石逕橫(천인강두석경횡)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登臨使我不勝情(등임사아불승정)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
靑山隱約扶餘國(청산은약부여국)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黃葉繽粉百濟城(황엽빈분백제성) “누른 잎이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九月高風愁客子(구월고풍수객자) “구월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짙고”
百年豪氣誤書生(백년호기오서생) “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천애일몰부운합) “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뒤섞이는데”
矯首無由望玉京(교수무유망옥경) “하염없이 고개들어 송도만 바라보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필사본 | 1899년 | 디지털자료 | 한국고전종합DB 제공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기이다. 승정원일기 3110책(고종36년/1899)에는 고종이 직접 오목대와 이목대에 태조와 목조를 기리는 비석을 세울 것을 지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경들을 소견(召見)한 것은 전주(全州)와 삼척(三陟)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이다. 자만동(滋滿洞)과 황기동(活耆洞)에는 모두 목조(穆祖)의 잠저 (潛邸)터가 있고, 오목대(梧木臺)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이 남쪽을 정벌하고 개선할 때 머물렀던 곳이어서(중략) 선조를 찬양하는 도리로 보아 어찌 표지(標識)하는 예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미 덕원(德源) 적전사(赤田社) 용주리(湧珠里)의 전례가 있는 만큼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어찌 그만들 수 있겠는가. 기문(記文)은 친히 지을 것이니, 재신이 서주(書奏) 한 것 외에 공사(公私)의 문헌 가운데에 상고할 만한 것이 있다면 즉시 기록해 들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라." 승정원일기 3110책, 고종 36년(1899) 6월 4일 경진 7/7 기사 中
오목대 누각에 걸린 대풍가(大風歌) 편액_2004년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 선생
大風起兮雲飛揚 “큰 바람이 일고 구름 휘날리니”
威加海內兮歸故鄕 “온 세상에 위풍 떨치며 고향으로 돌아왔도다”
安得猛士兮守四方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겠는가”
-1380년, 태조 이성계가 오목대에서 조선 건국을 꿈꾸며 읊었던 대풍가(大風歌)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帝駐蹕遺址碑)
탁본 | 1900년 | 디지털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한국학자료센터 소장
“오목대는 전주 동쪽 1리 쯤 밖에 있는데 언덕이 좀 솟아있는 곳이다. 옛날에 태조고황제께서 남정하셨다가 크게 개선하시던 날에 이 대에서 여러 일가친척을 부르고 오목대라 이름 붙이 신 이후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무릇 이 대에 오르면 성내의 광경이 모두 보여서 이곳이야말로 전주의 눈동자인가 한다. 대의 동쪽에 발산이란 산이 있고, 산 아래 자만동이란 곳이 있는 데, 『읍지』에서는 목조대왕의 집이 이 근처였다고 한다. 또한 이 고을 주민들도 장군수(將軍樹), 또는 호운석(虎隕石)으로 일러서 옛 자취를 전하고 있다. 전주는 우리 왕실의 본향이다.”
-1900년 고종황제가 오목대에 세운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의 음기 내용
3부. 이목대와 오목대를 잇는 다리, ‘오목교’
1931년경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기 이전까지 이목대와 오목대는 하나의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진행된 근대 도시개발로 인해 승암산(중바위산)에서 뻗어 나온 발산의 혈맥을 뚫고,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이목대와 오목대를 잇는 산줄기가 단절되고 말았다.
당시 전라선 철도는 이리역에서 삼례, 덕진을 거쳐 현재 전주시청 자리에 있던 전주역을 지나 오목대-이목대-한벽굴을 통과한 뒤 중바위 서쪽 아래를 타고 남원을 향했다. 그런데 남원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기차가 오목대와 이목대를 지날 때면 속도가 느려져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전주 유림들이 혈맥을 다시 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아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는 구름다리인 오목교를 놓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오목대와 이목대를 지나는 기차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고 전해진다.
현재 오목교는 1980년경 전라선 철길이 아중리로 이전되면서 기린로 확장 공사와 더불어 1987년 12월에 다시 설치된 것이다. 오목교는 2017년에 한옥마을과 국립무형유산원 사이에 개통된 또 다른 오목교와 이름을 구분하기 위하여 ‘오목육교’로 개칭되어 불리고 있으며, 현재 한옥마을에서 자만마을로 관광객들을 연결하는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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