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5일 완산칠봉 꽃동산에 겹벚꽃과 철쭉을 보고 왔었습니다. 사진은 아직 올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꽃은 아니고 동학농민혁명 녹두관입니다.
동학의 사회개혁 사상
동학사상은 수운 최제우에 의하여 제시된 민중종교사상이다. 19세기 후반 한국사회는 안으로 봉건적인 왕조체제의 모순으로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줄 체제변혁의 요구가 커졌으며, 밖으로는 서양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켜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때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 평등사상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사상’을 바탕으로 지배세력으로부터 부당한 수탈을 당하고 있었던 농민들에게 사회 변혁의 희망을 주었다.
변혁을 지향하는 동학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전주역사박물관]
전주 동학농민혁명 녹두관
녹두관은 동학농민군의 희생을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전주 동학농민혁명 주요 전적지인 완산칠봉에 조성되었다. 환국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125년 만에 영면한 추모공간이며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전시한 곳으로 2019년 6월 1일 개관하였다.
들꽃들아 그 날이 오면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 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
폐정개혁안 十二개 조항_오지영 [동학사]
一. 도인(道人)과 정부 사이에 오래 끌어온 혐오의 감정을 씻어버리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二.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해 내어 일일이 엄정할 것
三. 횡포한 부호들을 엄정할 것
四. 불량한 유림과 양반은 징습할 것
五. 노비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六.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은 벗겨 버릴것
七. 청춘과부는 재가를 허락할 것
八. 무명잡세는 모두 가둬 들이지 말 것
九. 관리의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十· 왜적과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十一.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돌릴 것
十二. 토지는 평균하게 나누어 경작케 할 것
•동학의 창도와 탄압
1860.04.05. - 최제우, 동학 창도
1864.03.10. - 최제우, 좌도난정 죄목으로 대구에서 사형당함
1864.~1892. - 동학의 탄압에 맞서 교단을 재정비하고 교세를 확장
•교조신원 동기
1892.10. - 공주집회(10월), 삼례집회(11월)
1893.02. - 광화문복합상소, 보국안민·척양척왜 전국에서 농민봉기 빈발
1893.03. - 보은집회, 금구 원평집회. 척왜양창의운동
•사발통문 거사계획
1893.11. - 고부농민, 군수 조병갑에게 수세감면을 호소. 사발통문* 거사계획 결의
1893.11.30. - 고부군수 조병갑, 익산군수 발령
1894.01.08. - 고부 농민과 동학교도, 예동마을 걸굿을 시작으로 말목장터에 집결
1894.01.10. - 전봉준과 고부 동학 농민군 1천여 명이 고부관아 점령 동학농민혁명 시작
1894.02.20. - 전봉준, 전라도 각지에 보국안민을 위한 창의격문 발송
1894.03.11. - 동학농민군 3,000여명, 금구에서 태인을 거쳐 부안으로 이동
1894.03.20. - 무장기포(무장포고문) 1894.03.26~29 백산대회(호남창의대장소) 혁명군조직
1894.04.07.(양05.11) -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 격파 후 정읍 관아 점령. 최초 전투·승리
1894.04.08.~16. - 전라도 서남해안 점령(흥덕·무장·영광·함평)
1894.04.23. -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과 접전 장태를 이용해 승리
*사발통문(沙鉢通文)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혁명을 결의한 문서이다. 1893년 11월 전봉준, 송두호, 송대화, 송국섭, 최경선, 김도삼, 손여옥 등 20명은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성을 거쳐 서울로 바로 쳐들어가자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누가 주모자인지 모르게 사발을 엎어 놓고 돌아가며 서명을 하고 믿을 수 있는 동지들에게 그 사실을 통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발통문이라 불린다.
1968년 12월 4일 주산마을(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옛날에는 대뫼마을) 송후섭(사발통문 서명자 중 한 사람인 송대화의 아들)의 집에서 발견된 뒤 그 뜻을 기리고자 다음 해 12월 1일 주산마을 입구에 '동학 혁명모의탑'을 세워 사발통문을 그 탑 아래 묻었다. 그 뒤 사발통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자 1970년 3월 4일에 탑을 해체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사발통문은 혁명 전 그때 민중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혁명이 어떻게 준비되었으며 혁명의 구체적 계획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단히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마지막 부분이 잘려나가 그 뒤의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전주성 점령
1894.04.27.(양5.31) -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성을 점령
1894.05.01.~03. - 전주성에서 경군과 2차·3차 접전
1894.05.04. - 청국군 아산만 상륙. 동학농민군, 정부 측에 폐정개혁안을 제시
1894.05.06. - 일본군 인천항 상륙. 동학 농민군과 관군이 휴전 및 신변보장 합의
1894.05.07. - 관민상화(官民相和), 폐정개혁안 합의 전주화약 체결
1894.05.09.~28. - 동학 농민군, 신변보장·폐정개혁·집강소 실행을 위한 호남일대 순회
1894.06.07. - 전라감사 김학진, 무장해제와 귀가안업의 관측 집강안을 제시. 거절됨
1894.06.21. - 일본군 경복궁 침입
1894.06.27. - 청국군과 일본군 성환에서 교전
1894.07.01. - 일본군 청·일전쟁 선전 포고
•집강소 설치
1894.07.06. - 전봉준과 김학진이 전주회담을 개최. 전라도 군현에 집강소 설치
1894.07.08. - 전봉준, 김학진과 회담 후 집강에게 청탁금지·치안유지, 무기·공물 반납 등 통문을 발행
1894.07.26. - 조일공수동맹조약 체결 (日)
1894.04.06.말~08.말 - 전라·경상·충청도 각지 봉기
1894.08.17. - 일본군의 평양전투 승리 청(2만여 명) 일(1만여 명)
1894.09.07. - 김개남, 대원군의 밀지를 접수
•2차 봉기 이후
1894.09.08. - 금구 원평에서 2차 기포를 결정하고 삼례 집결 통문을 발함
1894.09.초~11.초 - 경기·강원·충청·경상·황해도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이 경군·일본 연합군과 전투
1894.10.09.~15. - 일본군 진압대대 인천항 상륙 충청·전라·경상도로 진격
1894.10.12.~16. - 전봉준·손병희 휘하의 동학 농민군 논산 합류
1894.10.21. - 농민군, 산에서 공주로 진격
1894.11.08. - 우금티(치)에서 동학 농민군과 관군·일본군 집결
•우금티(치) 전투 패배
1894.11.09. - 우금티(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의 패퇴
1894.11.14.~19. - 동학 농민군, 노성·논산서 일본군과 접전 후 강경을 지나 전주로 패퇴
1894.11.20. - 동학농민군, 영광관아 점령. 나주성 포위
1894.11.23. - 관군·일본 연합군, 전주성 장악
1894.11.25.~27. - 원평, 태인전투 패배. 전봉준 휘하의 동학 농민군 해산
1894.12.01. - 손화중·최경선 휘하의 동학농민군 해산
1894.12.02. - 전봉준, 순창 피노리에서 피체됨
1894.12.18. - 전봉준, 한양에 도착
1895.02.29.~03.10. - 전봉준(41세), 5회에 걸쳐 심문받음
1895.03.30. - 전봉준·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환 등 교수형 당함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봉환과정
•발견경위 봉환결과
1995.07.25. - [한국 동학당 수괴 수급-수습자 사토 마사지로] 유골이 발견됨 *일본 북해도 대학
1995.08.03. - 유해봉환추진위원회가 구성됨
1995.09. - 일본 북해도대학 측에 봉환 요청 공문을 발송
1996.05.30. - 지도자 유골 국내 봉환
1996.05.31. - 지도자 유골 진혼제 거행.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102주년 기념제
•신원확인 연구조사
1996.10.26. - 유해조사위원회 구성 및 활동
1996.12.30. - 유골의 필적, DNA, 토양감정 등 검사를 실시
1997.05.08. - 유물 연구조사 결과발표. *유골의 신원규명 실패
2002.10.11 지도자 유골, 모형 및 흉상을 복원
•안장사업 추진결과
2001.09. - 제1차 전남 진도군에 안장 추진, 무산
2003.10. ~ 2004. - 제1차 황토현전적지에 안장 추진, 무산
2005.~2006. - 제2차 전남 진도군에 안장 추진, 무산
2009.-2010. - 제1차 전주 완산전투지에 안장 추진, 무산
2013.03.~10. - 전북 김제시 원평, 구미란전적지에 안장 추진, 무산
2014.12.10. - 제2차 황토현전적지에 안장 추진, 무산
2015.01.13. - 제2차 전주 완산전투지에 안장 추진 결정
동학농민군 지도자상 東學農民軍 指導者像
이 흉상은 일본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지난 1995년 7월 26일, 일본 홋카이도대학 표본 창고에서 신문지에 싸인 채로 발견된 유골에는 ‘한국동학당 수괴(韓國東學黨 首魁) 라는 글씨가 쓰여 있고, 1906년 9월 20일 진도에서 수습되었음을 기록한 쪽지가 함께 발견되었다. 조사결과 유골의 주인공은 전라남도 진도 출신의 박 씨 집안 후손으로 추정되고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여겨진다.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전라북도의 지원과 관련단체의 협력으로 1996년 5월 이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였다. 유골을 영구안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사를 실시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고인의 고귀한 넋을 기림과 아울러 동학농민군지도자의 유골을 탈취해 간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행위에 책임을 묻고자 이 흉상을 제작하였다. [전주역사박물관]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는 2019년 6월 1일 전주 완산칠봉 녹두관에 안장함으로 무명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넋을 기렸다고 합니다.
무명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
이곳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활동하다 전남 진도(珍島)에서 처형된 농민군 지도자 한 분의 머리뼈가 모셔져 있다. 이 분의 유골은 한 일본인에 의해 1906년 9월 진도에서 유출된 후 1995년 7월 일본 북해도대학 표본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관련단체와 함께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유골봉환추진위원회(상임대표 한승헌)를 구성하여 1996년 5월 30일 유골을 국내로 모셔왔다. 이후 유골의 반출 경위와 신원 확인을 위한 조사활동을 벌여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이라는 사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유골을 빼돌려 비인도적인 인종학(人種學)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동안 유골의 안장을 미루면서까지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밝히지 못한 채 동학농민혁명 125주년을 맞아 임께서 영면(永眠)하시도록 삼가 이곳에 받들어 모신다. 2019년 6월 1일 무명동학농민군지도자 유골안장위원회
그럼 이제 끝난 것입니까?
아니다. 재는 또 있다.
그럼 그건 어쩝니까요?
그냥 두어도 좋다.
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넘을 것이다.
우린 우리의 재를 넘었을 뿐.
길이 멀다. 가자꾸나.
-이광재 '나라 없는 나라' 중에서 -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 평등사상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사상’은 당시 농민들에게 사회 변혁의 희망이었고, 평등한 세상에 살고 싶어하는 소망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에 봉건체제 개혁과 일제의 침략에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은 농민이 중심이된 혁명이었다.
그날의 깃발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 휘날린다. 현재 우리나라는 외세로부터 국권을 잘 지키고 있나?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동학의 정신이 생각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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