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 지명의 유래
전주(全州)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完山)이라 하였는데 마한 국명으로는 원지국(圓池國)에 이른다. 전주라는 지명 사용은 서기 757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경덕왕(景德王) 16년부터이다.
전주 완산의 비명 원의를 볼 때 "완(完)"과 "전(全)" 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우리말 뜻을 지닌 글자이다. 따라서 "완"은 그 음도 "온"의 근사음으로써"완"이란 글자는 "온"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 전주를 온고을이라 한다.)
▣ 전주 지명의 의미
이에 보면 "전주", "완산"의 옛 지명은 "온·다라 "였음을 알 수 있다. "온" 이란 뜻은
첫째, 온전하고 흠이 없다. 둘째, 뚜렷하고 갖추어져 있다. 셋째, 순수하고 티가 없다. 넷째, 모든 것이 어우르다. 등의 뜻이 담겨있다. 특히 온이란 말은 완, 전자 이외에도 원(圓), 온(溫), 백(百 - 옛말 온)등의 한자 소리나 새김을 빌렸다. 삼국사기 백제기 온조왕(溫祚王) 조를 보면 백제가 마한 땅을 어우르자 줄기차게 항거했던 원산성(圓山城)도 바로 이곳이며 온조왕의 온 자도 실은 온 임금이란 뜻이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百濟)의 백(百) 자도 온을 빌어 쓴 글자로서 백제는 온 다라를 적은 것으로 실은 "완산"이나 "전주"와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온 겨레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이다. 결국 "온 다라"는 온 겨레가 온 뜻을 어울려 온 힘을 합하여 거친 바다의 풍파를 헤쳐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그리고 뚜렷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나라를 세우자는 이상이 담겨 있다. [글 출처: 전주시청 홈페이지]
광여도(廣輿圖)_전주부 지도: 발행 연도: 18세기 / 1737년-1776년
유년시절 나는 가련산 자락 하가리(아랫가르내 또는 아랫가테) 또는 학동리(당시 동네 들판에 학이 많이 보였고, 가련산의 어귀 나무에 쉬다 가는 곳이 있었다.) 라 하는 마을에서 태어나 이곳의 지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전주의 지명(地名)에 대해 공부하고 포스팅을 하고 있어 감회가 새롭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7첩 06면에는 전주(全州) 좌측으로 가련산(可連山)이 보인다.
아래 광여도[그림출처 : 국토정보플랫폼>지리지 및 지명유래집]에서 가련산(可連山), 추천교(楸川橋)의 글씨가 보인다.
可옳을 가 / 連잇닿을 련 / 山 뫼 산
『여지도서』 (전주)에 “관아의 서쪽 10리에 있다. 건지산(乾止山)의 산세가 여기에 와서 끊어졌는데, 민간에 전하기를 이어져야 할 만한 곳에서 끊어졌다는 뜻에서 ‘가련산(可連山)’ 이라 이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에 조촌면 일대에 가련산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글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지리지 및 지명유래집]
과거의 가련산에서 현재의 가련산(可連山)공원을 알아보자!
(좌측 사진) 덕진공원에서 건물 뒤로 가련산과 충혼탑이 보인다. (우측 사진)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길 플라타너스 나무가 반겨준다.
순국학도현충비
이 탑은 6.25 한국전쟁에 학도병으로 자진 출전하여 나라를 구하고 순국하신 이 고장 출신 509위의 명복을 빌고,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인데도 1962, 6. 6 전도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탑이다.
1950. 6. 25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평화롭던 우리 강산은 포화와 피로 물들고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우리 학생들은 15~18세의 어린나이에 나라를 구하겠다는 충정심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총탄이 빗발치는 죽음의 전선에 달려가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조국을 수호하였다.
전라북도 지역 학도병은 북한군이 대전을 넘어서자 1950. 7. 13 전주역에서 학생복을 입은채 남행열차편으로 출정하였다. 이날을 기하여 잊혀져가는 6.25를 상기하고 영령들의 호국정신을 추모하고저 매년 유관기관의 협조하에 추념제를 거행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서 충혼탑으로 가는 길은 인적이 끊겼는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풀이 무성하여 도저히 갈 수 없어 계단 정면 길에서 좌측으로 꺾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충혼탑 주변부의 모습으로 운동시설이 있고, 아카시아나무 사이로 전주 도심이 보인다.
1980년대 가련산은 아카시아나무, 상수리나무가 많았고, 학동리(하가리) 쪽으로는 한지의 도시답게 닥나무도 많았었다.
닥나무는 껍질을 벗기기가 쉬워 손잡이 부분만 남겨 놓고 나무 칼을 만들어 아이들과 칼싸움을 하고 놀았었다. 겨울이면 닥나무 껍질을 엮어 팽이치기 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산이라 하기엔 낮은 구릉지대가 많아 눈이오면 비료포대, 쌀포대에 낙엽을 넣어 언덕 위에서 눈썰매를 타고 놀았다. 가을이면 덕진중학교 근처 구릉은 억새밭으로 장관을 이루었고, 청명한 하늘에 연(鳶)을 날리기도 하였다. 봄에는 달래와 삐비가 많아 반찬과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가련산(可連山)... 개인적 의견으로 산이라 하기에는 너무 낮아 구릉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동음이의어로 가련하다의 '가련(可憐)'이 가엾고 불쌍하다는 의미인데 왠지... 가련산의 산세가 약하고, 딱하고, 안쓰러워 가련산(可憐山)이 된 것도 같다! 또한 가련산의 주변부는 도시화(개발)로 인해 산이 평탄화가 되고 있고, 하가지구의 개발과 더불어 가련산로가 생겨 산의 일부가 갈리게 되었다. 현재에도 LH와 전주시의 가련산 개발 사업으로 법적 소송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조상들은 총탄이 빗발치는 죽음의 전선에서 불쌍하게 죽어간 학도병의 충혼탑이 산의 정상에 세워질 거라 예견을 했던 걸까? 가련산의 순국학도현충비가 더욱 가련하게, 푸른 하늘에 외롭게 솟아 보인다.
지금까지 유소년시절 가련산(可連山)에서 칼싸움과 연날리기, 삐비를 먹었던 좋은 기억을 간직한 전주 럭셔리크로우 였습니다. 이 포스팅을 잘 보셨다면 공감&댓글&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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