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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완주 추줄산(崷崪山) 위봉사(威鳳寺)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2.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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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6일 다녀왔던 완주 추출산 비구니 사찰로 유명한 위봉사를 오늘 올리게 되었다. 여타 사찰이 비슷비슷하나 위봉사의 느낌은 다른 사찰보다 좀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 된 느낌을 받았다.

주차장에서 본 추줄산 위봉사 일주문(一柱門)

 

위봉사 앞 주차장의 모습(주차 걱정필요 없음!~)

 

위봉사 안내판

 

위봉사(威鳳寺) | Uibongsa Temple

 위봉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추출산 아래 위봉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위봉산성의 형상은 산세가 높이 솟아 굽이굽이 꿈틀거리고 험준한 것이 용이 또아리를 틀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세를 갖추어 위봉(威鳳)이라 하였다. 위봉사중수기에 고려말 최용각(崔龍角)이 말을 타고 산천을 누비다 고산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보니 세 마리의 봉황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어서 가람을 조성하고 위봉사(圍鳳寺)라 하였다.

 

 고려말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사 옆을 지나다 나무오리 3마리를 날려 보내 그중 1마리가 내려앉은 곳에 위봉사를 창건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1360년 고려 공민왕 스승인 보제조자 나옹화상중창하였고, 1456년(세조 12)경 선석대사·석잠대사(善釋大師·釋岑大師)가 중수를 논의한 끝에 여러 해 돈을 모아 60여년만에 극락전(極樂殿)을 중수하였다. 고려시대 위봉사(圍鳳寺) 조선시대 위봉사(威鳳寺)로 바뀌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하자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어진과 위패를 위봉산성의 행궁으로 이안하기로 하였으나 행궁이 퇴폐(頹廢)하여 둘 수 없어서 부득이 위봉사의 대웅전에 임시로 모셨다. 그 후 위봉사는 전주 경기전의 속사(屬寺)로 삼았으며 위봉산성 밖에 산내 암자인 태조암이 있다.

 

 위봉사의 보광명전은 1835년(헌종1)에 대웅전을 개축하면서 편액을 걸었으며, 1977년 보물 608호로 지정받아 조선시대 목조불전건축으로 문화재로 평가받았다. 보광명전의 후불벽리면벽화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입상(白衣觀音菩薩立像)은 문화재 가치가 높은 벽화로 평가하고 있다. 위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김제시 금산사의 말사로 소속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도내 주요 유적지로 완주군에는 이곳 위봉산성, 태조암, 전주시에는 경기전, 오목대, 조경단, 만경대암각서, 남원시에는 황산대첩비지, 피바위, 여원치마애불, 정산봉, 진안군에는 은수사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설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대표적인 곳으로 완주군에 태조암, 남원시에는 고남산 제단, 장수군에는 뜬봉샘, 임실군에는 상이암, 순창군에는 만일사 등 열여섯 곳을 들 수 있다.

 

추줄산(崷崪山) 위봉사(威鳳寺)의 일주문(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나한전을 중건한 1991년에 세웠다. 일주문 좌측 비석에 글 귀가 좋아 보입니다!

일주문 좌측 비석

 

對上以敬(대상이경)

윗사람을 대함에 공경으로써

對下以慈(대하이자)

아랫사람을 대함에 자비로써

對人以和(대인이화)

사람을 대함에 온화함으로써

對事以真(대사이진)

일을 대함에 진실로써

 

일주문과 사천왕문 사이 정원

 

四天王門(사천왕문)

 

사천왕문을 오르는 계단 우측으로 작은 연지가 있다.

 

사천왕문

 

사천왕문(四天王門)을 들어갔을 때에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있고,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있다.

좌측 : 북방 다문천왕 / 우측: 동방 지국천왕

 

사천왕은 지혜의 보검을 든 지국천왕이 동방 세계를, 불탑과 정법의 깃발을 든 광목천왕이 서방세계를, 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이 남방세계를, 비파를 든 다문천왕이 북방세계를 관장하면서 그곳 중생들의 선악 업보를 면밀하게 살펴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을 정해준다.

좌측: 남방 증장천왕 / 우측: 서방 광목천왕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 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다음 계단을 오르기 전에 웅장한 건물이 바로 앞에 있다. 여기가 지장전(地藏殿)을 겸하고 있는 봉서루(鳳棲樓)이다. 봉서루는 전면 5칸에 2층 구조 같으나, 현대의 건축물로 비교하면 필로티 구조와 닮았다. 실제로 올라가면 단층 건물로 보인다.  완주 화암사의 우화루(보물 제662호)와 비슷하다. 틀린 점은 위봉사 봉서루는 1층 부위 중간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화암사 우화루의 경우 1층 부위는 막혀 있고 건물 측면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봉서루(鳳棲樓)

 

이곳 봉서루에는 3가지 특별한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주춧돌에 위봉사(圍鳳寺)라고 새기고 기둥으로 봉(鳳) 자를 눌러 놓았다고 한다.

위봉사 ( 圍鳳寺 )라고 새기고 기둥으로 봉(鳳) 자를 눌렀다.

 

이는 위봉산이 봉황새가 날아오르는 모양새이므로 봉황이 떠나지 못하도록 기둥으로 봉황을 눌러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위봉사는 "봉황을 품고 있는 사찰"로 통한다.

 

두 번째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마음이 편해지는 글, 위로가 되는 글이 있다.

 

비 바람 불어 흑탕물을 뒤집었다고

꽃이 아니더냐

다음에 내릴 비가 씻어준다

실수들은 누구나 하는거다.

 

아기가 걸어다니기까지 3000번은 

넘어지고야 겨우 걷는 법을 배운다.

나는 3000번을 이미 넘어졌다가

일어난 사람인데 별것도 아닌 일에 좌절하나...

여운이 남는 글 귀들...

 

세 번째는 봉서루 통로 벽면에는 "관세음보살 42수주 진언(眞言)의 유래와 손 모양" 이 설명된 유리판이 있다. 

정말 궁금했던 부분이라 큰 공부가 되었다!~ 빛 반사로 인해 사진을 찍기 힘들다.

관세음보살 42수주의 유래

 

봉서루 중앙 계단 우측에는 걸음은 조용조용 / 좌측에는 말씀은 가만가만이라 쓰여있다. 

봉서루(지장전) 중앙 계단

 

지장전(地藏殿 )의 중앙 계단

 

봉서루(鳳棲樓)의 안쪽에는 지장전(地藏殿)이라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봉서루 중앙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사람이 보인다. 정면으로는 지장전(地藏殿)이 보인다.

 

오르는 계단에서는 봉서루(鳳棲樓)... 내려가는 계단에서는 지장전(地藏殿)의 편액이 걸려 있다.

지장전(地藏殿)

 

관세음보살 42수주의 유래를 보고 중앙에 계단을 오르면 위봉사의 보광명전(普光明殿)이 정면에 보인다.

봉서루 중앙 계단에서 올라와 보이는 위봉사의 모습을 좌측-중앙-우측 순으로 사진을 올려본다.

좌측-관음전(觀音殿) 겸 위봉사 요사(威鳳寺 寮舍)

 

중앙-보광명전(普光明殿)

 

우측-극락전(極樂殿)

 

봉서루 중앙 계단에서 찍은 파노라마사진

 

파노라마 사진의 우측(보는 방향 기준) 마지막 건물이 종각(鐘閣)이다. 건립 시기는 2000년이다.

법구사물(法具四物)이 있는 종각(鐘閣)은 낮은 담을 둘러쌓아 놓았다.

 

담을 넘어 사진을 찍은 모습에는 종각이 단층이라 입구의 모습이 특이했고, 단청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큰 법고가 좌측에 위치하고 중앙에 범종이, 우측에는 목어와 운판이 있다.

 

목어(木魚)

 

운판(雲板)

 

법고(法鼓)

 

범종(梵鐘)

 

종각사물 안내도

 

법구사물(法具四物) 범종, 법고, 목어, 운판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지난 포스팅 송광사(松廣寺) 2편을 보고 오세요.

 

완주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 2편

송광사는 완주 9경 중 제5경으로 송광사와 벚꽃길을 꼽는다. 봄이면 소양면 소재지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약 2km의 구간이 도로 양쪽에 약 40년생 벚꽃나무들로 분홍빛 벚꽃 터널을 이뤄 아름다운

jeonjucastelblog.tistory.com

 

봉서루_지장전(地藏殿)과 보광명전(普光明殿) 사이에 있는 소나무와 3층석탑을 보겠습니다.

위봉사 중앙에 위치한 소나무와 3층석탑

 

위봉사 3층석탑

보광명전(普光明殿) 앞에 있는 석탑으로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 석탑으로 보인다. 탑의 일부(옥개석 등)가 손상되어 있다.

3층석탑

 

3층석탑과 보광명전

 

세월의 흔적에 따른 돌이끼와 탑의 손상 부분이 보인다.

 

아래 우측 사진에서 3층석탑 좌측으로 관음전(觀音殿)이 보인다.

 

코끼리 상

 

이제 위봉사(威鳳寺)의  중심 법당인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살펴보자.

보광명전 (普光明殿)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完州 威風寺 普光明殿) / 보물 제608호

Bogwangmyeongjeon Hall of Wibongsa Temple, Wanju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은 위봉사의 중심 전각이다. 이 건물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어 17세기 초에 다시 지었고, 조선 후기에도 여러 차례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현판헌종 4년 1838에 보수할 당시 제작한 것이며, 현재 모습의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다시 지은 것이다. 보광명전의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중요 부분마다 굵은 목재를 써서 조각했으며 화사한 단청과 벽화로 치장하여 중후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현종 14년 1673에 조성된 내부 단청은 도료 배합 등 이 분야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도광18년 (헌종 4년 1838)에 제작된 현판

 

보광명전(普光明殿) 불단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문수보살보현보살상이 모셔져 있으며, 용과 여의주 등으로 장식한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불단의 뒷벽과 좌우 벽체에는 흰 옷을 입은 관음보살을 그린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1점과 부처님께 음악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 같은 모습을 그린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 6점이 있는데, 힘이 넘치게 선을 그은 것과 인물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에서 조선 후기 벽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 닫집 :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

**도광18년 : 현판의 좌측 세로로 쓰인 글에 (道光十八年 = 헌종 4년 1838년)이라 써있다.

보광명전(普光明殿) 불단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보물 제608호 안내
 
 
보광명전 앞 화단

 

 

진 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위봉사] 기와에 글과 그림이 아름답다.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오르는 계단 위에 원숭이 3마리의 모습 눈 가리고, 귀 막고, 입 막은 모습을 하고 있다.  오늘날 사찰에서 종종 보게 되는 원숭이 또는 동자승의 조형물이지만 나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깊은 뜻이 있다.

원숭이 3마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원숭이 3마리 아래 계단 양 옆으로 두 마리 코끼리도 있다.

 

보광명전(普光明殿)의 단청과 공포의 모습

보광명전 (普光明殿)의 지붕

 

보광명전의 좌측 단청

 

보광명전의 우측 단청

 

보광명전(普光明殿)의 단청과 공포

 

보광명전(普光明殿)과 극락전(極樂殿) 사이에는 나한전(羅漢殿)이 위치한다. 나한전은 1991년 중건하였다.

위봉사의 나한전에는 석가모니 삼존불 16나한상(十六羅漢像_17~18세기 조성 추정)이 봉안되어 있다.

소나무 배경 바로 뒤가 나한전(羅漢殿)이다.

 

나한전(羅漢殿) 정면 3칸

 

추줄산 위봉사(崷崒山 威鳳寺)

위봉사 : 전통사찰 제8호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소장문화재 : 보광명전 : 보물 제608호608호 / 관음전(요사) : 지방 유형문화재 제69호69호

나한전(羅漢殿) 측면 2칸

 

위봉사는 서기 604년(백제 무왕 5년)에5년) 서암대사께서 최초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고려말 최용각公이 봉황새의 자취를 보고 찾아왔다가 사찰을 중창하게 되며 위봉사라 하였다 합니다. 고려 말에는 나옹스님께서 중건하시고, 조선 중기 선석, 석잠 두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조선 말기 포련대사에 의한 60여칸의 중수(극락전 중건기)를 거쳐 1912년에는 전국 31 본산 중 하나로 오십여 말사를 관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6.25 동란을 거치면서 급속히 퇴락하여 스님들이 수행은커녕 기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하여 급기야 폐사 위기까지 갔으나 다행히 1988년 법중스님이 주지로 부임, 오늘까지 수많은 불사를 거쳐 현재는 1010여 동의 건물에 50~60명의 대중이 상주하는 대가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1990년 개원한 위봉선원은 동·하안거는 물론 봄·가을산철 결제까지 연중 쉬지 않고 정진할 수 있는 선원으로 제방의 비구니 스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창건이래 수많은 도인들이 거쳐 가시고 걸출한 선승과 명강사 등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 위봉사는 오늘날 전북을 대표하는 비구니 선원이자 포교의 전당으로 그 역사의 장을 새롭게 열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산내암자인 태조암위봉 산성, 위봉폭포(전주팔경)가 있어 역사적 문화 유적지로도 매우 의미 있는 곳입니다.

나한전(羅漢殿) 후면의 단청과 벽화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정면으로 봤을 좌측에는 위봉사 요사(威鳳寺 寮舍)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보광명전(普光明殿) 좌측에 위치한 관음전(觀音殿)

 

위봉사 요사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威鳳寺 寮舍, The Yosa(temple dormitory) in Wibong Temple

 스님들의 거처인 이 건물은 중심 법당인 보광명전의 오른쪽*에 있다. 요사라고 하지만 앞면 중앙은 대청마루를 둔 법당으로 관음전' 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좌우에 스님들의 실제 거처인 요사체를 두어 건물 평면이 工자형을 이룬다.

 

 조선 고종** 5년(1868)에 절 확장을 위한 큰 공사가 있었는데, 건물의 짜임새로 보아 이 요사도 그때 지은 듯하다. 조선 시대의 주택 구조를 취하면서도 일부는 법당 형식으로 장식하였다. 관음전과 승방, 부엌 등은 지붕의 높낮이가 서로 다른데 그 기능에 따라 차이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정면으로 봤을 때 왼쪽에 위치

위봉사 요사

 

2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관음전(觀音殿) / 위봉사(威鳳寺)

 

위봉사 요사 해설

 

관음전(觀音殿)의 우측 위봉사(威鳳寺)편액은 구한말 서화가이며 국내 최초 사진가였던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 또는 1864~1933) 선생님의 글씨와 그림입니다.

 

해강(海岡김규진(金圭鎭,1868 또는 1864~1933) 선생님의 편액은 우리나라 유명 사찰에 많이 남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봉사(威鳳寺)편액과 유사한 난(蘭)과 죽(竹)을 양옆에 그리고 중앙에 글을 쓴 편액은 합천 해인사, 장성 백양사,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 등에 남아 있다.

 

위봉사 요사(威鳳寺 寮舍)의 역사에 대해 공부해보니...고종황제와 연결 고리가 있는 듯했다. 요사의 큰 공사가 고종 5년(1868)에 있었고 위봉사 편액 역시 고종황제 당시 시종관을 지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선생님 작품이니 말이다.

해강 (海岡)김규진 (金圭鎭)의 위봉사 편액

 

오늘날 요사체는 무엇인가? 스님들의 실제 거처가 아니겠는가! 김규진 선생님께서는 사군자(四君子) ()이 뜻하는 군자의 고결함 ()이 뜻하는 군자의 높은 품격강인한 기상이 스님들의 생활에서도 필요했을 거라 생각해본다.

스님들의 생활공간

 

요사(寮舍) 안의 풍경

 

극락전(極樂殿)은 1994년에 건립되었으며 아미타여래상을 봉안한 口형태의 건물로 측면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보광명전을 정면으로 봤을때 우측으로 나한전-극락전

 

종각 측면에서 본 극락전

 

극락전( 極樂殿 )의 정면부에는 위봉사 편액이 있다.

 

일주문(一柱門)의 화려한 단청

 

봉황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위봉사(威鳳寺)를 보고 돌아가는 길 일주문(一柱門) 단청에 학을 보며... 많은 시간을 지나온 사찰의 역사를 되새겨 본다!~

[그림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위 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찍은 것으로 위봉사 전경(좌측)과 보광명전(우측)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일주문(一柱門)의 학

 

 

 

지금까지 완주 추줄산(崷崪山) 위봉사(威鳳寺)에서...

'전주 럭셔리크로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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