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 가족과 함게 완주군 불명산 화암사를 다녀왔습니다. 불명산 자락 주차장에 도착하니 겹벚꽃이 반갑게 맞아줍니다.
주차장 한켠에 화암사로 가는 길과 화암사 및 화암사에 얽힌 설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의 이정표인 만큼 놓칠 이유가 없습니다.
화암사(花巖寺)
불명산의 청량한 숲길을 따라 산 중턱에 위치한 화암사는 자연이 준 예술적 운치가 돋보이는 바위와 나무 그리고 단청을 거부한채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국내 유일의 하앙식 구조인 극락전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천년사찰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절벽과 절벽사이의 계곡에 놓여진 계단이 열한번 굽어지면서 암반 위로 흐르는 맑은 물을 발아래 두고 1백 47계단을 오르면 화암사의 정문 격인 우화루(보물 662호)를 대하게 된다.
화암사는 우화루와 극락전(국보 제316호)이 남북으로, 불명당과 적묵당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입구(口)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극락전 왼쪽에는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철영제가 있고 적묵당 뒤편에는 산신각, 우화루 옆에 명부전 이 자리 잡고 있다.
이밖에도 지방문화재인 동종(지방유형문화재 40호)과 중창비(지방유형문화재 94호)가 있으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기록이 뚜렷한 곳으로 자연 적인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 건축양식은 선인들의 슬기를 새삼 느끼게 하고 다시찾아 마음을 다스리는 휴양 장소로 알맞은 곳이다.
화암사에 얽힌 설화
옛날 임금님의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세상 다 좋다는 약도 공주의 병에는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심이 깊은 임금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이미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했노라"고 말하며, 왕의 앞에 조그마한 꽃잎 하나를 던져 주고는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임금님은 그 길로 부처님이 일러준 꽃을 찾기 위해 사방에 수소문했고 마침내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 꽃은 불명산 깊은 산봉우리 바위에 핀 복수초였다.
연못이 아닌 바위에 핀 꽃이라 임금님은 은혜의 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신하들에게 조심스럽게 꽃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신하들이 "누가 이 연꽃을 키우고 있는가를 알아보자."며 지켜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산 밑에 있는 연못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꽃에 물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목격한 다른 신하는 모두 도망가고 용감한 신하 한명만이 꽃을 꺾어 궁에 돌아왔다. 꽃을 먹게 된 공주는 병이 깨끗이 나았고, 임금님은 부처님의 은덕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게 했다.
그 후로 임금님과 많은 신하들이 이곳에 와 불공을 드리는 한편 이 절 이름을 화암사라 지었다 한다.
복수초_사진출처_국립생물자원관
사실 저는 이 날 복수초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형님께 받은 사진이 있어서...복수초는 따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화암사 창건 설화와 복수초 이야기가 주차장 근처에 있다.
화암사 창건 설화
화암사 창건 설화는 눈 속에서 피는 꽃, 노랑 연꽃 복수초와 관련이 깊다.
창건 설화에 나오는 꽃이 연꽃이라는 일부 학자의 주장도 있지만 생태학적으로 보면 복수초가 맞는 듯하다. 북쪽 지방에서는 눈 사이에 피어난 꽃이라 하여 얼음새꽃, 눈새기꽃이라고도 부르며, 중국에서는 눈속에 피어 있는 연꽃이라 하여 설연(雪蓮)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암사의 창건 설화에 등장한 복수초와 연화공주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에 의하면, 불치병에 걸린 연화공주가 있었다. 공주의 병을 낫게 하려 방방곡곡의 명의와 신비한 약재를 다 썼지만 병은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불공을 드리고 돌아온 왕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날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하여 연화공주의 병을 낫게 해 줄 것이노라.” 하며 조그마한 연꽃잎 하나를 던져 주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왕은 신하들에게 연꽃을 찾아보라 명했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연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연꽃을 찾았다는 전갈이 왔다.
그 꽃은 다름 아닌 불명산 깊고 험한 바위틈 사이에 핀 복수초였다. 왕은 이는 분명히 하늘이 내려준 ‘은혜의 꽃’ 이라고 생각하고 몇몇 신하들에게 조심스럽게 꽃을 가져오게 했다. 며칠이 걸려 연꽃이 핀 산으로 올라간 신하들은 꽃을 꺾으려다 말고 누가 이 꽃을 키우는지 바위 뒤에 숨어 지켜보기로 했다. 이때 산 밑 연못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연꽃에 물을 뿌려주고 다시 연못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이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모두 뒷 걸음을 치자 신하 중 담력이 강한 사람이 꽃을 꺾어 궁으로 가져갔다.
꽃을 다려 먹은 연화공주는 말끔하게 병이 나았다. 왕은 부처님의 은덕을 깨닫고 연꽃이 있던 곳에 커다란 절을 짓고 절 이름을 ‘화암사’라 지었다. ‘화암사’란 ‘바위 위에 꽃이 피었다’는 뜻이다.
화암사로 가는 길에 안도현 시인의 글이 있어 옮겨본다. 주차장에서 화암사 까지 약 20여 분(700m) 소요지만, 주변의 꽃과 나무, 경치를 보며 사진을 찍고 간다면 약 30분 정도 걸린다고 생각된다. 가는 길에 안도현 시인의 글이 많이 보였다.
화암사(花巖寺), 내 사랑 / 안도현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아래 나오는 글의 제목이(잘 늙은 절) 참 신선합니다! 역시 시인은 시인입니다.
화암사 가는 길의 3분의2 지점쯤 될까? 안도현 시인의 '잘 늙은 절' 글이 보이는 곳이 아마도 안내판에 나오는 시와 그림 이야기가 있는 147계단일 것이다.
화암사 탐방로는 위의 사진처럼 여러 구간이 암벽으로 구성되어 있고, 산위에서 작은 계곡들이 형성되어 길 위를 적시기에 상당히 미끄러운 구간이 있으니... 절대 구두를 신고 가지 않기를 바란다. 최소 운동화 이상 신고 가시길 바랍니다.
아래 사진의 좌측 계단이 경내로 들어가고 나오는 출입구다. 계단 정면의 건물은 문간채다.
계단으로 올라가 문간채 사이로 들어오다 화암사 동종 액자가 보였다. 잠시 화암사 동종을 알아보자.
화암사 동종 (花岩寺 銅鐘)
-전북 유형문화제 제40호(1974.09.27.)
-제작시기: 조선후기
이 동종은 극락전 안에 있으며 전체 높이 140㎝, 몸체 높이 85㎝, 입 지름 70㎝이다.종의 맨 윗부분에는 꽃을 세워 도드라지게 장식한 문양이 있다. 어깨에는 간략화된 꽃무늬 띠를 둘렀다. 어깨 아래로는 4개의 유곽이 있고, 그 사이에 보살상을 새겼다. 유곽은 길이 25㎝, 폭 25㎝이며, 덩굴무늬로 장식된 곽 안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유곽 밑에는 금철대시주(金鐵大施主), 동철대시주(銅鐵大施主), 보시(布施), 공양(供養) 등의 문자판이 새겨 있다. [글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다시 우화루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아래의 우화루 설명은 경내로 들어오기 전에 우화루 정면에 보이는 설명문이다.
화암사 우화루 | 花嚴寺 雨花樓
Uhwaru in Hwaam Temple / 보물 제662호
이 건물은 극락전의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문형식인데 정면만을 누문형식으로 하고 후면은 단층 건물로 한 반루각식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 (1611)에 세워진 것으로 그 후에도 여러차례 수리 되었으나 크게 변형되지는 않은 것 같다. 정면 지층의 기둥은 4칸이나 2층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안과 밖이 모두 3출목형식의 다포집 양식이며, 공포부재의 조각 솜씨 등으로 보아 조선초기 양식이 가미된 느낌이 든다. 내부는 남쪽 중앙에 고주 2개를 세워 대들보를 그 위에 얹고 한쪽으로 이어진 퇴량은 평주 위 공포에 얹게 하였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며 대들보와 고주 위에서는 화반형식의 포작을 짜서 동자기둥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측면 2칸 이 부분은 틀렸다. 측면 또한 3칸이다.「럭셔리크로우」
화암사 우화루(雨花樓)는 원래 단청이 없는 것인지...오래된 흔적이 오감을 통해 느껴졌다. 보물인 만큼 특별하기에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우화루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아보았다.
완주 화암사 우화루 | 完州 花嚴寺 雨花樓
Uhwaru Pavilion of Hwaamsa Temple, Wanju / 보물 제662호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조선 숙종 37년(1711)까지 여러번에 걸쳐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화루는 화암사 경내에 있는 극락전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운 것으로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하다...그래서 조금더 알아보았다. 아래글의 출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이다.
완주 화암사 우화루는 화암사관련항목 보기의 정문 역할을 하는 건물로서 경내 및 극락전으로 가기 위한 입구에 자리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사찰의 출입을 담당하는 문은 우화루 옆에 만들어져 있다.
화암사는 629년(무왕 30) 화엄 교조인 일교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그 후 원효대사가 의상대사, 윤필거사와 함께 이 사찰에 머물려 수도했다고 한다. 또한 화암사 중창비에는 조선 전기의 관료인 성달생이 1417년(태종 17)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1425년(세종 7) 중창했다고 한다. 극락전과 우화루, 명부전, 삼성각 등이 동서남북 ㅁ자형으로 특이하게 배치되어 있다. 화암사는 6.25전쟁 때 우화루와 극락전 등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도 불에 타 광해군 3년(1611)에 다시 지은 것! 「럭셔리크로우」
우화루 옆 출입 계단을 통해 올라왔을 때 화암사 전경은 아래 사진과 같다.
시계방향으로 정면에 보이는 게 극락전, 철영재, 불명암 이다. 이날 사진을 찍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극락전의 내부 사진은 못 찍게 하셨다. 부처님을 모시는 곳(경전)이니...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도... 다음에 기회가 된 다면 찍지 못했던 곳의 사진을 찍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화암사는 아무래도 다시 가야할 것 같습니다. 일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다른 사진들이 다 날라갔네요. ㅠㅠ
아래 사진은 적묵당의 현판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우화루(우측)의 지붕과 적묵당(좌측)의 지붕이 맞댄 곳입니다.
적묵당(寂默堂)은 툇마루가 있어서 나그네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적묵(寂默)의 뜻은 고요하고, 평온한 또 조용하다, 잠잠하다,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보면 절에서 수행하는 승방으로 손색이 없는 이름이다.
적묵당의 기둥위로 공포가 있어 주심포로 보인다. 사진이 없어 아쉽지만, 제 머릿속 기억에 남은 사진에 의존해 한자라도 설명을 남겨본다. 아래 사진의 좌측이 적묵당(寂默堂)이다.
극락전의 편액은 각각 써 놓았다. 이렇게 써 놓은이유는 극락전 설명(아래)에서 나온다. 멀리서 보면 단청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미하게 단청이 남아 있는 게 보인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 | 完州 花嚴寺 極樂殿
Geungnakjeon Hall of Hwaamsa Temple, Wanju / 국보 제316호
완주 화암사 극락전은 고려 충렬왕 23년 1297 에서 충렬왕 복위 9년 1307 사이에 새롭게 지어졌다. 극락전은 죽은 이를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은 조선 세종 7년 1425에서 세종 22년 1440 사이에 고쳐 짓고, 선조 30년 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선조 38년 1605에 다시 지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고쳐 짓기를 반복했으며, 2004년에도 해체·보수 작업을 진행하였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하앙식 구조로 된 건물이다. 하앙은 지붕의 하중을 분산하고자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 서까래를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고 일반 지붕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늘여 뺀 건축 방식을 말한다. 이 구조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많이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목조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건물의 편액*은 각각의 글자를 나누어 걸었는데, 하앙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목재로 인해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고, 편액 위에 그려진 불화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전각 안에는 불단을 화려하게 만들어 부처의 상을 모셨다. 불단 위에는 지붕 모형의 닫집**이 있고, 나한도와 화조도 등의 벽화와 단청이 화사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아미타 삼존 불상을 중심으로 아미타후불도, 신중도, 현왕도 등이 그려져 있으며 화암사 동종*** 이 놓여 있다.
*편액 :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닫집 :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
***화암사 동종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0호
극락전과 적묵당 사이의 뒤안에 모습도 사진기에 남겨 보았다.
찍지 못하고, 날라간 사진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극락전(極樂殿) 우측 단칸 건물인 철영재(啜英齋)를 보겠다.
철영재(啜英齋) 측면에 작은 비석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철영재(啜英齋)
철영재(啜英齋)편액은 문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가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에 대해 여러 자료가 남아있으나, 지난 2019.11.05. ~ 2020.03.22.에 신위 선생님의 작품 전시회를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에서 했었던 당시 홈페이지의 글을 옮겨봅니다.
... 옛 문인들은 시와 글씨와 그림을 모두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며 이 세 가지에 모두 뛰어난 인물을 ‘삼절三絶’이라 일컬었습니다. 신위申緯(1769~1847)는 시·서·화 삼절로 19세기 전반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았으며, 대나무 그림에도 뛰어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조선후기 예단의 총수였던 강세황姜世晃(1713~1791)에게 지도받았고, 뒤 세대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 앞서 조선의 문예를 집대성하였습니다. 신위의 호인 ‘자하紫霞’는 신선의 세계를 물들이는 자줏빛 노을을 뜻합니다. ...
김정희(金正喜)에 앞서 조선의 문예를 집대성한 자하(紫霞) 신위(申緯) 선생님의 편액이었습니다.
숭록대부* 판중추원사** 성달생(1376~1445)은 사육신 성삼문의 조부로서 세종 때 전라관찰사를 거처간 후 훗날 퇴락해가는 화암사를 중창 불사하였다. 이에 후대 화암사에서는 성달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2013.10.20.(비석)
*숭록대부:(정1품) **판중추원사:(종2품)
우화루와 불명당 사이로는 정면 3칸 규모의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으로 이루어진 소조지장삼존불과 더불어 시왕상 10구, 판관상 2구, 사자상 2구, 동자상 2구, 인왕상 2구 등 총 21구가 봉안되어 있다.
위 사진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우측 건물이 우화루(雨花樓)입니다. 앞서 측면 2칸규모가 아니라 3칸이라 한 증거입니다.
우화루(雨花樓)옆에서 예쁘게 핀 분홍빛 금낭화(錦囊花)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금낭화의 꽃말: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절에 많이 보이는 이유가 꽃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이제 화암사를 나와 좌측의 거대 암반지역으로 가봅니다. 정말 화암사 창건 설화처럼(불명산 깊고 험한 바위틈 사이에 핀 복수초 이야기) 바위 위에 지어진듯 합니다.
해우소의 계단을 올라 화암사의 뒷편 길로 나가봅니다.
담장 너머에 겹벚꽃을 사진에 담아야겠죠!~
이제 처음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복수초는 어디에 있나? 두리번 두리번... 불명산 오솔길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만난 꽃들입니다.
완주 화암사 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화암사길 271
지금까지 바위 위에 꽃이 핀 완주 불명산 화암사에서 "전주 럭셔리크로우" 였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는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완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주 만덕산 정수사(完州 萬德山 淨水寺) (37) | 2023.01.17 |
---|---|
완주 비비정(飛飛亭)과 비비정예술열차의 풍경 (22) | 2022.12.13 |
완주 대한민국 술테마박물관(완주 BTS 힐링 성지_6로드) 2편 (25) | 2022.06.28 |
완주 대한민국 술테마박물관(완주 BTS 힐링 성지_6로드) 1편 (12) | 2022.06.19 |
완주 그림책미술관(PICTURE BOOKART MUSEUM) (19) | 2022.06.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