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8일 전북 완주군 상관면 만덕산 자락에 위치한 정수사 淨水寺(주변이 깨끗하고 물이 맑다)를 다녀왔습니다. 전주에서 출발-전주 남원간 17번 국도-신리-749번 지방도-상관저수지-721번 지방도(만덕산길)-정수사길-정수사 도착
상관저수지 도로를 달리며 눈앞에 보이는 겨울 저수지 풍경을 잠시 카메라에 담아봤습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는 아직도 눈과 얼음이 있었습니다. 파란 겨울 하늘과 저수지의 풍경을 감상해 봅니다.
여기서 잠깐 상관면上關面에 대해 잠시 알아볼까요?
상관면은 완주군 3읍 11면의 하나로 본래 전주군 지역으로 (1935.10.1일 이후는 완주군) 남관진(南關鎭)* 위쪽이 되므로 상관면(上關面)이라 하였습니다.
*남관(南關. 바깥숙재. 外文里)
남관(南關)은 전주의 남쪽 관문으로 마을 옆에 옛 성터(남관성南關城)가 있다. 바깥숙재는 쑥고개의 바깥쪽이 되므로 일컫는 이름.
목적지를 찾아서 저수지의 우측 만덕산길(마치리 방향)로 조금만 가다보면 좌측으로 여러동의 한옥이 눈에 들어옵니다.
현재 한옥마을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한옥의 아름다움에 다시한번 가던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치신덕길 앞에서 정수사 방향을 알리는 돌이 있습니다. 아직도 2km가 남았네요.
다시 상관초등학교 마치분교(폐교)에서 직선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만덕산길과 정수사 길의 갈림 길 못미처 우측에 2기의 부도가 나옵니다. 부도에 대한 설명글이 없어서 사진만 찍고 갑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측 정수사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주차장과 정수사(淨水寺)가 나옵니다.
완주 만덕산 정수사(完州 萬德山 淨水寺)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정수사길 18 (마치리 137-1)
전북 완주군 상관면 마치리 만덕산(765.5m) 계곡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정수사는 889년(진성왕 2)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정수사는 처음에는 ‘중암(中庵)’이라 하였다가 후일 주변 산수가 청정하여 지금 명칭인 ‘정수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법등(法燈)이 이어졌다고 하나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581년(선조 14)에 진묵대사(震黙大師)가 중건하였다. 그러나 중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정유재란 양난을 거치면서 정수사의 건물이 모두 불탔다. 이후 구체적인 중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범우고』 및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가람고(伽藍考)』 등에는 정수사가 계속 등장하고 있어, 양난을 거친 후 어느 때 다시 중건하여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극락전의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完州 淨水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853호]에서 나온 복장유물에 ‘순치(順治) 9년’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어,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1652년(효종 3)에 봉안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이때 쯤 정수사가 중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무염의 대표작이다.
근대에 들어 1923년 초운선사가 요사채 2동을 지어 새롭게 법등을 이었고, 1971년 이동수 주지가 부임하여 중창불사를 시작했다. 1987년 무렵 벽돌요사를 짓고 1992년에 극락전을 중수했으며, 1996년에 초가요사를 허물고 현재 목조요사[관음전]를 새로 지었고 범종각을 증축하였다. 2002년에는 삼성각을 세웠다. 2006년 지장전을 이축하였고, 2007년 극락전을 증축하였다. 2016년에 누각을 증축하는 등 크고 작은 불사를 이루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정수사의 가람배치는 부도 2기, 요사, 종무소를 겸하고 있는 관음전,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범종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주문이나 사천왕문 등은 없다. 정수사에는 보물 제1853호 목조 아미타여래 삼존 좌상이 있다.
[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_향토문화전자대전_디지털완주문화대전]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完州 淨水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Triad of Jeongsusa Temple, Wanju
보물 제1853호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있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아미타여래는 죽은 이를 서방극락세계로 인도하여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부처이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17세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승인 무염無染과 6명의 조각승이 함께 효종 3년(1652)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원래 전주의 어느 절에 봉안하려고 만든 것이나 순종 4년(1910)에 이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아미타여래는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무릎에 얹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아미타여래의 손 모양은 아미타여래가 중생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양옆의 협시보살들은 크기와 모습이 거의 같은데, 둘 다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조형미가 뛰어나고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이 명확하여 17세기 중엽의 불교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찾아 보았다.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2015년 3월 4일 보물 제1853호로 지정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정수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 불상.
201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완주 만덕산(萬德山) 정수사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한 전형적인 아미타삼존상으로, 중앙에 위치한 아미타불은 사각형의 얼굴과 사각형으로 블록화된 신체 구성을 지니고 있어 조선 후기 불상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개금불사 중 발견된 복장기(腹藏記)에 의해 1652년(효종 3)에 조각승 무염이 조성하였음이 밝혀졌다.
내용
아미타불좌상의 머리 형태는 촘촘한 나발로 반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었다. 얼굴은 양감과 볼륨감이 살아 있어 통통한 편이다. 이마는 넓은 편이며 작은 백호가 양 미간 사이에 조각되었다. 눈은 가늘게 반개하여 불(佛)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나타냈고, 부은 듯한 눈두덩이 표현이 특징적이다. 코는 마치 칼로 빚은 듯이 날씬하고 오뚝하게 솟아 있으며, 볼살이 팽창된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다. 목선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벌어진 형태로 형식적인 삼도가 조각되어 있다. 신체표현은 비교적 당당하여 이등변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며, 둥근 어깨와 적당한 무릎 높이는 안정감을 준다.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맺고 있는 손은 별목(別木)으로 신체에 비해 작게 조각되었다. 대의는 통견으로 밋밋한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으며 조선 후기 불상에 많이 보이는 왼쪽 어깨의 덧대진 듯한 옷자락의 표현이 눈에 띈다. 또한 수평으로 간결하게 조각된 내의의 표현도 이 불상이 조선 후기 불상임을 말해준다. 복부에는 내의 안으로 들어간 옷자락이 표현되었고 다리는 결가부좌하였다. 왼쪽 소맷자락은 일부는 결가부좌한 발바닥 위로 걸쳐져 있고, 나머지는 발 아래로 흘러내려 고려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발바닥 위로 흘러내리는 옷자락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반쪽을 발 아래로 배치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대체로 옷주름선은 간결하면서도 단순하게 표현되었지만, 조각선 자체는 유려하여 목불 특유의 유려함과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좌우의 협시인 관음보살좌상과 대세지보살좌상은 팔의 위치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 얼굴은 본존인 아미타불과 마찬가지로 양감이 살아있는 사각형으로 조각되었다.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많은 화염문과 꽃모양 장식으로 꾸며졌고 양 옆으로 역Ω형의 관대(冠帶)가 마치 바람에 나부끼듯 역동적으로 장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상으로는 상당히 역동적이고 특징적이다.
우협시인 대세지보살의 보관 중앙에는 정병이 조각되었으나, 좌협시인 관음보살좌상 보관 중앙에 화불은 조각되지 않았다. 두 보살상 모두 구불구불한 보발이 양 어깨로 길게 내려뜨려져 있으며 귀에는 작지만 화려한 귀걸이를 하고 있다. 아래로 갈수록 퍼진 목은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팔은 한 손은 복부에, 다른 한 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그 사이에 지물을 들고 있다. 대세지보살좌상은 연화가지를 들고 있고 관음보살좌상은 연화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다. 대의형 천의는 통견으로 가슴을 시원하게 벌린 형태이며 벌어진 사이로 영락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영락장식은 영덕 장륙사 건칠보살좌상과 같은 조선 전기 보살상 영락장식의 번잡한 면에서 탈피하여 정형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영락 아래로 일자형의 내의와 내의 안으로 들어가는 대의자락의 표현이 보인다. 두 발은 결가부좌를 취하고 있는데 다리 사이의 부채꼴형 주름이 인상적이다. 좌우 협시의 옷주름도 본존상의 옷주름과 같이 단순화되었지만 유려한 특징이 간취된다. 또한 관음보살좌상 오른쪽 어깨 옷자락의 형태는 군산 은적사 석가불좌상과 유사하여 비교할 만하다.
특징
불상의 세부표현을 살펴볼 때 16세기에 와서 완전히 정착된 조선 전기 불상 양식을 간직하면서도 블록화된 신체구성, 경직된 얼굴 표정, 옷주름선의 간략화와 형식화 등 조선 후기 양식으로의 변화를 알려주는 불상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근처의 완주 송광사(松廣寺) 불상들과 양식상 친연성을 보여 송광사 불상과 함께 17세기 완주 지역에서 유행한 조각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의의와 평가
이 삼존상은 목불 특유의 질감과 유려함을 엿볼 수 있고 복장기가 남아 있어 1652년이라는 확실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이 시기 완주 지역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예이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극락전을 나와 측면 동쪽방향에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을 보고 남쪽방향의 삼성각과 계단이 보인다.
정수사를 빠져나와 만덕산길과 정수사길의 사이에 김준계장군묘를 알리는 푯말을 보았다.
마치종점 버스정류장 앞에 김준계(金遵階)장군 신도비가 있다.
일단 묘소는 눈 길이라 갈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재실도 길의 폭도 좁고, 눈이 녹지 않아 신도비만 올립니다.
▪아래사진 설명: 묘소(좌측 산 약300m) / 신도비(현위치) / 재실(정수사 골짝으로 약300m)
희천인(熙川人) 김준계(金遵階) 장군 / (명종 9년 ~ 인조1년 / 1554년 ~ 1623년)
공(公)은: 병사공(兵使公), 자(字)는: 언승(産昇), 호(號)는: 매곡(梅谷)
선조(宣祖)16년(1583년) 계미년(癸未年)에 무과(武科)급제하여 내삼청(內三廳)에 제수되시고, 현감(縣監)을 거쳐 선조23년(1590년) 경인년(庚寅年)에 군수(郡守)가 되시고 선조 31년(1598년) 무술년(戊戌年)에 훈련원정(訓練院正)을 거쳐 부사(府使)가 되셨으며 선조 36년(1603년) 계묘년(癸卯年)엔 경기수사(京畿水使), 2년후 병사(兵使), 광해(光海)2년 경술년(庚戌年)엔 호서절도사(湖西節度使)에 제수되시고 연이어 성상(聖上)을 호위(扈衛)한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광해 10년(1618년) 무오년(戊午年)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시고, 다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겸 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를 역임하셨다. 한편 병사공(兵使公)께서는 선조37년(1604년) 갑진년(甲辰年) 4월에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전공(戰功)을 세워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셨으며, 광해 5년(1613년) 계축년(癸丑年) 8월에는 위성원종(衛聖原從) 1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신 분이시다.
※근기 : 인터넷에서 장신록으로 확인하시면 조선조 장신록의 광해군 때 훈련대장으로 기록되어 있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사진 설명: 신도비의 정측면(좌)과 후측면(우) 사진
우리 고장에 몰랐던 문화재와 인물에 대해 새롭게 알고, 사진을 찍고 왔던 길로 돌아가는 길...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가 되어 해가 지고 있었다.
왔던 길로 돌아가며 주변 설산의 풍경을 찍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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