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지난 2022년 8월 14일, 15일 이틀간 가족과 함께 다녀온 전주국립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에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유물에 대한 설명은 전시실에 있는 내용을 옮겨왔습니다.
전주국립박물관의 주차비는 무료(무인 사전정산 필수)이고, 전주역사박물관은 그냥 무료이다.
전주시 관광안내도 하단에 전주삼천 마실길 종점 푯말이 있다.
일제 강점기 전주신사 석물 / 1914년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부터 일본인은 다가산 정상에 조그마한 요배소를 설치하였고, 에이지 일왕이 죽고 난 뒤 1914년 1만 1,800평의 부지에 다시 크게 세워 전주신사라 하였다.
이 돌기둥은 전주신사를 상징하는 깃발의 지주대로 사용했던 사호석(社號石)이다. 기둥의 앞면에는 전주신사(全州神社)라는 네 글자가, 뒷면에는 다가산에 신사를 건립한 대정 3년(1914) 10월 9일(大正三年 十月九日)이 새겨 있었으나, 해방 후 월일을 제외하고 읽어볼 수 없도록 모두 파내었다.
2014년 1월 22일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다가산에 있던 돌기둥을 철거하여 전주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진짜 '헐' 이다!~ 지금까지 전주에 살면서 전주에 신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아예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전주역사박물관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전주초등학교 일제 석물 / 일제 강점기
일제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목적으로 전주초등학교 교정에 일본 천황의 사진을 보관한 봉안전을 건립하였다. 이 표지석들은 봉안전 주변에 세웠던 것으로 인애원(仁愛園)·지성원(至誠園)·대화원(大和園)·충후원(忠厚園)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2006년 4월23일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뼈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전주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이 표지석들을 철거하여 전주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연자방아
연자방아는 소나 말을 이용하여 곡식을 찧는 방아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하고 마소가 끌고 돌린다.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하였다.
문관석(文官石)_조선후기(17세기경) 177cm×39cm
문관석은 문신 형상을 하고 능묘를 수호하는 석인상이다. 능묘 앞에 한쌍으로 배치되며 문인석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포(袍)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를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차림이다. 문관석과 함께 능을 지키는 무신 형상의 무관석(武官石)은 대부분 왕릉에서 찾아진다.
본격적으로 전주역사박물관 건물로 들어가 봅니다. 박물관으로 들어와 안쪽 문을 열면 장독대와 십장생도를 볼 수 있습니다.
십장생도( 十長生圖)
민화 가운데 하나인 십장생도는 열가지 장생물(해, 달, 구름, 산, 돌,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이 그려진 그림이다. 여기에는 복을 받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정초에는 새해 축복의 의미로 왕이 중신에게 장생도를 선물하였으며, 민간에서는 십장생 그림을 문 위나 방 벽에 붙여 놓고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5F 전주역사실
박물관의 안내에 따라 5층부터 내려오면서 관람을 했습니다.
전주全州
삼한시대 전북은 마한(馬韓)의 땅으로 10여 개의 소국이 위치하였다. 전주에는 부사분사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지국(爰地國)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시대 전북은 백제에 속했다. 백세 5방 체제하에서 전북지역은 고부에 중방이 설치되었다. 익산 왕궁리에는 왕궁이 건립 되었다. 마한·백제 때 전주는 전북권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었다.
전주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때 전북권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신라는 통일 후 신문왕 5년(685년) 전국을 9주 5소경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때 9주의 하나로 완산주가 설치되어 전북 일원을 총괄하게 되었다. 전남권에는 무진주(광주)에 주(州)가 설치되었으며, 남원에는 소경을 두었다.
‘전주全州’라는 지명 또한 통일신라 때에 등장하였다. 전주의 옛 지명은 ‘완산完山’이었다. 완산은 완산칠봉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경덕왕 16년(757년)에 군현명을 한자식으로 바꾸면서 완산을 전주로 개명하였다.
후백제의 왕도, 전주_Jeonju as the Capital of Later Baekje
892년 무진주(광주)를 장악하여 세력을 기른 견훤은 900년에 전주로 거점을 옮겨 도읍을 삼고 후백제를 건국하여 왕을 칭하고 연호를 ‘정개 正開’ 라고 하였다.
옛 백제 땅에서 세력을 키운 견훤은 중국의 오월 및 일본과의 외교를 확장하는 한편 927년에는 신라 수도 경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제거하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고려와의 전투에서 연승하는 등 10세기 초 가장 강력한 국가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930년 고창(안동)전투에서 고려에 대패한 이후 급격한 전력의 상실과 왕실 내부의 갈등이 후백제의 중심 세력 간의 권력 쟁탈과 맞물리면서, 936년 황산전투를 끝으로 삼국 대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패망하였다.
전주 승암산견훤성(동고산성)은 후백제의 대표적 유적으로 ‘전주성 全州城’이라고 명문이 새겨진 연화문양 기와와 봉황문양 기와, 무사문양 기와가 출토 되었다. 그래서 후백제 왕궁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왕궁 주변의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편, 전주부 연혁에, “견훤이 완산에 도읍하고 후백제라고 하였다”고 수록되어 있다.
‘전주성’ 글자가 새겨진 기와 全州城銘文瓦
후백제 / 암막새 길이 29cm, 수막새 지름 15.8cm 견훤성(동고산성) / 국립전주박물관
전주 승암산 견훤성(동고산성)에서 출토된 쌍봉황 무늬 암막새, 쌍무사 무늬 암막새, 연화 무늬 수막새이다. 기와 가운데에 ‘전주성(全州城)’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완산지 / 1911년
1911년에 편찬된 전주부 읍지이다. 고토성과 고덕산성에 견훤이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초 나라에서 편찬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고토성을 견훤이 축조했다고 되어 있다.
고려시대, 전주목 설치와 전라도 탄생
“전주는 완산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백제 땅이었다. 인구가 매우 많고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이 옛 나라다운 풍치가 있다. 때문에 그 고을 백성들은 질박하지 않고 아전들도 모두 의관을 차려입은 선비들 같은 것이 행동거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볼만한 것이 있다.” -이규보, 「남행월일기」
고려는 후삼국 통일 후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성종 2년(983년) 12목 체제로 개편하였다. 전라도에는 전주목과 나주목을 설치하였다. 1018년(현종 9년) 전주권역 강남도와 나주권역 해양도를 합쳐서 전라도라고 하였다. ‘전라도’ 도명은 전주에서 ‘전’자, 나주에서 ‘나’ 자를 따와 합친 것이다.
전라도 도제 출범은 고려 5도 중에서 가장 빨랐다. 이는 전라도 지명이 가장 오래되었고, 한 도로서 살아온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음을 말해준다. 지난 2018년은 전라도 천년이 되는 해이다. 전주는 전라도 천년의 중심이었다.
고려시대의 도제는 5~6품의 직급이 낮은 안찰사가 일도를 순력하는 미숙한 체제로, 조선시대의 종2품의 대신급 관찰사가 일도를 통괄하는 도제와는 다르다. 일도 관찰사가 총괄하는 도제는 고려 말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감영제로 완성되었다.
고려사 高麗史 Goryosa | 복제
『고려사』, 태조 26년조에 훈요십조가 실려 있다. 펼쳐진 쪽은 제8조 호남 차대를 불러온 조항으로, 차령 이남은 풍수적으로 반역의 기운이 있으니 이 지역 사람들을 중앙에 등용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호남 출신 인재들의 중앙 진출이 억제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은 나주오씨 장화왕후 소생이고, 태조대 전라도 출신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등 훈요십조 내용이 건국 초의 상황에 맞지 않으며, 또 지금 전해지는 훈요십조가 훗날 최항의 집에서 찾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개작 내지 조작설이 일찍부터 제기되고 있다.]
전주역사문화의 특질_Characteristics of Jeonju's History and Culture
전주는 구석기 이래 사람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통일신라 때 전북권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후백제 때 왕도가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전주목이 설치되어 전북권의 중심으로 역할을 하였으며 나주목과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습니다.
조선건국 후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왕조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전라 감영이 설치되어 호남제일성이 되었습니다. 조선멸망후 지금까지는 전북도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주는 통일신라 이래 지금까지 전라도 혹은 전북의 중심지로서 위상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도시입니다.
전주는 문화예술이 발전한 예향이요 풍류의 도시입니다. 음식문화를 비롯하여 대사습놀이로 대표되는 소리, 선비정신을 담은 서화, 조선 최고의 종이 전주한지와 진상품 전주부채, 한글고소설로 대표되는 출판문화 등 전주는 빼어난 문화예술을 자랑하는 품격 높은 도시입니다.
전주정신은 '꽃심'입니다. 꽃심은 중심이고, 싹을 틔우는 힘이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 꽃심에는 ‘대동풍류·올곧음·창신’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전주는 모두 함께 멋과 올곧음으로 전통을 지키며 새로운 문화와 세상을 창출해 가는 꽃심의 도시입니다.
1935년 전주·완주 분리
Jeonju divided into Jeonju-bu and Wanju-gun in October 1935
조선말 1895년 지방제를 23부제로 개편하여 전주, 남원, 나주, 제주에 부를 설치하였으며, 군현명을 ‘군’으로 통일하여 전주부도 전주군으로 바뀌었다. 이듬해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하여 전라도는 전라북도와 남도로 나뉘었다. 그러면서 전주는 전북도청의 소재지로 자리했고 전남도청은 광주에 자리하였다.
일제 강점 후 1914년 군현들을 통폐합하여 전라북도는 1부 14군 체제로 개편되었다. 이때 1부는 군산으로 전주는 14개 군의 하나였다. 1914년 지방제 개편때 전주군은 고산현을 병합하여 20개 면, 173개 리로 편제되었고, 전주부성이 있던 일대는 전주면이 되었다.
1931년 전주군의 전주면을 전주읍으로 개편하였으며, 1935년 10월 전주읍 전주부로 승격시켜, 전주군을 전주부와 완주군으로 분리하였다. 광복후1949년 8월 15일 모든 부가 시로 개편되면서 전주부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조선의 3대 도시 전주_Jeonju, a Metropolis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전주는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 전라도의 수부로 물산이 풍요롭기가 한양을 방불케 하였다. 「호구총수」에 등재된 1789년(정조 13)의 전주부 호구는 총 20,947호에 72,505명이었다. 전주가 호수로는 한양, 평양에 이어 3번째이고, 인구수는 한양, 평양, 의주, 충주에 이어 5번째이다. 전주부성의 건물들은 관아를 제외하고 대개 초가집이었으며, 성안에는 주로 행정을 담당한 이속들이 살았고 민들은 성 밖에 주로 살았다.
“호남은 우리나라 남쪽의 울타리로 산천의 경계가 뛰어나고 물산이 풍요로워 온 나라가 먹고 입는 자원의 절반을 호남에 의지하고 있다” -매천 황현
임진왜란기 전주성 수호와 조선왕조실록 보존
전주성과 호남을 수호한 우국충절
충무공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하였으며, 호남의 의병장 안방준은 ‘호남의 보존은 의병의 봉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하였다.
1592년(선조 25)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여 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조선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전라도는 사정이 달랐다.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함열 출신 의병장 황박 등이 웅치에서 적을 막았으며, 광주목사 권율, 동복현감 황진 등은 이치에서 적을 막았다. 전주성은 전주출신 의병장 이정란이 부민들과 함께 지켰다. 그 결과 전주성과 호남을 지켜낼 수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성이 왜군에게 점령되지만, 왜란 초 전주성과 호남 수호는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사회의 제반 모습이 총망라되어 있는 방대한 역사서 이다. 1973년 국보 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은 건국 후 한양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4대 사고에 「조선왕조실록」 을 비롯한 국가 중요 전적을 보관하였다. 전주사고는 1439년(세종 21)에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 태인의 선비 손홍록 · 안의 등이 협력하여 전주사고의 실록과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내장산으로 옮겨 1년여를 지켜냈다. 그결과 4대 사고 중에서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고 태조어진도 지켜졌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전쟁이 끝난 후 강화도 정족산사고에 봉안되고 전주사고는 철폐되었다. 현재 전주사고본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읍 내장산 이안도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 여러 서책을 정읍 내장산에 옮기는 장면을 상상해 그린 것이다. 황윤석이 지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 전’에 의하면, 전주사고의 서책과 은그릇 등을 50여 바리에 싣고 내장산에 옮겼다고 한다.
황산대첩荒山大捷
황산대첩은 1380년(우왕 9년)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이긴 전투이다. ...(중략)...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귀경길에 전주 오목대에서 잔치를 열었다. 이성계는 여기에서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읊어 새 왕조 건국의 의지를 피력했다고 한다.
태조어진太祖御眞 | 국보 317호 | 복제(진본 어진박물관 소장)
조선은 건국 후 태조 어진을 한양을 비롯하여 태조의 본향 전주, 태조가 태어난 영흥, 고구려의 수도 평양, 신라의 수도 경주, 고려의 수도이자 태조가 왕위를 오르기 전에 살았던 개경 등 6곳에 봉안하였다.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어진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1410년(태종 10) 조선왕실의 본향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 하였으며, 1442년(세종 24)에 전주 진전(어진을 모신 궁전)을 경기전이라고 하였다. 경기전의 ‘경기’는 새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런 터, 조선왕실의 기틀이라는 의미이다.
1872년(고종 9), 태조어진 구본이 오래되고 낡아서 세초매안(물에 씻어서 묻음)하고 새로 모사하여 경기전에 모셨다. 이 신본이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으로 국보3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조어진은 평상이 집무복인 익선관에 청룡포를 착용한 전신상이다. 건국자의 권위와 위엄이 돋보이는 어진으로 정면상에 눈에 정기가 가득 차 있으며 풍채가 좋고 위풍당당하다. 눈과 입은 작고 귀는 크며, 오른쪽 눈썹 위에 사마귀가 있다.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_Jeonju as the Birthplace of the Joseon Dynasty
전주는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다. 태조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가 동북면으로 이주해 갈 때까지 그 선조들은 대대로 전주에 살았다. 전주는 조선건국과 함께 왕조의 발상지가 되어 풍패지향으로서 위상이 격상되었다. ‘풍패’란 건국자의 본향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조선은 건국 후 1410년(태종 10) 왕실의 뿌리인 전주에 태조 어진(왕의 초상)을 봉안하고 경기전이라고 이름하였다. 전주이씨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김씨의 위패를 모신 시조사당 조경묘와 시조 이한의 묘역 조경단, 태조가 황산대첩 후 귀경길에 들려 일가친지를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었던 오목대, 목조가 살았던 자만동 이목대 등도 풍패지향 유적들이다.
운용문 암막새
경기전 서편 부속 건물지에서 출토된 용 문양의 기와이다. 용 문양이 힘차고 역동적이다. ‘운용’이란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용이라는 뜻으로 천자나 왕후, 영웅을 이르는 말이다.
전주객사를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한 것도 ‘풍패’에서 따온 것이고,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한 것도 ‘풍패’에서 ‘풍’자를 따와 붙인 이름이다. 서문은 ‘풍패’의 ‘패’자를 따서 패서문이라고 하였다. 세종대 전주사고 설치도 전주가 풍패지향이라는 데서 연유하였다.
전주부성 축성록 / 1734년(영조 10)
1734년(영조 10) 전라감사 조현명이 전주성을 다시 쌓으면서 기록해 놓은 일지이다. 전주부성 개축 이전의 모습과 개축후의 모습, 공사내역 등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전주부성 남문 명견루明見樓 현판懸板 탁본 / 조선 | 325×105cm
1734년(영조 10)에 전라감사 조현명이 전주부성을 개축하고 남문을 ‘명견루’라고 이름하였다. 전주성을 새로 쌓을 때 반대가 심했는데, 영조의 명견이 있었기에 가능하였 다고 하여 ‘명견루’라고 이름하였다.
명의록
전라감영에서 편찬한 책으로 정조의 정치적 처분이 정당함을 밝힌 책이다. ‘완영개간(完營開刊)’이라는 간기(刊記)가 있다. 조선시대 각 도의 감영은 출판의 중심이었다. 전라감영 책판은 현재도 5,059판이 남아 있다.
전주의 비보풍수
온고을 전주는 노령산맥에서 뻗어 내린 기린봉, 승암산, 고덕산, 모악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사람 살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그런데 서북쪽이 열려 있어서, 이를 비보(裨補)*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건지산과 가련산을 이은 덕진제방,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숲정이, 북쪽을 누른다는 뜻을 지닌 진북사(鎭北寺) 등이 그것이다.
조선의 지리서들에는 주산이 건지산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원래는 기린봉이 주산이라는 설이 있다. 기린봉이야말로 기골이 장대하고 주산으로서 품격을 갖추고 있으며, 건지산은 주산으로서는 너무 약한데 기린봉에 왕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이 기를 누르기 위해 조선왕조는 일부러 주산을 건지산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비보(裨補):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에 붙는 이야기로 지역의 풍수적 결함에 따라서 본완하는 의미로 쓰인다.
전주부 지도(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조선 왕실의 본향이었던 전주는 1392년(태조 1)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되었으나, 1403년(태종 3) 전주부(全州府)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설치되어 호남지역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이에 전주성과 그 주변을 담채로 그린 지도를 열 폭 병풍으로 만들었다. 첫 번째 폭과 마지막 폭에는 전주부의 변천 과정과 전주성 내외의 주요 장소의 위치, 간단한 연혁 등이 기록되었다. 객사(客舍), 풍남문(豊南門), 패서문(沛西門), 경기전(慶基殿), 조경묘(肇慶廟) 등 전주부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글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전주역사박물관 JEONJU HISTORICAL MUSEUM 2부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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