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지난 2022년 8월 14일, 15일 이틀간 가족과 함께 다녀온 전주국립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에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유물에 대한 설명은 전시실에 있는 내용을 옮겨왔습니다.
4F 동학농민혁명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일천팔백구십사년 전주
동학의 사회개혁 사상
동학사상은 수운 최제우에 의하여 제시된 민중종교사상이다. 19세기 후반 한국사회는 안으로 봉건적인 왕조체제의 모순으로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줄 체제변혁의 요구가 커졌으며, 밖으로는 서양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켜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때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 평등사상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사상’을 바탕으로 지배세력으로부터 부당한 수탈을 당하고 있었던 농민들에게 사회 변혁의 희망을 주었다. 변혁을 지향하는 동학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사발통문(沙鉢通文)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혁명을 결의한 문서이다. 1893년 11월 전봉준, 송두호, 송대화, 송국섭, 최경선, 김도삼, 손여옥 등 20명*은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성을 거쳐 서울로 바로 쳐들어가자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누가 주모자인지 모르게 사발을 엎어 놓고 돌아가며 서명을 하고 믿을 수 있는 동지들에게 그 사실을 통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발통문이라 불린다.
1968년 12월 4일 주산마을(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옛날에는 대뫼마을) 송후섭(사발통문 서명자 중 한 사람인 송대화의 아들)의 집에서 발견된 뒤 그 뜻을 기리고자 다음 해 12월 1일 주산마을 입구에 '동학 혁명모의탑'을 세워 사발통문을 그 탑 아래 묻었다. 그 뒤 사발통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자 1970년 3월 4일에 탑을 해체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사발통문은 혁명 전 그 때 민중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혁명이 어떻게 준비되었으며 혁명의 구체적 계획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단히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마지막 부분이 잘려나가 그 뒤의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사발통문에 적혀있는 명단 20명 / 계사(癸巳, 1893) 11월
이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4일 전라북도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준섭(宋俊燮)의 집 마루 밑에서 발견 되었다. 20명의 성명은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고부=정읍), 송주성, 황홍모, 최흥렬,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태인), 최경선(태인), 임노흥, 송인호 이다.
농민군의 전주입성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감영이 있던 곳으로 전라도의 심장부였다. 따라서 전주는 왕실 뿐 아니라 농민군에게도 대단히 의미가 큰 곳이었다. 1894년 3월 농민혁명의 깃발을 내건 농민군이 정읍 황토재와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 밖 용머리고개에 오른 것은 4월 27일이었다. 이날 오전 농민군의 일부가 서문 밖에 모인 장꾼 속에 뒤섞여 있다가 서문과 남문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가 전주성을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이는 농민군 최대의 승리이자 집강소 통치를 보장하는 확실한 전과였다. 이 소식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파병 요청은 오래 전부터 조선 침략을 노리던 일본에게 출병의 빌미를 주었다. 결국 청·일 양군을 불러들인 조선 정부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한반도에는 갑자기 전쟁의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이처럼 농민군의 전주입성은 농민혁명의 한 과정에 그치지 않고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상 東學農民軍 指導者像
이 흉상은 일본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지난 1995년 7월 26일, 일본 홋카이도대학 표본 창고에서 신문지에 싸인 채로 발견된 유골에는 ‘한국동학당 수괴(韓國東學黨 首魁) 라는 글씨가 쓰여 있고, 1906년 9월 20일 진도에서 수습되었음을 기록한 쪽지가 함께 발견되었다. 조사결과 유골의 주인공은 전라남도 진도 출신의 박씨 집안 후손으로 추정되고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여겨진다.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전라북도의 지원과 관련단체의 협력으로 1996년 5월 이 유골을 국내로 봉환 하였다. 유골을 영구안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사를 실시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고인의 고귀한 넋을 기림과 아울러 동학농민군지도자의 유골을 탈취해 간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행위에 책임을 묻고자 이 흉상을 제작하였다.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는 2019년 6월 1일 전주 완산칠봉 녹두관에 안장함으로 무명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넋을 기렸다고 합니다.
전주 동학농민혁명을 더 알고 싶다면? 아래 포스팅 URL 클릭시 이동
대다수 백성들의 생활 모습_The Life of the Common People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통치질서의 파탄으로 삼정이라 불리는 전정 · 군정 · 환곡의 세금제도가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관리들은 제맘대로 백성들을 수탈하여 백성들의 삶은 생지옥과 다름없었다.
특히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의 농업과 수공업 기반이 점차 무너지고, 조선의 영세한 상인들은 청일 상인의 막대한 자본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저항했지만 생활여건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칼노래-
시호(時乎)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丈夫)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로다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4F 동학농민혁명실 내부
화승총 격발 과정(1~4단계)
1단계: 계두에 화승 꼽아 넣기 / 2단계: 총열에 화약을 넣고 탄알을 장전하기
3단계: 계두에 꼽아 놓은 화승에 불붙이기 / 4단계: 인금 당기기(방아쇠)
완산전투
전주성을 둘러싸고 1894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는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과 농민군 사이에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으며, 최대의 격전은 5월3일 벌어졌다. 이것이 완산전투이다.
농민군은 5월 3일 서문과 북문으로부터 돌진하여 사마교와 유연대에 진을 친 경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달아나는 경군을 추적하여 다가산을 점령한 후 다시 남진하여 용머리고개를 가로질러 관군의 본영이 있는 곳까지 육박하였다. 그러나 관군으로부터 집중적인 대포공격을 받아 용장 김순명과 아기장수 이복용을 비롯하여 수 백 명의 전사자를 내고 성안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벌어진 완산전투에서 농민군은 전력상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외세의 거센 물결-청·일 전쟁과 갑오개혁
1894년 5월 청·일 양군이 조선에 주둔하자 농민군은 관군과 타협을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다음은 청·일 양군이 제나라로 각각 물러갈 차례였다. 그러나 전부터 조선점령을 꿈꾸어오던 일본은 오히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라고 강요하였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일본군은 6월 21일 궁궐을 강제 점령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임금을 감금한 뒤 민씨일파를 내쫓고 친일개화파정권을 내세웠다. 친일개화파들은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각종 개혁사업을 펴나갔다. 이를 갑오개혁(갑오경장)이라고 부르는데, 개혁안의 일부는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개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갑오개혁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개혁으로 평가되지만 일본의 간섭 아래 진행되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이 후퇴하는 한계도 지녔다. 한편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독차지하고자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두 나라의 전쟁터가 되는 비극을 맞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떠오르며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반면 청나라는 내분에 휩싸여 몰락해갔다.
다시 일어서는 농민군 / 삼례 2차기병(起兵)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 등 정국의 변화를 지켜보던 농민군 지도부는 9월에 삼례에서 재기병을 천명했다. 전봉준 등은 다시 기병하자는 격문을 각 지역의 농민군에게 보냈고, 이에 호응한 수만 명의 농민군이 삼례 뜰에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최시형의 지휘를 받는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도 합류하기로 하자 삼례에 모인 농민군은 본격적인 북상 길에 올랐다.
이때 전봉준 부대는 북상하고, 김개남 부대는 남원에 남아 대비하였으며 손화중 부대는 후방을 수비하는 총력전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에 맞추어 경상·강원·경기·황해도 등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함으로써 조선 전역은 농민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다.
공주로 진격하기에 앞서 농민군은 관리들도 항일전선에 동참하자는 호소문을 띄웠다. 그러나 친일개화파정권은 이를 외면했고, 일본군의 지휘 아래 들어간 관군은 농민군을 전라도 해안지방으로 몰아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이로써 조선의 미래를 결정지을 대회전(大會戰)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3F 기획전시실
개관 20주년 특별전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
전주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도시입니다. 2022년은 전주역사박물관이 개관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며 광복 7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주역사박물관에서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 특별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전라북도 총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호남평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해 우리나라 미곡 생산의 거점 지역이었습니다. 전라북도는 1899년 군산항 개항 이후 일제에 의한 경제 수탈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헐값에 토지를 대규모 매입 후 농장을 설립하여 경제적 수탈을 본격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수탈의 흔적을 1. 일제강점기, 전주의 흔적, 2. 기록으로 남겨진 농촌의 흔적, 3. 굴곡진 도심의 흔적의 주제로 살펴보고자 합니다...(이하생략) 따로 포스팅합니다.
2F 전주 문화예술실
문화예술을 꽃피운 풍류의 도시, 예향 전주
전주는 대사습놀이가 열렸던 소리의 고장이며, 선비 정신을 담은 서예와 문인화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전주는 가장 질 좋은 종이를 만들었던 한지의 본가로 전주부채는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전주는 또 완판본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경판본과 함께 출판문화를 주도했던 기록문화의 도시이다. 뿐만 아니라 전주는 풍부하고 다양한 식재료를 토대로 음식문화가 발전했던 맛의 고장이요 음식창의도시이다.
이처럼 전주는 소리·서화·한지·출판·음식 등의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맛과 멋의 예향藝鄕이요, 조선의 문화예술을 선도한 풍류의 도시이다.
최명희는 『혼불』에서 전주와 전라도를 ‘저항과 풍류’의 도시라고 하였다. 풍류란 문화예술을 선호하며 품격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주가 이렇게 문화예술이 발전한 것은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 전라도의 수부로서 풍부한 경제력과, 문화 예술을 아끼고 선호하는 전주와 전라도 사람들의 넉넉한 심성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전라감영이 소재했던 것에도 요인이 있다. 감영 소재지는 정치적 중심지이면서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전라감영은 특히 문화적 성격이 강했다.
조선 최고의 종이 전주한지_Jeonju Hanji, the best paper in Joseon
전주는 한지의 본가이다. 우리 종이, 한지는 기록용만이 아니라 일상 생활용품을 만드는 재료로 넓게 활용되었다. 한지의 주 생산지가 전라도이고 그 중심이 전주이다. 조선 초의 「경국대전」에 실린 지장 수를 보면, 전주와 남원이 각각 23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1900년에 발행한 러시아 측의 보고서 「한국지」에 의하면 종이가 한국에서 중국이나 일본보다 다방면에 걸쳐 널리 쓰이고 있고, 제지술만큼은 한국이 중국보다 앞섰으며, 가장 양질의 종이와 절대다수의 종이가 전라도에서 생산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 중심이 전주이다.
임금에게 올린 진상품 전주부채_Jeonju Fan, a tribute to the King of the Joseon dynasty
전주부채는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다. 전주지역은 양질의 종이 생산과 대나무 산지를 끼고 태극선, 합죽선 등 부채 제작이 일찍부터 발전하였다. 후백제 견훤이 고려 왕건에게 선사하였던 것도 공작선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이었다. 19세기 『동국세시기』와 18세기 『경도잡지』에 전주와 남평 부채가 최고라고 하였다.
전라감영에 선자청(扇子廳)을 설치하고 부채를 생산해 국왕에게 진상하였다. 전주고지도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선자청의 규모가 매우 크다. 그만큼 전주에서 많은 부채가 생산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조선시대 전라감사나 관리들이 선물하는 품목에 대표적인 것도 부채였다. 활쏘기 등의 대회를 치르고 상품으로도 부채를 수여하였다.
선비정신을 담은 서예와 문인화의 고장 전주
Jeonju, Home of Calligraphy and Literati Paintings permeated with the Spirit of Scholar
전주는 양반의 도시로 선비정신을 토대로 시서화를 겸비한 뛰어난 서화가들이 활동하였던 곳이다. 전주 출신 석계 최명룡1561~1621은 학자이자 서화가로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다. 창암 이삼만1770~1847은 조선후기 3대 명필로 전주 교동에서 태어나 말년에 공기골에서 살았다. 효산 이광열 1885~1966은 글씨와 문인화에 출중하였다.
한편 호남삼절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김제 출신 석정 이정직1841~1910은 한동안 전주에서 한약방을 하며 살았다. 김제 출신 벽하 조주승1854~1903, 설송 최규상 1891~1956, 강암 송성용1913~1999 등도 전주에서 활동하였다. 석전 황욱1898~1993은 고창 출신으로 전주에서 활동하였다. 화가 고암 이응로, 묵로 이용우 등은 타도출신으로 한때 전주에서 활동하였다.
맛의 고장, 음식창의도시 전주
Jeonju as the ‘Taste City’ and a UNESCO City of Gastronomy
전주·전북은 넓은 바다와 강과 들이 어우러진 지리적 특성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음식 재료를 바탕으로 음식문화가 발달하여 예부터 맛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곧 전주의 비빔밥, 콩나물국밥, 한정식 등이다. 전주 팔미는 파라시, 열무, 녹두묵, 서초, 애호박, 모자, 게, 무를 말하며, 여기에 콩나물과 미나리를 더하면 전주 10미가 된다.
한자속담사전에 ‘전주사불여全州四不如’라는 말이 있다. 전주의 특질을 말한 것으로 “벼슬아치가 아전만 못하고, 아전이 기생만 못하고, 기생이 소리만 못하고, 소리가 음식만 못하다”는 것이다. 즉 전주의 특질로 아전, 기생, 소리, 음식 네 가지를 들고, 그 중에서도 음식이 최고라는 말이다. 현재 전주는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지정되어 있다.
한글 음식방문_Food Recipes in Korean
조선후기 | 36x39.5cm
가양주, 장아찌 등을 만드는 방법을 한글로 써놓은 것으로 음식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귀명창의 동네 전주_Jeonju, the Town of Pansori singers and drummers
전주를 ‘소리의 고장’, ‘소리의 발상지’, ‘귀명창의 동네’라고들 한다. 그만큼 전주와 소리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전라도는 판소리의 산실이었으며, 그 중심지가 전주였다. 전주출신 권삼득1771~1841은 정조·순조대 8명창의 하나로 양반의 후예인 비가비로 이름이 높다. 판소리는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후기 전라감영 통인과 전주부영 통인들이 동짓날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잔치를 벌인 데서 비롯된 전주대사습놀이는 대표적인 소리문화유산이다. 통인은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의 심부름을 하는 이속들이다. 전주대사습놀이는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민속음악 경연대회로 1975년 부활되어 첫 대회가 열렸다. 제1회 대사습대회 판소리 부문에서 고故 오정숙 명창이 장원을 하였다.
완판본, 한글 고소설의 성지 전주
Jeonju as the mecca of Korean classic novels from Wanpan edition
전주에서 간행한 책을 한양의 경판본에 대비해 완판본이라고 한다. 완판의 ‘완’은 완산을 말한다. 조선시대 완산, 즉 전주는 한양과 함께 최고의 출판 도시였다. 「춘향전」을 비롯한 많은 한글 고소설과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많은 고문헌들이 전주에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감영이 그 지역 출판의 중심이었다. 현재 전라감영 책판 5,059판(도유형 문화재 204호)이 남아 있다. 타도와 달리 전라감영의 목판이 이렇게 많이 보존된 것은 전라감사 조한국趙漢國이 조선말 흩어져 있던 감영목판을 모아 전주향교에 보관토록 한 결과이다. 조한국 선정비가 완주군 상관 정여립유적지 일원에 서 있다.
효경 孝經_1475년 | 22×35cm | 완판본
전주에서 1475년(성종 6)에 판각한 책판으로 발간한 『효경』 책이다. 책의 제일 뒤쪽에 ‘성화 11년 을미1475년(성종 6) 5월 일 전주부 개판成化十一年乙未五月日 全州府 開板이라는 간 기가 있다.
전주 송광사 간행 ‘불조원류’ (全州 松廣寺 刊行 ‘佛祖原流’)_ 1759년 | 25cm×18cm
Buljowollyu, Printed at Songgwang Temple of Jeonju
간기(刊記) 전주종남산송광사관음전(全州終南山松廣寺觀音殿)
전라감영 간행 ‘두율분운’(杜律分韻)_경술년 | 33cm×22cm
간기(刊記) 완영신간(完營新刊)
소릉(少陵)의 오언시(五言詩) 626수와 칠언시(七言詩)151수를 뽑아 운목(韻目)에 따라 분류 한 책.
대봉전_1916년 | 25×18cm | 전주 다가서포 간행
전주 다가정 다가서포에서 간행한 방각본이다. 작자·연대미상의 한글 고전소설로 남성 주인공뿐만 아니라 여성 주인공의 활약을 두드러지게 나타냄으로써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를 비판하고 여성도 남성과 대등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의보감_조선후기 21.5×33cm(동의보감) | 완판본
전라감영에서 판각하여 출간한 동의보감이다. 간기에 갑술년 완영에서 중간하였다고 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허준이 1613년에 편찬한 의학서로, 2009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동의보감과 목판(上)_조선후기 | 58x25cm |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라감영에서 판각한 동의보감 목판이다.
전라감영 증수무원록 목판(下)_조선후기 | 58x25cm | 전북대학교 박물관
조선후기 시체 검시와 관련된 내용을 담은 무원록을 증수하여 만든 법의학 책의 목판이다.
완판본이 궁금하면? 아래 포스팅 URL 클릭시 이동
겨레 그림, 민화_Folk Painting as a Picture of the Korean people
민화는 병풍이나 벽장 등에 붙였던 서민적 그림이다. 일정한 본을 따라 반복적으로 그린 ‘뽄그림’으로, 떠돌이 무명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그래서 민화는 화공의 낙관이 없는 것이 많다. 이들 화가 중에는 화원 출신도 있다.
조선후기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런 그림을 ‘속화’라고 하였다. 민화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야나기 무네요시로 그는 민화를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라 정의했다.
민화의 특징은 실용성과 상징성이다. 집안을 장식하고 바람을 막아주는 등의 살림 세간이면서, 무병장수, 부귀다남, 부귀공명, 벽사(귀신을 물리침) 등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민화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민화는 무심하면서도 소박한 우리의 삶과 닮은 그림이다. 세련되었다기보다는 어딘지 부족하고, 약간은 어설픈듯하지만 그린 이의 마음과 소박한 꿈이 담겨 있는 해학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겨레 그림, 민화가 궁금하면? 아래 포스팅 URL 클릭시 이동
1F 교육체험실
전주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느낀 점을 간단하게 적어본다. 전주에 살면서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고, 전주지역의 역사에서 전주부채가 왜 유명했는지 알게 되었다. 전주는 종이 생산과 대나무 산지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최고의 종이가 전주 한지였으며 전라감영을 중심으로 완판본 한글 고소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싶다! 또한 최고의 종이가 생산되는 전주에서 시·서·화 및 소리 등 예술 분야가 자연스럽게 발달했던 것 같다! 지리적으로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인 호남은 물산이 풍부해서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나 다양하고 풍부한 음식 재료의 산지로 음식문화가 발달하여 전주는 멋과 맛의 고장이라 불렸다.
1층 교육체험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니 가족과 함께 전주역사박물관의 견학을 권장해 본다.
'전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_깨달은 수행자 나한 (27) | 2023.02.09 |
---|---|
전주(全州) 진북사(鎭北寺)와 풍수지리설 (12) | 2023.02.03 |
전주역사박물관_JEONJU HISTORICAL MUSEUM 1부 (23) | 2022.12.26 |
국립전주박물관 이집트 특별전_2부 (25) | 2022.12.20 |
국립전주박물관 이집트 특별전_1부 (20) | 2022.12.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