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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전주(全州) 진북사(鎭北寺)와 풍수지리설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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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사고사찰(四固寺刹)중 하나인 진북사(鎭北寺)를 2023.01.21.에 다녀온 사진으로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진북사(鎭北寺) 전경 2023.01.21.
진북사(鎭北寺) 전경 2023.01.21.

 

진북사(鎭北寺)

신라 말 도선(道詵 827∼898)이 호암산(虎巖山)에 창건한 천년사찰로 알려진다. 진북사는 1779년(정조 3)에 편찬된 『사찬읍지(私撰邑誌)』에, ‘진북사는 건허수(乾虛藪)에 자리하며, 부(府)의 북쪽으로 5리 지점에 있다. 지금은 폐(廢)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 후반 무렵에는 폐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9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남읍지湖南邑誌』의 전주부에도 등장한다. 도선이 창건 시 북고사(北固寺)라 했으나, 철종 7년(1856)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주성 북쪽을 보강*하기 위하여 이 절에 나무를 심고 절 이름을 진북사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1922년 김성근(金性根)이 중건하였다. 유연대 북쪽의 서쪽 끝 어은동에 있어 별칭으로 부엉바우절**로도 불린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대웅전(大雄殿), 적묵당(寂默堂), 미륵전(彌勒殿)_전설의 미륵불상이 있음, 산신각(山神閣)*** 등의 건물이 있다. 현재 전주시 진북동 어은터널과 서신교 사이에 위치하고 호암산(화산공원) 또는 엉골산 등산로에 있다.

 

*북쪽을 보강: 서기(瑞氣)가 북쪽으로 빠짐을 막고 북쪽에서 숨어 들어오는 재앙을 막고자 숲정이에 조림을 하고 북쪽에 진북사를 지어 서북방을 눌렀다.

**부엉바우: 부엉바우 또는 범바우라 불린다. 진북사 앞 벼랑에 있는 바위이다. 모양이 부엉이 또는 범 같다고 한다.

***산신각(山神閣): 조선 말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산신각이 가장 오랜 건물이며, 법당은 근래에 건립한 것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전주천서로 403-5

 
 

진북사(鎭北寺)의 입구
진북사(鎭北寺)의 입구

 
진북사(鎭北寺) 대한불교조계종
진북사(鎭北寺) 대한불교조계종

 

진북사 입구로 조금만 올라가면 오른쪽에 미륵전(彌勒殿)이 있다.

미륵전(彌勒殿) 우측면
미륵전(彌勒殿) 우측면

 

미륵전(彌勒殿) 정면
미륵전(彌勒殿) 정면

 

미륵전(彌勒殿) 현판
미륵전의 현판

 

미륵전 좌측면
미륵전 좌측면

 

미륵전의 달마대사와 동자승 벽화
미륵전의 달마대사와 동자승 벽화

 

 

진북사(鎭北寺)의 미륵불상 전설

미륵불상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1930년대에 절 인근에 사는 한 할머니가 꿈을 꾸었다. 꿈에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전주 천변에 내가 있는데 무척이나 괴로우니 나를 좀 편하게 해다오. 그러면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셨다. 다음 날 할머니는 진북사 아래의 강가에 가보니 음습하고 더러운 습지에 석조 미륵불이 넘어져 있었다. 꿈의 영험에 놀라며 우선 석불을 근처 암석 위에 세워 놓았다. 몇 년이 흐른 뒤 신도들이 진북사에 미륵전을 세우고 석불을 옮겨와 남향으로 모셨다. 그런데 그날 밤 일꾼의 꿈에 미륵부처님이 다시 나타나 답답하니 동쪽을 바라보도록 옮겨달라고 하였다. 일꾼이 대답하기를, “지금처럼 모시기도 너무 힘이 들었는데 다시 옮기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부처님이 다시 말하기를, “손만 대면 자연히 옮겨질 것이다.”고 하였다. 다음날 일꾼과 주지 스님이 미륵불을 모신 단에 손을 대자 저절로 동향으로 돌아앉았다고 한다. 이처럼 신비로운 인연을 지닌 미륵불은 지금도 그 기도의 영험이 매우 크다고 한다. [글출처: 모악산 금산사_말사안내_전주 진북사]

 

*미륵불상에 관한 전설: 민간에 구술전승(口述傳承)되는 이야기

진북사 석조미륵불상
진북사 석조미륵불상

 

현재 진북사 미륵불상의 자세한 내용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2016년 전주시 진북동 마을조사서에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북사 석불좌상(미륵불상)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희미하고 얼굴은 계란형이고 눈은 가느다랗게 표현되어 있다. 코가 얼굴의 중앙에 크고 오똑하게 서 있고 입은 코의 폭보다 작게 묘사되어 있다. 인중이 길며 턱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으로 귀는 얼굴의 크기에 비해 크며 장승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불상이다. 귓밥과 귓구멍이 표현되어 있으며 귀의 크기가 과장 없이 사실적이다.

 

어깨가 아주 좁고 다리부분까지 전체적으로 보면 길쭉한 삼각뿔의 형태를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오른쪽 손은 윤곽이 비교적 뚜렷하나 손은 거의 마멸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세 개의 손가락만 표현되어 있는데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이고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결과부좌를 하고 있는데 무릎과 발의 표현이 지극히 형식화 되어 있어서 어색한 느낌을 준다. 법의 뒷면에도 법의의 띠 매듭자락 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의복과는 별도로 다리와 무릎의 단이 표현되어 거의 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륵은 보통 입상의 모습이고 광배의 표현이 생략되어 익숙한 미륵의 형식을 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돌하루방이나 장승의 분위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호) 2022.07.08.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호) 2022.07.08.

 

*럭셔리크로우의 개인생각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호)과 진북사의 석조미륵불상을 보면 상체의 손 부분까지 많은 부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시대에 돌로 만든 불상으로 신체를 단순하게 표현하고 큰 돌을 사용하였다.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으로 목은 무척 짧게 표현되어서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이 간신히 배에 나타내었다. 도포자락 같은 옷은 특별한 무늬 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보면 진북사의 석조미륵불상은 고려 시대 불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신각(山神閣)
산신각(山神閣)
 
 

미륵전(彌勒殿)에서 절벽을 따라 올라가면 산신각(山神閣)이 나온다. 산신각은 진북사(鎭北寺)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절벽 위에 있는 산신각(山神閣)
절벽 위에 있는 산신각(山神閣)
 
 

산신각(山神閣) 좌측면
산신각(山神閣) 좌측면

 

산신각(山神閣) 정면
산신각(山神閣) 정면

 

산신각(山神閣) 현판
산신각(山神閣) 현판

 

산신각(山神閣) 우측면
산신각(山神閣) 우측면

 

본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본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미륵전(彌勒殿)과 산신각(山神閣)을 보고 본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지나면 좌측 끝으로 대웅전(大雄殿)과 바로앞으로 요사인 적묵당(寂默堂)이 있다.

대웅전(大雄殿) / 적묵당(寂默堂)
대웅전(大雄殿) / 적묵당(寂默堂)

 

진북사(鎭北寺)
진북사(鎭北寺)

 

적묵당(寂默堂)과 절벽의 산신각(山神閣)
적묵당(寂默堂)과 절벽의 산신각(山神閣)

 

적묵당(寂默堂) 현판
적묵당(寂默堂) 현판

 

진북사를 설명한 현광 최영식의 편액
진북사를 설명한 현광 최영식의 편액

 

진북사 (鎭北寺)_최영식 편액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동안 전주성을 지켜온 사찰

창건 당시에는 전주에 동고사 남고사 서고사 북고사 북쪽에 지어 북고사라고 부르다가 선조들 풍수지리설에 주산인 완산칠봉용두봉의 한자락인 동남 기슭 호암산 화산공원 북단 바위의 강한기를 받고 있는 진북사는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전주천을 바라보며 묵묵히 전주의 안녕을 지키며 경내에 숲정이 바람속에 다소곤이 서있는 미륵불의 품속에서 고요가 흐른다. 이천십칠년 신춘지절*  현광 최영식 짓고쓰다

*신춘지절(新春之節): 새 봄철에...라는 뜻

진북사(鎭北寺)의 옛 사진
진북사(鎭北寺)의 옛 사진

 

진북사(鎭北寺) 대웅전(大雄殿)
진북사(鎭北寺)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에는 진북사(鎭北寺) 편액과 함께 걸려있다.

대웅전(大雄殿) / 진북사(鎭北寺)
대웅전(大雄殿) / 진북사(鎭北寺)

 

대웅전(大雄殿) 현판
진북사(鎭北寺) 현판

 

현재 진북사(鎭北寺)의 현판은 용곡(龍谷) 조기동(曺基銅,1929~2019, 전남 화순군 북면 용곡리 태생)선생의 글씨로 남도 동국진체의 맥을 이었던 서예가입니다. 증심사, 금광사, 삼광사(부산)의 현판 및 주련 글씨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순조 때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절터를 보고 만년향화부절(萬年香火不絶)의 요지라 칭찬하고 그의 필치로 북고사 현판을 써서 걸었다고 하나 현재 북고사의 현판은 보이지 않습니다.

용곡 (龍谷) 조기동(曺基銅)선생의 현판
용곡 (龍谷) 조기동(曺基銅)선생의 현판

 

 

진북사(鎭北寺)를 둘러보고 호암산(虎巖山) 화산공원 등산로를 따라 진북사 위로 올라가 본다.

화산공원 등산로
화산공원 등산로

 

서신롯데 아파트
뒤로 서신롯데 아파트가 보인다.

 

 

진북사 언덕 위 정상에서 전주의 도심과 주변 산세를 보며 전주의 풍수지리설과 진북사와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진북사(鎭北寺)는 사고사찰(四固寺刹)*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로 진북사(鎭北寺)=북고사(北固寺)이다. 여기에서 북쪽의 산성이 나오지 않는다. 자료를 찾아보면 “명확하게 정 북쪽은 아니지만 북동쪽에 치우 쳐 현재 완주군 구억리의 구억리산성이 북고산성을 대체하였을 것으로 추정” 된다는 전주시 진북동 마을조사서의 내용을 확인하였다.

 

*사고사찰(四固寺刹): 四넉사사방(四方:동서남북)의 의미가 있고, 굳을 고를 써서 의미는 굳다, 단단하다, 방비, 수비 의미가 있어서 전주를 지키는 성과 의미가 깊다. 남고산성(남고산)에 남고사, 동고산성(승암산)에 동고사, 서고산성 또는 황방산성(황방산)에 서고사가 있다._[럭셔리크로우 각주]

진북사 언덕 위 정상에서
진북사 언덕 위 정상에서

 

사진 좌측아래 서신교가 보인다. / 다가동 방향
사진 좌측아래 서신교가 보인다. / 다가동 방향

 

 

전주의 비보풍수

온고을 전주는 노령산맥에서 뻗어 내린 기린봉승암산고덕산모악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사람 살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그런데 서북쪽이 열려 있어서이를 비보(裨補)*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다건지산과 가련산을 이은 덕진제방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숲정이북쪽을 누른다는 뜻을 지닌 진북사(鎭北寺) 등이 그것이다.

조선의 지리서들에는 주산이 건지산이라 기록되어 있지만원래는 기린봉이 주산이라는 설이 있다기린봉이야말로 기골이 장대하고 주산으로서 품격을 갖추고 있으며건지산은 주산으로서는 너무 약한데 기린봉에 왕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이 기를 누르기 위해 조선왕조는 일부러 주산을 건지산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정면이 현대맨션 아파트
정면이 현대맨션 아파트

 

전주는 북서쪽(건방乾方, 11시방향)이 공허하여 지기(地氣)가 빠져나갈 수 있고 재앙이 숨어들어 올 수 있다고 고려시대 도선국사(道詵國師) 및 조선시대 전주 관찰사 이서구(李書九 1755~1825) 가 예언 하여 비보(裨補)*를 하였다. 전주 지형의 풍수적 보완 실례를 보면 북쪽의 진산(鎭山)** 건지산乾止山으로 개명하고 승암산(화형산火形山)의 화기를 막고자 덕진방죽을 막고 제방을 쌓았다. 서기(瑞氣)***북쪽으로 빠짐을 막고 북쪽에서 숨어 들어오는 재앙을 막고자 숲정이에 조림을 하고 북쪽에 진북사를 지어 서북방을 눌렀다. 서부쪽에 위치한 황방산()을 황방산()으로 개명改名 하였으며, 또한 남쪽으로 빠지는 를 막고자 객사客舍 인공조산人工造山을 만들었다고 한다. 黃塝山(땅두둑 방)자를 (살살개 방)자로 바꿔서 黃尨山으로 고친 뜻은 공허空虛한 북쪽(건지乾止)을 누런 삽살개가 밤샘하여 짖으며 지키므로 재앙(災殃)을 막자는 뜻이 있다(황방폐월黃尨吠月****)고 한다.

*비보(裨補)우리나라의 풍수지리에 붙는 이야기로 지역의 풍수적 결함에 따라서 보완하는 의미로 쓰인다.
**진산(鎭山): 주산(主山)이라고도 한다.
***서기(瑞氣): 상서로운 기운
****황방폐월(黃尨吠月): 누런 삽살개가 밤샘하여 짖으며 지키므로 재앙(災殃)을 막는다.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며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며...

 

진북사(鎭北寺)와 풍수의 관계

신라 말 도선(道詵 827∼898)이 창건한 진북사는 이미 도선(道詵)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에 의해 지정되거나 건립된 비보사찰(裨補寺刹) 이었다.

도선에 의하면, 지기(地氣)는 왕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는데, 쇠퇴하는 곳에 자리잡은 인간이나 국가는 쇠망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에 인위적으로 사탑을 건립해서 지기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모든 사원은 비보(裨補)사원화 경향이 나타나서,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지정된 비보소(裨補所)가 3,800개소에 달했으며, 전국의 유명사찰이 거의 다 망라되고 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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