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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李芳幹) 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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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

 

문화재 설명

회안대군묘는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에 위치한다. 묘의 형태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형태와 달리, 태인의 정극인 묘처럼 부부묘가 세로로 되어 있는데, 아래의 묘가 부인의 묘이며, 위의 묘가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이다. 이 묘자리가 군왕지지(君王之地)라 하여 지기가 흐르는 곳에 뜸을 떠버렸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지금도 뜸을 뜬 자리가 남아 있다.

 

회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아들로 그 동생 태종 방원과 함께 자웅을 겨루었던 조선초 인물이다. 방간은 방원에게 패배함으로써 평생 유배의 길을 걸었는데, 그는 박포와 달리 죽음은 면했지만 태종의 끝없는 견제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유배지를 옮겨 다녔다.

 

이방간은 조선초 정치사의 한 주역일 뿐만 아니라, 전주 지역사와 관련 관련해서도 주목된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역사문화적 특질과 유산을 지니고 있다. [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_회안대군묘]

회안대군 재실(齋室)

 

재실(齋室) 광감재(曠感齋)

 

 

광감재(曠感齋) 답게 석등이 양쪽에 있다. 광감재의 광(曠: 밝을) 자다.

쌍사자 석등(雙獅子 石燈)

 

 

거북이 석등

 

 

광감재(曠感齋) 현판

 

 

7층 석탑과 우측의 작은 석등

 

 

재실 우측으로 자리 잡고 있는 비석 군

중앙의 비가 광감재중건기념비(曠感齋重建紀念碑) 이다.

 

광감재중건기념비(曠感齋重建紀念碑) 우측으로 오래된 듯한 비석 2기가 서 있다.

 

 

우측으로 조금 더 가면 회안대군신도비(懷安大君神道碑) 비각이 있다.

비각 좌우로 석등이 있다.

 

비각은 열쇠로 잠겨 있다. 사진을 찍기 힘들었지만...찍었다.

회안대군신도비(懷安大君神道碑)

 

비각의 윗부분

 

비각과 석등

 

 

회안대군신도비(懷安大君神道碑)를 보고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가 나온다.

회안대군묘 유형문화재 제123호

 

회안대군묘 안내판

 

회안대군묘 懷安大君墓

전라북도 기념물 제123호

Jeollabuk-do Monument No. 123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李芳幹) 묘이다. 이방간의 호는 망우당(忘牛堂) 이고,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1년1392 회안군에 봉해졌다. 1398년에 동생 이방원과 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하여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었다. 정종 2년1400에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토산, 익산, 전주, 홍성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 중인 태종 1년1401 회안대군에 봉해졌다.

회안대군묘는 금상동 법사산의 남쪽 끝자락에 부인 김포금씨(金浦琴氏) 묘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특이하게 묘가 위아래 세로로 조성되어 있는데 위가 회안대군의 묘이고 아래가 부인의 묘이다. 이 터는 군왕이 나올 명당*으로 여겨져 뜸을 떠서 땅의 기운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도 산허리에 파놓은 구멍들이 남아 있어 사람들은 ‘뜸터’ 라고 부른다.

*군왕이 나올 명당: 군왕지지(君王之地)

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

 

(좌측)망주석-문인석-동자석-석양 순서로 보이고 있다.

 

 

(우측)망주석-문인석-동자석-석양-회안대군 묘비가 보인다.

 

 

좌우망주석-문인석-동자석-석양* 순서대로 각각의 사진을 살펴 보겠습니다.

*망주석(望柱石):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으로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회안대군 좌우 망주석에는 다람쥐를 새겼다.

*문인석(文人石):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능묘를 수호하는 석인상이다.

*동자석(童子石): 동자석은 죽은 자의 영역을 알리는 야트막한 산담 안 무덤 앞에 두 손 모으고 서 있는 어린아이 모습을 한 석상(石像)이다.

*석양(石羊): 양은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석전대제)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희생 제물이었다. 우리나라 무덤에 동물 조각상을 세우는 전통은 남북국시대(698~926C.E.)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안대군 묘비

 

묘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朝鮮開國翊贊功臣顯禄大夫懐安大君 / 贈謚良僖公諱芳幹之墓 / 金陵府夫人琴氏墓祔下

조선개국 익찬공신 현록대부 회안대군 / 증시 양희공 휘 방간지묘 / 금릉부 부인금씨 묘부하

좌측면에서... 앞이 부인금씨의 묘

 

우측면에서...뒤가 회안대군의 묘

 

도로에서 본 회안대군 묘와 장명등(長明燈)

 

 

분묘 앞의 장명등(長明燈)을 일명 석등룡(石燈龍) 혹은 석등(石燈)이라고도 한다.

장명등(長明燈)

 

 

장명등(長明燈)

분묘 앞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돌로 만들어 세운 네모진 등.

장명등(長明燈)의 조각

 

 

비단 분묘뿐만 아니라 사찰이나 관가 등의 공공 건축물의 처마 끝에 달거나 마당에 기둥을 세워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장치한 등도 장명등이라고 한다. 분묘 앞의 장명등을 일명 석등룡(石燈龍) 혹은 석등(石燈)이라고도 한다.

 

분묘 앞에 장명등을 세우게 된 시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분묘제도에 의하면, 분묘 앞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나 문무신상(文武神像) 등의 석조물을 세우는 데는 피장자의 신분 혹은 품계를 기준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였고, 장명등의 경우는 일품재상(一品宰相)에 한하여 세울 수 있도록 한정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와 같은 묘제가 확립된 시기부터 장명등이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덤 앞이나 사찰의 경내에 세워진 장명등은 받침대와 몸체 부분·지붕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대는 대부분 8각형 기둥 모양이며, 이 위에 등을 넣을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든 부분이 얹혀 있고, 몸체 부분 위에는 마치 정자의 지붕처럼 생긴 삿갓지붕을 조각하여 몸체 부분을 보호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 세 부분은 분리하여 축조한 경우도 있고, 하나로 연결하여 조각한 경우도 있다.

장명등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묘역이나 건물의 외부공간을 밝히는 데 있으나, 분묘의 장명등은 이외에도 피장자의 조선시대의 신분을 표상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와 같은 엄격한 분묘제도가 없는 현대에서도 호화 분묘의 경우 장명등을 비롯한 각종의 석조물을 세운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피장자의 신분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후손의 효행이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계층을 반영할 의도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장명등]

회안대군묘를 보고 내려와 우측 길로 들어서면 나오는 비석이다.

 

위토답만평개답조성비(位土畓萬坪開畓造成碑): 대충 보니 논과 밭 수만평을 조성했다는 뜻인데,....혹시 몰라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오늘 이 비석이 세워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좀 길다...그래도 공부할 겸...회안대군에 대해 더 알아보자!~

2023.02.12. 봄 매화

 

회안대군 [1364(공민왕 13)∼1420(세종 2)]은 태조고황제의 제4남으로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안변한씨(安邊韓氏)의 소생이다. 1364년 7월 2일, 함흥 귀주동(歸州洞)에서 태어났다. 방간(芳幹)이요 망우당(忘牛堂)이며 시호양희(良僖)이다.

 

배위는 여흥민씨 · 밀양황씨 · 김포금씨이다. 여흥민씨는 의령군(義寧君) 맹중(孟衆)을 두었으며 밀양황씨는 창녕군(昌寧君) 태(泰)와 딸 둘을 두었다. 또 김포금씨는 금성군(金城君) 선(善)과 금산군(金山君) 중군(仲窘) 두 아들을 두었으니 슬하에 모두 4남 2녀가 있었다. 고려 때 벼슬이 소윤(少尹)에 이르렀고, 태조고황제가 개국할 때의 공으로 회안대군 익찬공신(翊贊功臣) 마한공(馬韓公)으로 봉해져 <제훈록(諸勳錄)>에 등재되었다. 공은 평소 태조 고황제를 효성으로 받들었고 우애와 공경으로 형제를 대하였다.

 

정종대왕에게는 적사가 없어 차례에 따라 태조고황제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이 왕위 계승권자로 올랐으나 개국 · 정사(定社)에 공이 컸던 다섯째 아들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芳遠)이 더 유력하였다.

 

이때 박포[朴苞 : ?∼1400(정종 2)]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있었는데 일찍이 1398년 '정도전의 난' 때에 “정도전 등이 정안대군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는 데 공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공이 높지 않았음을 불평하다가 죽주(竹州 : 현 충북 영동)로 귀양갔었다.

 

이같이 직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이번에는 “정안대군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회안대군에게 거짓으로 충동질하여 회안대군은 병사를 이끌고 개경에서 교전, 정안대군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평소에 활을 잘 쏘던 회안대군의 장남 의령군 맹중마저도 병석에 눕게 되었고, 박포는 선동한 죄가 무겁다 하여 참수되었다.

회안대군신도비(懷安大君神道碑) 비각

 

태종대왕은 회안대군에게 여러 차례 은교(恩敎)를 베풀었으나 신하들의 쟁론으로 인하여 황해도 토산현(兎山縣)에 정배되니 이는 한양에서 가까운 곳으로, 태종대왕의 뜻이 먼 곳에 보내지 않으려 함이었다.

 

그 후 자원하여 성향(姓鄕)인 전주 북쪽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鳳東邑) 구만리(九萬里) 천내(川內) 부락에서 은거하다가 태조대왕이 승하하였을 때 복상(服喪)하지 못하였음을 애통하게 여겨 다시는 한강(漢江)을 건너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으며 자손들에게도 전주에 살도록 유언하였다.

 

이처럼 회안대군은 전주에 머물러 살기 원했으나 형님에 대한 정분이 남다른 태종대왕은 특사를 보내어 상경케 함으로써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1420년(세종 2) 3월 9일 향년 57세로 충남 은진(恩津)에서 생을 마쳤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들은 태종대왕은 슬퍼한 나머지 음식을 멀리하고 조정의 회의와 장터를 3일간 정휴케 했다. 아울러 대군의 봉작을 복원시키고 곡식과 면직물을 후히 내렸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의와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지사(地師) 세 명을 파견, 전주 동쪽 완주군 용진면 금상리(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법사산(法史山) 을좌원(乙坐原)에 예장하니 그곳이 대군의 만년 유택이 되었다.

왔던 길로 돌아가며...

 

1607년(선조 40) 봄에 적순부위(迪順副尉)가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드니 묘호(廟號)를 숭덕사(崇德祠)라 하였다. 부부인(府夫人) 3위를 봉안하고 특명으로 사시제(四時祭)를 행하였다. 1863년(고종 6)에 예신(禮臣)을 보내어 부조지전으로 제향을 봉행하였다.

 

1972년부터 회안대군파종회장 종구(鍾龜)는 1987년에 광감재(曠感齋)와 선산 구릉지에 위토답 1만여 평을 개간 착공, 위토답은 당년에 개간 영농하였고 광감재 재실 중건공사는 1992년에 준공하였다. [글 출처: 전주이씨대동종약원_회안대군파 약사]

 

*부조지전(不祧之典):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셔 제사 지내게 하던 특전.

해질녘 금상동의 보건소가 빛나고 있었다.

 

결론...위토답만평개답조성비(位土畓萬坪開畓造成碑)는 "....1987년에 광감재(曠感齋)와 선산 구릉지에 위토답 1만여 평을 개간 착공, 위토답은 당년에 개간 영농하였고..." 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다시 전주의 역사를 공부하는 "전주 럭셔리크로우" 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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