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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 아들 순서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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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의 태조어진(국보 제 317호) / 2021.08.16

 

태조(太祖) / 조선전기 제1대(재위: 1392~1398) 왕.

자: 중결(仲潔), 군진(君晋)
호: 송헌(松軒), 송헌거사(松軒居士)
시호: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초명: 이성계(李成桂)
개명: 이단(李旦)
출생연도: 1335년(충숙왕 복위 4) 10월 11일

전주 경기전 정전의 태조 어진 / 2021.08.16

 
 

내용 요약

태조는 조선전기 제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392~1398년이다. 이름은 이성계이며 고려말 홍건적·왜구 등의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해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했다. 신진사대부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신흥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기반을 닦아 공양왕을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 즉위했다.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천도하여 새 시대를 열었으나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의 싸움에 실망하여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글 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오늘은 이성계(李成桂)의 아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생각으로... 태조(太祖)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왕후와 왕자, 공주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왕비(후궁 제외)

1. 정비: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

시호: 절비(節妃)
출생연도: 1337(충숙왕 6)
사망연도: 1391(공양왕 3)
본관은 안변(安邊). 증문하시랑찬성사(贈門下侍郎贊成事) 한유(韓裕)의 증손이고, 증문하좌정승(贈門下左政丞) 한규인(韓珪仁)의 손녀이며, 증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이다.
 
1405(태종 5)에 세운 제릉(齊陵)의 비문에 따르면, 신의왕후는 천자(天資)가 현숙하고 아름다우며 곤덕(坤德)이 유순하고 발라서[] 일찍이 용연(龍淵)에 빈()이 되어 왕업을 도와 이루게 했으며, 성철(聖哲)을 낳아서 대통을 끝없이 전하니 신이한 공과 아름다운 의범(儀範)이 옛사람과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소생으로는 정종·태종을 비롯하여, 이방우(李芳雨이방의(李芳毅이방간(李芳幹이방연(李芳衍) 등의 6남과 경신(慶愼경선(慶善) 등 두 공주가 있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신의왕후]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의 자녀

첫째 아들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

둘째 아들 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 / 정종(定宗) / 조선 제2대(재위:1398~1400) 왕.
세째 아들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네째 아들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다섯째 아들 정안공(靖安公) 이방원(李芳遠) / 태종(太宗) / 조선 제3대(재위:1400~1418) 왕.
여섯째 아들 덕안대군(德安大君) 이방연(李芳衍)
일곱째 딸 경신공주(慶愼公主)-조선 태조의 첫째 딸 ?~1426년(세종 8)
여덟째 딸 경선공주(慶善公主)-조선 태조의 둘째 딸 ?~1446(세종 28년) 이후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380년 이성계가 황산에 본진을 두고 중군 마을에 중군을 두었다.

 

2. 계비: 신덕왕후강씨(神德王后康氏)

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신천(信川).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신덕왕후는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왕비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396년(태조 5)에 사망했다. 신덕왕후의 친정 강씨 가문은 고려말의 권문세족으로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 개국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방석의 친모로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방원(태종)과 갈등하다가 화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존호와 능호를 신덕과 정릉으로 정하고 원찰 흥천사를 세워 태상왕이 직접 원당 제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태상왕 사후 태종이 능을 옮기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669년(현종 10)에야 신주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능호는 정릉으로 서울 성북구에 있다.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고, 능호는 정릉(貞陵)으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소생으로 왕자 이방번(李芳蕃) · 이방석(李芳碩)과 경순공주(敬順公主)를 두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신덕왕후]
 

신덕왕후강씨(神德王后康氏)의 자녀

첫째 아들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
둘째 아들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
세째 딸 경순공주(慶順公主)

남원 황산대첩비지

 

위에서 태조(太祖)의 자녀들을 나열해봤습니다. 아들을 우선하지 않고,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의 두 공주님과 신덕왕후강씨(神德王后康氏)의 공주 그리고 왕자 순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경신공주(慶愼公主)-조선 태조의 첫째 딸인 공주. ?~1426년(세종 8)

경신공주(慶愼公主)는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청주이씨 이애(李薆, 1363∼1414)와 혼인을 하였으며, 슬하에 아들 이후(李厚)를 두었다. 1426년(세종 8)에 사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 우왕대 이성계가 요동 공격을 위해 출전하자, 최영은 그의 가족들을 볼모로 잡으려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자, 이방원은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에 있던 신의왕후와 포천 철현(鐵峴)에 있던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동북면으로 피난시켰다. 경신공주는 이때 동생 경선공주(慶善公主)와 함께 재벽동에 있다가 오빠 이방원의 보살핌으로 어머니 신의왕후와 함께 동북면으로 피난을 갔다. 이방원이 이때 두 어머니와 경신·경선 공주뿐만 아니라 이방번·이방석 등 어린 동생들을 피난시켰다는 것으로 보아 경신공주는 태조의 5남 이방원의 동생으로 여겨진다.
남편 이애는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이거이(李居易)의 아들이다. 원래 이름은 이백경(李伯卿)이었다가 이저(李佇)로 개명한 후 다시 이애로 바꾸었다. 이애는 1398년(태조 7) 이거이와 함께 이방원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상당후(上黨侯)로 봉작되었다. 그리고 1401년(태종 1) 2차 왕자의 난, 곧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이애의 집안은 공신 가문이면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애의 동생 이백강(李伯剛)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가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1426년(세종 8) 경신공주가 사망하자, 세종은 내관을 보내 조문하도록 하고 제문을 지어 내렸다. 또한 쌀과 콩 각 50석과 종이 2백권을 부조하고, 상등(上等)의 예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에 있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경신공주]
 

경선공주(慶善公主) / 조선 태조의 둘째 딸인 공주. ?~1446(세종 28년) 이후

출생 및 혼인 생활
태조와 신의왕후의 6남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하기 전 요동 공격에 나선 장수들의 가족을 볼모로 잡을 때 태조가 직접 어린 나이의 경신공주(慶善公主)를 언니 경선공주(慶善公主)와 무안군(撫安君), 소도군(昭悼君)과 함께 말에 태우고, 말을 끌며 피신시켰다고 전해진다.[『태조실록』 총서 89번째기사] 1393년(태조 2) 심덕부(沈德符)의 아들 심종을 경선공주의 부마로 삼고, 청원군에 봉했다.(『태조실록』 2년 10월 10일),(『태조실록』 2년 10월 17일) 그는 <제 1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이 되었으나, <제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중도를 지켰다.(『태조실록』 7년 8월 26일),(『태조실록』 7년 9월 17일) 그러나 이후 회안대군(懷安大君)이방간(李芳幹)과 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직첩과 공신 녹권이 회수되고 폐서인이 되었으며, 이후 귀양을 갔다 세상을 떠났다.(『태종실록』 16년 11월 22일),(『태종실록』 18년 3월 15일) 한편 경신공주의 부마 심종의 형은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 심온(沈溫)이었다. 즉 경신공주는 세종의 고모이자, 소헌왕후의 숙모였던 것이다. [글 인용: 위키 실록사전]
 

 
경순공주(慶順公主) / 조선 태조의 셋째 딸인 공주. ?~1407(태종 7)

본관은 전주(全州). 태조의 셋째 딸로, 어머니가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이다.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과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의 동복 누이이다. 개국공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인 이제와 두 남동생 이방번과 이방석이 이방원(李芳遠: 뒤에 태종)에 의해 죽게 되자, 다음 해 태조가 친히 경순공주로 하여금 여승이 되게 하였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경순공주]

남원 어휘각(御諱閣)

 

이성계(李成桂) 아들 순서

진안대군(鎭安大君) /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첫째 아들인 왕자.

시호: 경효(敬孝)
이칭: 이방우
출생연도: 1354년(공민왕 3)
사망연도: 1393년(태조 2)
본관: 전주(全州)
주요관직: 밀직부사
 
이름은 방우(芳雨). 전주이씨 진안대군파의 시조이다. 태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부인은 찬성사 지윤(池奫)의 딸이다. 정종과 태종의 동모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부터 벼슬에 나아가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 11월에서 1389년 3월까지 밀직부사로서 정사(正使)인 밀직사 강회백(姜淮伯)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창왕의 친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진안군(鎭安君)으로 책봉되고, 함경도 고원의 전답을 녹전(祿田)으로 받았다. 1418년에 진한정효공(辰韓定孝公)에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복근(福根)과 원윤(元尹) 덕근(德根)이 있다.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  /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둘째 아들인 왕자.
정종(定宗) / 조선전기 제2대(재위:1398~1400) 왕.

자: 광원(光遠)
시호: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
이칭: 이방과
출생연도: 1357년(공민왕 6)
사망연도: 1419년(세종 1)
본관: 전주(全州)
주요관직: 밀직부사(密直副使)|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삼사우사(三司右使)
 
내용 요약
정종은 조선전기 제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398~1400년이다. 고려말에 부친 이성계와 함께 왜구의 침략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고, 조선건국 후에는 병권에 관여했다. 제1차 왕자의 난 후 세자 책봉 때 완강히 거절했으나 이방원의 양보로 세자에 책봉되고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399년 개경으로 천도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다. 사병 혁파, 정무와 군정을 분리하는 행정개혁, 노비변정도감을 설치 등의 업적이 있다. 왕위를 태종에게 선양한 후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수를 다했다.
 
개설
재위 1398∼140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경(曔)이고, 초명은 방과(芳果)이다. 자는 광원(光遠)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 증문하좌시중월성부원군(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행실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해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88년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였다. 1389년(창왕 1) 7월 절제사(節制使)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1390년 1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추충여절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그 해 6월 자혜윤(慈惠尹)으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격파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고, 이듬 해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로 개수(改授)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 책봉문제가 제기되었다. 방과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이 양보해 세자가 되었다.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반강제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했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따라 전개되었다.
 
1399년(정종 1) 3월 개경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였다. 이로써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해 권귀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1400년 2월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 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騎常侍) 김약채(金若采) 등의 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 · 정 분리체제를 이뤘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해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그 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다. 11월에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였다.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해 노비 변정을 기도하였다. 재위 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으로 삼았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 · 사냥 · 온천 · 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처음에는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었으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으로 개시되었다. 묘호(廟號)는 정종(定宗)이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익안대군(益安大君) /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셋째 아들인 왕자.

시호: 안양(安襄)
이칭: 이방의(李芳毅), 익안군(益安君)
출생연도: 미상
사망연도: 1404년(태종 4)
주요관직: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관련사건: 정도전의 난 | 방간의 난
 
개설
이름은 방의(芳毅). 태조의 셋째아들이고,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의 소생으로, 이방과(李芳果: 뒤의 정종)의 아우이며, 이방원(李芳遠: 뒤의 태종)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익안군(益安君)에 봉해지고, 1398년(태조 7) 12월에 이방원·이방간(李芳幹)과 더불어 개국공신 1등에 추록(追錄)되어 200결의 공신전을 받았다.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방원을 보좌하여 이해 9월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지고 200결의 공신전을 이미 받았으며, 그 달에 익안공으로서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가 되었다. 이 때 이방간은 좌군절제사, 이방과는 우군절제사가 되어 정도전일파가 장악했던 병군을 회수하여 세 왕자가 병권을 분장하였다. 1399년(정종 1)에 종친과 훈신(勳臣)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의 군사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방원은 강원도와 동북면을,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이방간은 풍해도와 서북면의 병권을 각각 관장하였다. 1400년 2월에 방간·박포(朴苞)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이방간의 모반을 개탄하면서 절제사직을 사임하여 이방원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태종이 즉위하자 대군이 되었으며, 그 뒤 병으로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왕자 가운데에서 가장 야심이 적어 아우 이방간과 이방원의 왕위계승 싸움에 중립을 지키고, 평소에 시사(時事)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주 오목대(梧木臺)

 

회안대군(懷安大君) /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넷째 아들인 왕자.

시호: 양희良僖
이칭: 이방간
출생연도: 미상
사망연도: 1421년(세종 3)
본관: 전주(全州)
주요관직: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개설
이름은 이방간(李芳幹).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첫째부인은 판서 민선(閔璿)의 딸이고, 둘째부인은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며, 셋째부인은 정랑 금인배(琴仁排)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왕조에 벼슬해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회안군(懷安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1398년 회안공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유배 중인 1401년(태종 1) 회안대군이 되었다. 1398년(정종 즉위년) 8월에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에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을 도와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그 뒤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었고, 1399년 풍해도(豊海道)와 서북면의 병사를 분령하였다. 이듬해 지중추부사 박포(朴苞)의 이간에 회유되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면서 토산(兎山: 지금의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되었다.
 
1400년 2월에 3성의 장무(掌務)가 “방간이 사사로이 군대를 일으켜 골육을 해하려고 했을 때 왕께서 처음에는 도승지를 보내시어 동병하지 말 것을 명했으나 듣지 않고, 군대를 발했으니 대법으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면서 치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종과 이방원의 관용으로 죄가 더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배된 토산이 전일에 군사를 분령한 곳이기 때문에 후일의 염려가 있다 해서 안산으로 이치(移置)되었을 뿐, 전지(田地)와 식읍을 받았으며 매년 초하룻날에는 한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1400년 9월에는 문하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익주(益州)로 이치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관용을 받아, 이듬해 5월에는 태종이 보낸 의원으로부터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서울로의 소환까지 논의되었다. 1402년에는 대간으로부터 전렵으로 일을 삼는 등 뉘우침이 없으니 경계와 보전을 위해 제주로 이치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순천성(順天城)에 이치되는 것으로 그쳤다. 1404년 왜구의 화를 피해 익주로 다시 옮겨졌고, 1410년 8월에는 완산(完山)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416년 형조·대간의 집요한 청죄로, 아들 이맹중(李孟衆)과 함께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1417년 홍주(洪州: 현재 홍성)로 이치되었다. 세종 치세 때에도 누차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상왕과 세종의 관용을 받았다. 1419년 노비 100구만 속공(屬公)되었을 뿐 천명(天命)을 누리다가 홍주에서 죽었다. 오랫동안 『선원록(璿源錄)』에서 제외되다가 1605년(선조 38) 선원록교정청(璿源錄校正廳)의 계(啓)를 계기로 신설(伸雪)이 논의되었다. 그 뒤 1680년(숙종 6) 선원록이정청(璿源錄釐正廳)의 계품(啓稟)에 따라 그 자손과 함께 『선원록』에 재록(載錄)되면서 신설되었다.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주 금상동 회안대군묘(뒤)와 부인금씨의 묘(앞)

 
 

정안공(靖安公) 이방원(李芳遠) /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왕자.
태종(太宗) / 조선전기 제3대(재위:1400~1418) 왕.

자: 유덕(遺德)
시호: 성덕신공문무광효(聖德神攻文武光孝), 예철성렬(睿哲成烈), 공정(恭定)
성명: 이방원
출생연도: 1367년(공민왕 16)
사망연도: 1422년(세종 4)
본관: 전주(全州)
 
내용요약
태종은 조선전기 제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00~1418년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조선 건국과정에서 결정적인 고비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선 인물이다. 건국 후 신진개혁세력과 갈등을 겪었지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여 국권을 장악하고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육조를 직접 관할하면서 왕 중심의 정치를 펼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공신과 외척을 무더기로 제거했다. 광범위한 분야의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 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능호는 헌릉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다.
 
개설
재위 1400∼141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방원(芳遠)이다.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한때 원천석(元天錫)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 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을 요청하는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를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는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이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하고 이성계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이 때 이방원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을 시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 해 정도전 등과 공작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였다. 왕대비(王大妃: 공민왕 비 안씨)에게 압력을 넣어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정안군(靖安君)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강비(康妃: 태조의 계비) ·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 책봉에서도 탈락하였다. 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요청하자 남경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생흔(生釁) · 모만(侮慢) 문제에서 비롯된 입명문제 등을 해결하였다.
 
즉위 과정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요동 정벌계획을 적극 추진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 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처지에 이른다. 이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써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여러 사정을 감안해 세자 추대를 사양하였다. 단지 정안공(靖安公)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定社功臣)을 논의 결정하여 1등이 되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가로 올랐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고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덕안대군(德安大君) /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여섯째 아들인 왕자.

출생연도: 미상
사망연도: 미상
본관: 전주(全州)
주요관직: 성균관박사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방연(李芳衍). 태조의 여섯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85년(우왕 11) 사마시에 진사로 합격하여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원윤(元尹)에 봉하여졌으나 혼인하기 전에 일찍 죽었다. 1872년(고종 9) 대군으로 추봉되고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1900년 태조의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의 16대손인 이정효(李貞孝)에게 명하여 덕안대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주 자만동의 이목대(梨木臺)

 

무안대군 (撫安大君) /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왕자.

이칭: 이방번(李芳蕃)
출생연도: 1381년(우왕 7)
사망연도: 1398년(태조 7)
본관: 전주(全州)
내용 요약
무안대군은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왕자이다. 1381년(우왕 7)에 태어나 1398년(태조 7)에 사망했다. 이름은 이방번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태조와 강비의 사랑을 받아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배극렴·조준·정도전 등이 반대하여 세자 자리를 이방석에게 빼앗겼다. 1398년 8월 이방석의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장악에 반대하여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 6) 공순군의 시호를 받았고, 1680년(숙종 6) 김수환 등의 진언으로 무안대군으로 추증되었다.
 
개설
이름은 이방번(李芳蕃).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부인은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정양대군(定陽大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성계(李成桂)의 공로로 어려서 고려로부터 고공좌랑(考功佐郎)에 제수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8월 무안군에 책봉되면서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고, 1393년 10월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로 개수되었다. 태조와 강비의 사랑을 받아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배극렴(裵克廉) ·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 등이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하여 세자 자리를 동모제(同母第) 이방석(李芳碩)에게 빼앗겼다.
 
1398년 8월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이 이방석의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장악에 반대하여 주동한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 때 세자 이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 6) 8월 공순군(恭順君)의 시호를 받았다. 1437년(세종 19) 6월 세종의 배려로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를 후사(後嗣)로 정하면서 입묘봉사(立廟奉祀)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추성(楸城)을 증읍(贈邑)받고 사우(祀宇)가 건립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문종의 시호를 피하여 장혜(章惠)로 개시(改諡)되었다. 1680년(숙종 6) 7월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김수환(金壽桓) 등이 “이방번 · 이방석은 신덕왕후의 부묘(祔廟) 후주1 법으로써 마땅히 대군으로 증작(贈爵)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빠뜨렸으니 진실로 법에 어그러진다.”라고 상언하여 무안대군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처음에 도진릉동(道津陵洞)에 소재했으나, 그 뒤 광주(廣州) 학당리산(學堂里山)으로 이장되었다. 1474년(성종 5)에 그 지역이 성종의 능침(陵寢)으로 결정되자 다시 광주(廣州) 광수산(光秀山)으로 이장되었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주 어진박물관의 태조어진 / 2021.08.16

 
 
의안대군(宜安大君) /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왕자.

시호: 소도(昭悼)
이칭: 이방석(李芳碩)
출생연도: 1382년(우왕 8)
사망연도: 1398년(태조 7)
본관: 전주(全州)
관련사건: 제1차 왕자의 난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방석(李芳碩). 태조의 제8왕자로,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며, 이복형이 태종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초취(初娶)는 현빈 유씨(賢嬪柳氏)로 1393년(태조 2) 6월에 폐출되었다. 재취(再娶)는 부유 심씨(富有沈氏) 예문춘추관대제학 심효생(沈孝生)의 딸로 1394년 10월에 세자빈으로 삼았다가 1397년 9월에 현빈으로 봉해졌으며, 1398년 8월에 길례를 올렸다. 아버지 이성계(李成桂)의 공훈으로 유년에 고려로부터 군기녹사(軍器錄事)에 제수되었다. 1392년(태조 1) 8월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비 한씨(韓氏) 소생의 정안군 이방원(靜安君 李芳遠)의 책립을 주장하였다.
이 때 왕비 한씨는 이미 죽었으므로 태조는 계비 강씨의 의향을 중히 여겨, 제7왕자인 무안군 이방번(撫安君 李芳蕃)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극렴·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이 굳이 강씨의 소생으로 세자를 삼으려면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솔한 이방번보다는 이방석으로 삼자고 청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모후의 보살핌과 정도전·남은(南誾) 등의 보도로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혔으나, 1396년 8월에 강비가 죽으면서 세자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1398년 8월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집중에 반대한 이방원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남은·심효생 및 이방번과 함께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 6) 8월 소도(昭悼)의 시호를 받았다. 1437년(세종 19) 6월 세종의 배려로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를 후사로 정하면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오원(五原)을 증읍(贈邑)받고 사우(祠宇)가 건립되었다. 1680년(숙종 6) 7월 영춘추관사 김수항(金壽恒) 등의 상언에 따라 의안대군으로 추봉되었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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