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6일, 변산국립공원 여행 중 방문했던 개암사, 내소사, 부안청자박물관, 그리고 반계 유형원 유적지의 사진들을 담았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반계 유형원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마을 입구에 주차를 하고 조금 들어와서 갈림길에 만나는 반계 서당으로 가는 이정표입니다. 류형원은 32세(1653년) 때 부안 우동리(우반동)로 이사 와 52세(1673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조금 올라오면 우측에 실사구시(實事求是) 비석이 있습니다. 실사구시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 강조된 학문적 태도로, 기존의 형식적인 학문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증거와 경험을 중시했습니다.

산 길에 이정표입니다. 여기부터 나무데크 길이 있습니다. 류형원이 부안에 살면서 쓴 대표적인 책으로는 '반계수록', '대동여지지' 등이 있습니다.

실학에 대한 정보가 나와있어 잠시 공부해 봅니다.

실학은
“모든 사람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하여 성리학(性理學)의 경직성과 관념성을 비판하며, “학문은 세상을 경영하는 데 유용해야 한다.”라는 경세치용(經世致用), “백성의 생활을 이롭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실천적인 학문”이라는 이용후생(利用厚生), 그리고 “사실에 토대를 두고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뜻한다.
실학의 태동(胎動)과 계승
17세기 한백겸(韓百謙)·이수광(李睟光)·유형원(柳馨遠)등이 시작하였고, 18세기에 이르러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을 중심으로 한 성호학파(星湖學派)와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북학파(北學派)를 형성하였다. 19세기 들어 정약용(丁若鏞)이 집대성하였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최한기(崔漢綺) 등을 거쳐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실학의 학파
▪ 중농학파(中農學派)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학문의 목적과 역할을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는 경세치용에 두었으며, 농업을 중시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유형원·이익(李瀷)·정약용 등이다.
▪ 중상학파(重商學派) 18세기 후반 북학파를 중심으로 하며, 상업을 중시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 등이다.
▪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실학이 개화사상으로 넘어가는 19세기 전반에 사실에 토대를 두고 진리를 탐구하는 학파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김정희·이규경(李圭景)·최한기 등이다.
실학의 현대적 의미
▪ 근대 민족주의 정립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조선 중심의 독자성을 확립하였다.
▪ 근대성과 개화운동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 학문의 기반을 구축, 개화운동으로 이어졌다.
▪ 민본주의 구현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정신을 근간으로 개혁방안 제시하였다.
▪ 창조성
-백성의 실질적인 삶의 개선을 위해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과 구현을 강조하였다.
▪ 개혁성
-성리학의 경직성과 관념성을 비판하며, 형식을 탈피한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개혁방안을 마련하였다.

호남 실학
조선 후기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을 시작으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집대성한 실학의 지역적 용어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학문을 뜻한다.
호남 실학은 농업에 중심을 둔 중농주의(重農主義)를 기반으로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수용하였다.
호남 실학의 체계화
유형원을 시작으로 경기지역에서 호남을 찾은 안정복(安鼎福)·홍대용(洪大容)·정약용(丁若鏞)·서유구(徐有渠) 등이 체계화하였다.
호남 실학의 인맥
18세기 중엽부터 호남 출신의 신경준(申景濬, 1712~1781)・황윤석(黃胤錫, 1729~1791)・위백규(魏伯珪, 1727~1798)・이복원(李復源, 1881~1950)・하백원(河百源, 1781~1845)・이윤성(李潤聖, 1765~1831)・나경적(羅景繞) 등이 유형원의 영향을 받아 실학사상으로 발전시켰다.
호남 실학의 계승
19세기 중반 이후 이정직(李貞稙, 1841~1910)・이기(李沂, 1848~1909)・황현(黃玹, 1855~1910) 등을 거쳐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100년의 기다림!
당파(黨派)를 뛰어넘어 실학으로 자리매김하다.
반계 유형원이 생전에 이곳 우반동에서 20년 동안 연구하며 쓴 「수록(隨錄)」은 국가의 현실적인 문제점을 뜯어고치려는 개혁안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록」은 당색(黨色)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서인으로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尹拯)과 그 제자 양득중(梁得中)이 「수록」을 주목하고 임금에게 추천하였고, 노론의 홍계희(洪啓禧)도 「수록」의 간행을 청하였다.
드디어 1770년 임금의 명으로 「수록」이 간행(刊行)되었다. 집필 이후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라를 대표하는 경세서(經世書)로 인정받았다. 조선 실학과 호남 실학의 원조(元祖) 반계 유형원의 사상과 뜻이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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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유형원과 부안 | 磻溪 柳馨遠·扶安
반계 유형원(1622~1673)의 본관은 문화 유씨이며 세종대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9세손으로 조선 광해군 14년(1622) 서울 정릉에서 출생하였다. 32세 때(조선 효종 10년, 1653) 부안군 우반동으로 이사하여 20여년 동안 살면서 개혁 사상이 담긴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편찬하였다. 부안군의 우반동에 남아있는 반계의 유적으로는 우거지터, 반계서당, 반계우물, 묘터 등이 있다. 반계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직접 고안한 배 4~5척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말을 기르기도 하였다. 또한 활과 조총 수십 자루를 준비하여 마을사람들에게 가르쳤고, 우물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이것은 반계가 자신의 학문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증거이기도 하다. 반계는 부안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쳐, 신경준申景濬·황윤석黃胤錫·위백규魏伯珪·이복원李復遠·하백원河百源·이윤성李潤聖 등 이 지역 출신의 실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실학의 비조인 동시에 호남실학의 비조이기도 하다.



서당 앞으로 반계정(磻溪亭)이 있다. 작은 정자는 산 중턱에 위치해 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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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선생, 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다
▪ 실학의 의미
조선후기사회(17.18세기)에서 전통의 사회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을 이룩하려는 사상체계로, 주자학(朱子學)등 관념적인 학문에 대하여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의 실용적인 학문 기술 및 농공상의 실제적인 지식을 실학(實學)이라함. 실학이 융성하던 시기는 영조·정조·순조 때였다.
▪ 발생배경
왜란과 호란을 치르는 동안에 나타난 통치 질서의 모순과 조선사회의 지도이념인 주자학이 전후 부조리를 제거하지 못한 반성과 반발로 전후 민중 사회의 개혁 필요성 및 발전상을 바탕으로 발생하였다.
▪ 대표적 실학자
실학의 선구자는 이수광(1563~1628), 김육(1580~1658) 등으로 학문적인 기초를 다졌고, 반계 류형원(1622~1673)이 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저서는 『반계수록』이 있다. 실학이 학파로 성립하는 데에는 성호 이익(1681~1763)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저서는 『성호사설』이 있다. 실학사상의 융성기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활약한 시기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저술을 통하여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학은 개항이후에는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어 이후 우리나라 근대 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맥락을 이루었다.

반계 류형원(1622~1673)
반계선생은 1622년 한성에서 태어나 양평, 여주를 거쳐 과천에서 살다 32세(1653)때 가족과 함께 이곳 우반동으로 이사하여 16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선생의 자호인 반계(磻溪)는 우동리의 옛 지명인 우반동(愚磻洞)에서 따왔다
우반동에는 선생의 8대 할아버지인 류관(柳寬)이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받은 토지가 있었으며, 15세(1636)때 이 땅의 일부를 팔 때 할아버지를 따라와 작성한 토지매매문서가 보물 제900호(부안김씨종중고문서)로 지정되어 있다.
33세(1654)때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당시 과거제의 폐단이 극심한 것을 보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이후 고금의 전적 1만여권을 보면서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선생이 이곳에 살며 20여년 간에 걸쳐 지은 책으로 26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성리학에서 신선술에 이른 많은 책을 썼으나, 『반계수록』과 『군현제만』 전해지고 있다.

반계수록(磻溪隨錄)
실학자인 반계선생이 이곳 우반동에서 살며 국정 전반의 개혁에 대해 20여 년 간에 걸쳐 지은 책이 「반계수록(磻溪隨錄)」이다.
26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내용은 전제(田制), 교선(敎選), 임관(任官), 직관(職官), 녹제(祿制), 병제(兵制) 등으로 되어 있다.

전제(田制)는 토지소유에 관한 것으로 균전제(均田制)를, 교선(敎選)은 인재 교육과 선발에 대한 것으로 공거제(貢擧制)를, 임관(任官)은 관료제 운영에 대한 것으로 전문 관료제를, 직관(職官)은 통치 기구에 대한 것으로 중앙은 영의정 중심으로 효율성을 높이고, 지방관의 권한을 늘리자고 하였다.
또한 녹제(祿制)는 녹봉에 대한 것으로 모든 관리의 급여제를, 병제(兵制)는 국가방위에 대한 것으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주장하였다. 속편(續篇)에서는 노비 세습제 폐지와 군현제 정비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개역론은 소농민‧상인 등 피지배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혁신적 구상이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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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서당(磻溪書堂)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복원된 건축물입니다. 주차장에서 직선거리 약 400m 산 중턱 지점에 있어서 낮은 구릉을 500m 정도 오른다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반계선생 묘터
1973년(현종 14) 음력 3월 19일, 향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반계의 무덤은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 있습니다. 문화류씨의 선산으로 유형원이 부모님 옆에 묻히겠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임시로 모셨다가 경기도 용인으로 묘를 이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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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유형원 선생 유적비(磻溪 柳馨遠 先生 遺蹟碑)
이 비는 서기 1974년 갑인년(甲寅年) 3월 1일 세움 / 반계 선생의 터(고택지)로 유적비와 알림판이 전부입니다. 아직 고택지는 복원하지 않았습니다. 들어오는 길 옆으로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총3개의 우물터 중 하나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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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선생 유적지 磻溪先生 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이 터는 조선 효종(1649~1659)과 현종(1659~1674)때 실학자로 활동한 류형원(1622~1673)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반계라는 호로 더욱 널리 알려진 류형원은 병자호란(1636) 이후 서울을 떠나 여러 곳을 옮겨 살다가 효종 4년(1653) 선대의 자취가 남아있는 변산반도 기슭의 이곳 우반동으로 이사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야인으로만 살았으며, 농촌을 부하게 하고 백성들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는 데 학문의 목적을 둔 사람이었다. 조선 후기의 수 많은 실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반계수록」이 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우동 저수지
▪설치년도: 1957년 / ▪유역면적: 340ha / ▪만수면적: 10.6ha
▪유효저수량: 418천㎥ / ▪수혜면적: 144ha
우동 저수지의 건너편 바위가 보이는 곳에는 선계폭포(사진중앙)가 있으나, 줌을 당겨 보니 물이 보이지 않아 사진만 남기고 집으로 향했다.

선계폭포
보안면 우신마을 북쪽으로 1km정도 오르면 변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던 선계사 절터가 나온다. 비가 오면 이 분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60m의 물기둥 폭포를 이루는데 그 위용이 놀랄만 하다. 일설에 이성계가 성계골에 머물며 수련을 해서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 증거로 폭포중간에 칼자국과 말발굽 자국이 있다.
선폭포 향하는 지방 736번 도로에 들어서 선계폭포 위 선계사 분지를 찾으려면, 길을 가다가 장승(정사암 입구)이 하나 서 있는 곳을 찾으면 이곳에 주차 후 걸어서 분지까지 갈 수 있다. 길이 끝날 것 같으면서 계속되는 이 길은 마을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알지 못하는 장소로,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와 꽃향기가 가득한 길로 연인들의 산책, 가족의 소풍 코스로 기억에 남을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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