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을 마지막으로 송광사의 많은 부분을 블로그에 옮기려 했던 처음 계획과는 달리 1편이 더 늘어 총 4편을 마지막으로 쓰게 되었다. 이거 힘들어서 사찰을 가야 하나 싶을 정도로...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그곳의 역사 등 공부할게 너무 많아 솔직히 힘들다. 그래도 이렇게 자세하게, 구석구석 블로그에 담겠다는 처음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완주 송광사(松廣寺) 1편, 2편, 3편을 건너 뛰고 오셨다면 아래 URL을 클릭!~
그럼 아직 나오지 않은 대웅전_7부터 GO GO ~^^/
송광사 대웅전(松廣寺 大雄殿)
(중략)...대웅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義昌君)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송광사 대웅전(보물 제1243호)은 뭔가 특별한 부분이 있다.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보니 모든 면의 사진을 찍다 보니 대웅전의 동서남북 각 면에는 각기 다른 글씨가 쓰여 있었다.
동쪽에는 琉璃光殿(유리광전), 서쪽에는 無量壽殿(무량수전), 남쪽에는 大雄殿(대웅전), 북쪽에는 普光明殿(보광명전) 총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동쪽의 유리광전의 유는 사전에서 찾지 못했으나, 대부분 사찰에서 유리광전으로 쓴다.
대웅전 북쪽(보광명전)의 불화 4컷
이제 대웅전의 외관은 확인했으니, 안쪽에 모셔진 삼불좌상을 알아보겠다.
보물 1274호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松廣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복장유물(腹藏遺物)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전라북 도유형문화재 170호 송광사 목조삼전패(松廣寺 木造三殿牌)
완주 송광사의 목패는 대웅전 안 석가여래상 옆과 약사여래상 및 아미타여래상 앞에 놓여 있다.
당시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 명호를 기록한 불패(佛牌)와 구분하기 위해 삼전하(三殿下)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삼전패(三殿牌)라고 일컫는다.
높이가 약 230cm에 달하는 거대한 목패는 모두 3점*인데,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세부의 문양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여러 장의 나무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새긴 것이 특징이다.
석가여래상 옆의 목패는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으며, 인조 때 조성된 것이라는 제작 연도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왕과 세자를 위한 전패에는 정조 16년(1792)에 수리했다는 묵서명이 있어, 목패 연구에 기준작이 되고 있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거대하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조선시대 불교 목공예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글 출처: 완주 송광사 홈페이지]
*그중 하나는 높이 2.28m로 앞면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조성된 것이란 제작연대가 있다. 다른 2점은 높이가 2.08m로 같으며, 뒷면에 정조 16년(1792)에 수리하였음을 검은 글씨로 기록하고 있다. [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관음전_24(좌측사진) 및 보경당: 송광사종무소_25(우측사진)
대웅전 뒤로는 나한전_9이 있으나, 현재는 수리 중으로 볼 수 없었다.
나한전은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 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 맞추어 천장 윗부분을 가리게 꾸민 우물천장.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인왕상·동자상·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송광사 나한전(松廣寺 羅漢殿)
Nahan-jeon(Arhan Hall) in Songgwang Temple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이 건물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십육나한 및 오백나한이 있다. 근래에 몇 차례 보수하면서 천정과 서까래 일부가 변형되었지만, 기본 구조와 부재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17세기 사찰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낮은 받침 부위에 커다란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위아래의 굵기가 같고 반듯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 벽에는 돌아가며 벽화를 그려 놓았으며, 전체적인 건물의 모습은 단정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
송광사 오백나한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_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나한전에 있는 이 불상들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만들었다. 가운데에 석가여래를 두고 그 좌우에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배치하였다. 나한전 네 벽에 있는 오백나한은 남자 스님들로 오백상수(上首)라고도 한다. 이들은 석가여래의 제자로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진리를 깨달아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하고, 윤회의 삶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도록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들이다. 한동안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오백나한 신앙이 성행했으며, 송광사 오백나한상은 금방이라도 중생의 비원을 들어줄 것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나한상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송광사 오백나한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_내용 덧붙임
송광사(松廣寺)의 나한전에 모셔진 불상으로, 삼존상 3구, 16나한상, 500나한상, 제석상 1구, 동자상 2구,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등 모두 526구이다. 최근에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효종 7년(1656)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500나한상 중 일부는 후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새로 복원한 것이다. [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송광사 삼성각(三聖閣)_8
석조미륵대불입상(石造彌勒大佛立像)_19 및 송광사 석탑(石塔)
이제 완주 송광사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 가고 있다. 약사전을 지나면 사적비 비각_11과 부도전_12을 볼 수 있다.
송광사 사적비 | (松廣寺 史蹟碑) The Stone Monument in Songgwang | Temple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
이 비석은 송광사를 세운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조선 인조 14년(1636)에 세웠다. 앞면의 글은 신익성(申翊聖)이, 뒷면의 글은 이취반(李就潘)이 지었다. 비석 제목 글씨는 신의성이, 본문 글씨는 선조의 8남 의창군(義昌君)이 썼다. 앞면에는 고려 시대 보조(普照) 스님이 이곳에 절터를 잡고 제자들에게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하였으며, 광해군 때부터 절을 지어 벽암(碧岩) 스님을 초대 주지로 모셔왔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또한, 보조 스님에서 벽암의 제자, 시주자, 건축공의 명단 등이 적혀 있다.
송광사 사적비가 남아 있어, 송광사를 세운 내력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석을 보니 총탄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이런 유물들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사적비를 지나 조금만 가면 부도전이 있는 곳이 나온다.
송광사 벽암당 부도 | 松廣寺 碧庵堂 浮屠 The Stupa of Byeokam-dang in Songgwang Temple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4호
이 부도탑은 병자호란(1636) 때 최고의 승병대장이었던 벽암 각성(覺性) 큰스님을 추모하여 화강암 자연석을 다듬어 1660년에 세운 것이다. 벽암 스님은 당대 최고의 승려로서 나라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수행에 힘썼으며 풍부한 학식을 갖추었다. 나라에서는 그를 대공덕화주(大功德化主)로 삼아 50일간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고 송광사를 다시 세웠다. 그 후 벽암 스님은 이 절의 주지를 역임하고, 1660년 이곳에서 열반하였다.
송광사 편을 완성하고자 2번 촬영을 하였는데, 원본 사진만 약 180장이 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진들을 못 찍은 게 아쉽고, 블로그에 올리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던 점과 문화재의 고증 과정과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것 같고, 안내판의 오타 및 수정이 안 된 부분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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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4편을 마치며... 전주 럭셔리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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