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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전주 동별 지명유래

전주 지명 관련 전설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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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지명 관련 전설 및 동별 이야기의 출처는 전주시입니다. 전주시청 홈페이지>전주의 역사>명칭 유래 등을 참고 하였습니다. 이외 주석, 내용추가, 사진은 전주 럭셔리크로우가 덧붙임.

2022년 전주시 덕진구, 완산구 및 동별 지도 [그림 출처: 전주시청]

 

1. 우아동 관련 전설(유황수* 전설: 아중 저수지 북쪽 가까이 있음)

아중저수지** 북쪽 가까이에 있는 소 터로 명주 실꾸리 하나를 다 넣어도 밑에 닿지 않는 깊은 소가 있었다고 한다. 전에 어느 노인이 유황수에 있었던 주막에 와서 물 한 그릇을 청하는데 술 한 잔을 권했더니 맛있게 마시고 나서 하는 말이 “오늘 선밖장(전주)에서 별사람 다 보았다. 글쎄 쌀이랑 건어(乾魚) 등을 단돈 몇 푼 안되는 헐값으로 호가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고 하며, 무릉 동쪽에 있는 벼락바우*** 쪽을 가리키며 “저곳에 내(川)가 생기겠다.” 고 하며 가기에 실소 없는 소리를 하는 노인으로 일소에 붙였으나 그 후 경신년(1920년) 물난리(홍수)가 있어 선밖장은 물에 잠겨 헐값도 못되는 거저나 다름없는 값으로 물건이 흥정되고 또한 이곳에 저수지가 생기게 됨에 그 노인은 이인(異人)이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글 출처: 전주문화재단_전주시 마을조사 “동심(洞心)찾기” 우아1동 마을조사서]


*유황수
아중저수지 중심 부분에 있던 골짜기를 말한다.

**아중저수지(牙中貯水池)
우아동 1가 중심부에 있는 저수지다. 면적이 1,015정보, 전에 인교 마을이 있었으며 인교지, 은행다리못을 말한다.

∙ 아중저수지길
아중저수지 제방에서 우측으로 저수지 좌안의 상류에 있는 관암교까지 연결되는 길이다. 중간에 무릉과 관암을 거친다. 무릉은 문수골이라고도 하는데, 바위가 마치 문처럼 양옆으로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짜기가 깊어서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문수골에는 송원창과 송준호 부자의 효자비가 있다. 전주의 무릉 도원은 아중저수지길을 따라 가면 한적한 무릉마을과 관암마을에서 만날 수 있다.

***벼락바우
무릉 동쪽 저수기가 벼랑에 있는 바위다.

 

 

2. 용머리고개*(용두현, 용두치) 전설

강감찬이 이곳에 있을 때 어느 해 가물어서 몹시 걱정하다가 하루는 하인을 시켜 지금 막 내(川)를 건너는 초립동이 있을 터이니 그를 곧 데려 오라고 일러 보낸 즉, 과연 그 사람이 있어 데리고 왔는데 그를 보자 강감찬이 호령하되 “이렇게 가물어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다니 괘씸하다.” 고 꾸짖으며 당장 비를 내리게 하지 않으면 참하겠노라 하였더니, 그 초립동은 실은 용이 둔갑한 것 이었으니 죽음을 면하고자 승천하며 비를 내리게 하고 떨어져 죽은 곳이 이 고개라 하여 그 후 강감찬은 그 용을 후히 장사지내 주고 묻었다 하여 지금도 용무덤이라고 부르는 무덤이 있다. 전주고지도에는 용머리고개와 관련하여 용두치(龍頭峙)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글 출처: 전주문화재단_전주시 마을조사 “동심(洞心)찾기” 완산동 마을조사서]



*용머리고개(서완산동)

마한(馬韓)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이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일수이신(一首二身)이 태어나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은 용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하자 인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이 때 전주천 물은 좁은목에서 폭포로 떨어진 물이 지금의 다가산 밑에서 급히 소()를 이루어 물이 많았고 물살 또한 급류였다. 일수이신 (一首二身)의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일본관헌의 농락이었고, 이 전주천에서 자란 용이 천년을 기다려 승천(昇天)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고 전주천 물을 모조리 삼키고 하늘에 오르려고 힘을 한 번 쓰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고 말았는데 사실은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천년에서 하루가 모자란 것이었다고 한다. 이 때 용이 떨어진 곳은 완산칠봉의 계곡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은 원시림이었다. 몸부림치다가 승천하지 못한 한()을 품고 용()의 머리가 지금의 용 머리고개에 떨어졌으며, 이후로는 우거진 송림이 정리 작업을 한 듯 깨끗하게 오솔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오늘날은 경목선(京木線)**이 되었고 용머리의 형상이라고 하여 용머리고개라고 했다.

 


**용머리고개는 선조들이 용머리 같다는 고개라 하여 용두치, 용두현, 용두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국도 1호선인 경목선(京木線)(서울-목포)이 지나는 곳으로 먼 옛날 호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옛날에는 구제날망 또는 제말랑이라고도 불렸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완산교 다리를 건설해 용의 형태인 산능선을 도로로 개설, 용의 허리를 끊은 이후부터 용머리고개라 불리어왔다는 구전도 보인다.

 

 

3. 박진 효자문(朴晉 孝子門)- 교동

박진 효자비(전주 향교 앞)



죽정공 박진이 영암군수로 있었던 태조 3년 그의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때마침 8월 장마로 남천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할 형편인데 급한 마음에 그는 말을 타고 물결속에 뛰어 들었더니 물 줄기 한복판이 딱 갈라져서 무사히 내를 건넜다고 하며 엄동설한이 되어 부친의 병환이 차도가 없어 부친의 소원을 물었더니 꽃순이 먹고 싶다 하므로 목욕재계하고 산에 올라가 하늘에 축원한 뒤 눈을 뜨니 눈 속에 꽃이 만발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 꽃순을 따다가 달여 드렸으며, 다시 잉어를 원하는 부친을 위하여 방죽을 덮은 얼음장을 깨뜨렸더니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하며 또 수박을 원하는 부친을 위하여 눈에 덮인 산 골짜기를 헤매었더니 탐스럽게 익은 수박이 달린 수박덩굴을 발견하였다고 함 이리하여 그가 꽃을 구하려 헤매었던 산을 朴菓山(후박나무박.과일과.뫼산),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온 방죽을 잉어쏘, 수박을 얻은 골짜기를 수박동이라 함.

박진 효자비

 

[내용추가]

박진 효자비 | Park Jin's Filial Piety 朴晋 孝子碑

지정번호 : 전주시 향도문화유산 제5호
지정일 : 2009. 10. 30.

박진 효자비



이 비석은 1398년(홍무 31*)에 세워진 것을 1724년(경종 4)에 중각한 것이다. 비각 안에는 1805년(순조 5)에 후손 필성(心晟)이 지은 '전주부 효자박진정려기(全州府 孝子朴普旌閭記)' 가 걸려있다.

전주부 효자박진정려기(全州府 孝子朴普旌閭記 )



박진의 자(字)는 내신(乃臣)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완산지」에 박진은 아버지가 병환으로 눕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서 시중을 들면서,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예법에 따라 장사(葬事)와 제사를 모셨으며, 3년 동안을 여묘(廬墓)살이 하여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홍무 31년 : 홍무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홍무제(洪武帝)의 연호로 명나라 최초 연호로 1398년까지 31년간 쓰였다.

 

4. 권삼득**의 전설 원동 문덕산 (院洞 文德山)전설

*원동 동쪽에 있는 산으로써 어느 선비가 과거보러 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다가 낮잠을 자게 되어 꿈을 꾸니 귀가후 천금 횡재 하리라 하였는데 그 후 옥동자를 낳아 대성하게 되었다고 함.

전주시 *원동(분홍색표기)



**권삼득(權三得): 1771(영조 47)∼1841(헌종 7). 본명 사인(士仁). 본관은 안동(安東). 조선 정조·순조 때 활약한 판소리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내언(來彦)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후기 「판소리 설렁제」라는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한 판소리의 명창.

권삼득 생가
권삼득 생가 / 완주군 용진읍 원구억 마을


양반 집안에 태어났으나 음악적인 재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 배우기를 싫어하고 판소리만 배우다가 집안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는 판소리에서 가장 오래된 명창으로 알려진 하은담(河殷潭)과 최선달(崔先達)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특히, 권마성(勸馬聲) 소리제를 응용하여 ‘판소리 설렁제’ 라는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제는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 내는 성음인데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에서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 여러 대목에 쓰이고 있는바, 권마성과 같이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가조(歌調)를 두고 신재효(申在孝)는 그의 「광대가(廣大歌)」에서 ‘권생원(權生員) 사인(士仁) 씨는 천층절벽(千層絶壁) 불끈 소사 만장폭포(萬丈瀑布) 월렁궐렁 문기팔대(文起八代) 한퇴지(韓退之)’라 하여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하고 있다. 그를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 부르는 속칭도 이 때문이다. 그는 8명창 가운데 가장 선배로서 그 이전에 있었던 원초(原初) 판소리와 비슷한 단순한 판소리를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후인들의 평도 그의 소리가 단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흥보가」를 특히 잘 하였고, 그의 더늠(판소리 명창이 사설과 소리를 새로 짠 대목)인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은 전도성(全道成)·송만갑(宋萬甲)·김창룡(金昌龍)에 의해서 방창(倣唱)되고 있다. 또 염계달(廉季達)은 그의 창법을 많이 모방하였다고 한다. 전라북도 완주에 그의 묘가 있으며, 그 앞에 구멍이 패어 있는데, 소리구멍이라 하여 그곳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권삼득(權三得)]

완주군 위봉폭포


완주군 위봉폭포는 권삼득선생이 득음하기 위하여 수련했던 장소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아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하여 관리함.

권삼득 묘 아래 소리굴
권삼득 묘 아래 소리굴

 

소리굴

이곳은 소리의 명당이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이 고을 이름을 梨木渟(이목정) 일명 배나무정이라고도 부른다. 배나무에 매미가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혈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이 산 정상에 묘를 안장하면 명창이 태어난다고 한다. 이 굴은 매미의 입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연기를 피우면 이 산 정상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전하며 이곳에서 소리 공부를 하면 명창의 정기를 받는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三得(삼득)공의 조부이신 世進(세진) 공을 이 산 정상에 모신 후로 공이 태어났다하여 삼득공의 배위이신 전주 이씨께서 유언하시기를 “세진(世進)공의 묘를 아래로 이장하여라, 또다시 우리 가문에 명창이 나와서는 안된다” 고 유언을 하시어 세진(世進) 공의 묘를 정상 아래로 이장하니 그 후로는 명창의 맥이 끊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현재 전주시 완산구 서노송동 홈플러스 뒷 길부터~덕진구 진북동~금암동~덕진동 2가 덕진공원까지 권삼득로가 있다.

전주시 권삼득로



한편 권삼득을 포털에 조회하면 완주, 익산, 남원 지역명이 붙는데 이는 권삼득의 출생 및 활동 지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 디지털남원문화대전의 권삼득의 가계 내용 발취 내용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가계]
권삼득은 『남원지』에 따르면 남원시 주천면 무수리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창극사』에는 익산 남산리로 되어 있고, 『안동 권씨 대동보』에는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가 출생지로 되어 있다. 1992년에 발간된 『남원지』에는 남원 주천방 노씨가 권삼득의 외가라고 하였다. 『안동 권씨 대동보』나 권삼득의 부친 권래언의 문집인 『이우당집』에 의하면 출생지는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가 맞을 듯하다. 남원은 권삼득의 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판소리를 수련한 곳이며, 익산은 가문에서 쫓겨난 후에 살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부친 권래언의 호인 이우당은 “두 가지 근심이 있는 사람”이란 뜻인데, 그중 한 가지는 아들 권삼득이 소리를 하여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고 한다. 권삼득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멍석말이를 당했을 때, 소리를 청해 불러서 살아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_향토문화전자대전]

권삼득 선생의 묘
권삼득 선생의 묘

 

[권삼득로 추가]
기점: 중노송동 495-33, 종점: 덕진동2가 30-17
권삼득로는 전주고 앞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선미촌, 진북우체국, KBS, 전주금암초등학교, 전북대학교, 덕진연못, 도립국악원, 호반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에는 전주의 명창인 권삼득기적비가 도립국악원 앞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권삼득기적비는 소리할 때 쓰는 북모양을 조각하여 만들었으며, 내용은 서예와 소리를 했던 석전 황욱이 썼다.
국창 권삼득은 양반 출신의 비가비(非可非) 소리꾼이다. 그는 1771년 (영조47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양반가문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권정이나 사람소리, 새소리, 짐승소리의 세 소리를 얻었다고 해서 삼득(三得)이라 불리었다.
12세 때부터 하은담(河殷潭), 최선달(崔先達)등으로부터 소리공부를 시작, 19세기 전반(순조) 8명창의 한분이셨다. 그는 전주 근교 산과 계곡 등을 떠돌며 소리를 익혀 득음을 함으로써 명창중의 으뜸명창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흥보가가 장기이고 더늠(특출한 소리대목)으로 후세에 전하는 것은 제비후리러 가는 대목인데, 이로써 ‘설렁제’ 창시자가 됐으며 양반광대라는 이름의 「비가비」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권삼득기적비가 전북도립국악원 앞에 세워진 이유는 전주가 판소리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전주는 판소리를 비롯하여 전주대사습놀이대회가 일제시대에 끊어졌으나 다시 1980년에 전주대사습놀이가 부활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5. 성황당*과 이규보 전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는 것)-인후동

이규보는 1199년(고려 신종 2년)에 전주목에 사록겸장서기로 내려와 성황사의 제사를 빙자하여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뜯어 착복하는 못된 아전들의 부조리를 은근히 꼬집는 제신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이 무렵 어느날 밤에 꿈을 꾸게 되었는데 평소에 별반 가보지도 않았던 성황사에 이르러 당하에서 절을 하였더니 성황대왕의 사자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기길(이규보의 장서기 벼슬을 가리키는말)께서 가까이 올라 오시랍시는 대왕님의 분부이십니다“고 전한다. 나는 층계를 올라가 대왕앞에 엎드려 재배를 올렸다. 대왕은 베로 만든 두건을 쓰고 검정색 윗도리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어디선지 술을 차려든 사람이 나타나 잔을 권하므로 총총한 기분으로 받아 마셨는데 얼마 후 대왕은 말을 걸어 왔다 “내가 듣건대 근자에 목관이 새로이 십이국사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하는데 사실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내게도 좀 구해줄 수 없겠는가, 나는 자식이 여럿이 여서 그들에게 이를 읽게 하려니 몇 벌 있었으면 하네, 한 번 주선해서 구해 줄수 없겠는가, 부탁 좀 하세.” 나는 꿈속에서지만 하도 신기해서 “그럼 저의 운수는 앞으로 어떻겠는지 한번 듣고 싶습니다.” 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대왕은 길위에 급히 달리다가 바퀴 심대가 부러져 주저 않은 수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귀관의 운수도 마치 저와 같은 걸세.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이 고을을 물러나게 될 걸세...” 이렇게 대답하고 나더니 대왕은 손수 가죽띠 두 벌을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귀관은 반드시 귀인이 되어 높은 벼슬을 얻을 것이니 이 가죽띠를 선물로 주겠네...” 어느덧 꿈에서 깨고 났더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때마침 안렴사의 낭장으로 있는 노 아무개가 목관으로 하여금 십이묵사를 간행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낭댕이[선왕당,성황당]
도마다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서낭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 서낭댕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 나라는 삼한시대부터 토속신을 섬긴 기록이 있다.
백제 때도 역대 임금들이 천지신에게 제사하며 시조 묘당을 세웠고, 고구려에서는 음사(淫杞)가 많았고, 신라시대 역시 묘를 비롯하여 왕묘(王廟)를 세우고 명산 대천(大川)을 섬겼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선황신제사가 추가되더니 조선조시대부터는 민간신앙의 서낭댕이라고 하여 마을의 터를 지키는 소박한 신앙이 내려왔다.
사직단은 토(土), 곡(穀)의 신(神)을 섬기는 곳이며 국토의 안태와 오곡의 풍요를 빌었고 기우(祈雨), 방역을 위한 고사가 행해졌다.
이로 보면 성황당(城隍堂)은 시민생활 깊숙이 파고든 유일한 민간신앙이다.
전주의 성황사(城隍杞)는 고려 신종(神宗 2년)때 전주목의 사록겸(司錄兼) 장서기(掌書記)인 이규보(李奎報)가 기린봉 북록에 세우고 성지의 수호를 치제 한데서 비롯되어 조선조시대에 이르러는 민간신앙으로 무병장수(無病長壽) 입신영달(立身榮達) 먼 길 떠나는 길손의 무사를 비는 등 생활 속에 파고 들었다.
전주에서는 이 곳에 처음 성황사가 세워졌고, 성황당으로서는 가장 번창한 곳이라고 해서 서민들의 말로 서낭댕이라고 불렸다. [글 출처: 전주문화재단_전주시 마을조사 “동심(洞心)찾기” 인후1동 마을조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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