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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전주 동별 지명유래

전주시 팔복동의 유래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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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에 앞서 이 글의 출처는 전주시 마을조사 “동심(洞心)찾기” 마을조사서임을 밝힙니다. 또한 원본 조사서의 양이 방대하여 일부 발취 하였고, 기타 편집 및 사진은 전주 럭셔리크로우의 창작물입니다. 아래 마을조사서의 첫 장에 있는 조사개요 부분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조사개요

전주시와 (재)전주문화재단은 2015년 9월에 마을조사단을 구성하여, 전주시의 33개 행정동에 대한 마을 조사를 2018년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했습니다.

 

33개 행정동에 대한 조사는 2015년 9월의 1차년도 조사를 시작으로 2018년 4차년도 조사까지 총 4년에 걸쳐 진행됩니다. 연도별 조사 대상 동은 아래 표와 같으며 이러한 조사동의 선정은 마을조사단의 자문위원회와 전문위원회에서 논의된 시대별 전주시의 성장과정과 동별 공동체의 변화 및 지향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3개 행정동의 4차년도 조사

 

1. 팔복동의 유래

팔복동은 본래 전주부성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외곽에 위치한 농촌 마을로, 행정구역상 전주군 조촌면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팔복동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1872년 조선시대 지방도를 살펴보면 팔복동의 유래가 되는 ‘팔(八)’이나 ‘복(福)’과 관련된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 팔복동에 자리 잡고 있는 ‘신감’, ‘상리’, ‘추천리’의 마을 명칭이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때의 기록인 『전주부사』에서는 이동면 구주리에 대한 지명이 확인되고 조촌면에는 감천리, 유제리, 덕촌리의 지명이 확인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까지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신복리에 대한 지명은 확인이 되지 않으며 그 외 주요 마을 이름들은 지명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동산농장’과 관련하여 마을들이 새롭게 재편되면서 일제강점기 중~후반기에 현재 알려진 마을들이 새로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팔복동은 기존 조촌면의 일부와 과거에는 전주천의 잦은 범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거주하기 용이하지 않은 추천 인근 지역을 합쳐 현재 하나의 동을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천대교와 팔복동 2022.08.05.

 

팔복동의 명확한 지명은 1957년 조촌면 일부가 전주시와 합쳐지면서 당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신복리와 조촌면 일대의 팔과정에서 ‘팔(八)’자를 따와서 팔복동이라고 하였다. 팔복동에서는 8명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8명의 선비는 홍남립, 이흥발, 이흥록, 필선 이기발, 장령 이후선, 진사 이생발, 선비 이순선, 송상주이다. 팔과정은 이 8명의 선비가 세운 정자라고 한다. 하지만 팔과정은 현재 추정되는 위치에 현대식으로 세워졌을 뿐 당시의 모습은 전하지 않는다.

1872년 전주 고지도

 

1957년 이후 팔복동은 전주시의 외곽지역으로, 일부 영역의 변화는 있었지만 큰 변화 없이동의 영역을 유지하였으며 각각의 주요한 마을을 중심으로 팔복동1가에서 팔복동3가로 나누었으며 1994년 동산동 내의 법정동인 고랑동에 포함되어 있는 감수마을 인근 지역이 편입되면서 팔복동1가의 일부를 편입하여 팔복동4가로 구획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팔복동은 총 4개의 법정동을 포함하여 그 영역을 유지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전주시 팔복동의 연도별 행정구역명 변화

 

팔복동의 역사

팔복동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주요 키워드는 ‘교통의 요지’, ‘농촌의 모습’, ‘산업화에 따 른 도시화’ 등이다.

팔복동이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였음을 보여주는 단초는 ‘호남대로 관련 기록’과 ‘원’의 존재 였다. 조선시대의 호남대로는 전주부성의 서문지에서 나와 숲정이를 거쳐 현재의 하가지구 일 대 그리고 팔복동 구주마을 일대~고랑동 일대의 나루터에서 강을 건넌 후 현재의 비비정(飛飛亭)일대를 거쳐 삼례역으로 빠져 나가는 길이 고지도 상에 잘 나타나 있다. 한양 도성까지 이동하는 호남대로 관련 기록이 있기는 하나, 팔복동 일대는 전주부성과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중심지가 되기는 힘들었다. 조촌면의 유제리나 감천리, 동곡리와 같은 마을을 중심으로 농촌 풍경 이 나타나면서 호남대로가 관통하는 길목이 팔복동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추천 일대에 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곳을 추천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팔복동의 구주마을 인근이 이러한 원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872년 지방도에는 이 일대에 주막거리가 있었다고 언급되어 익산과 전주를 잇는 호남대로가 구주마을 일대를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하 생략)

 

 

2. 팔복동의 유래와 주요 지명²

팔복동은 본래 전주부성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외곽에 위치한 곳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전주군 조촌면에 속해 있었다. 전주부성 내는 도로를 통한 방리구역이 명확하게 나뉘어져있어서 면과 그 면에 속하는 리(里)의 구분은 상대적으로 인위적이었으나 팔복동이 속한 조촌면 일원은 지형적인 부분과 치소(治所)와는 떨어져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명확한 방리구조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농사와 한국의 전통 마을 구조와 관련하여 홍수와 산사태 등 자연재해를 피하고 용수의 구득이 용이하며, 농사를 짓는 땅과 가까운 지역의 점형의 촌락구조를 보였다.

전주천과 삼천천의 합류지역 추천楸川의 시작 / 2022.07.29.

 

팔복동이라는 지명은 본래 조선시대 때부터 존재한 지명은 아니었다. 1872년 조선시대 지방도를 살펴보면 팔복동의 ‘팔(八)’ 그리고 ‘복(福)’과 관련된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 팔복동의 마을지명 중에 하나인 ‘신감(新甘)’*이라는 지명과 ‘상리(上里)’*, 팔복동 일대의 전주천의 또 다른 이름에서 연원된 것으로 추정되는 ‘추천리(楸川里)*의 마을명칭이 확인된다.

 

*상리(上里), 신감리(新甘), 추천리(楸川里) 및 추천교(鞦川橋)의 지명을 아래 1872년 전주 고지도에서 확인 가능하다.

-1872년 전주 추천교 부근 확대 지도-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의 기록인 『전주부사(全州府史)』에서는 대정 3년인 1914년 4월 1일 전라북도령 제2호에 의해서 전주부의 6개면에 대한 각각의 영역과 면에 속한 각 리(里)를 확정하였는데, 이동면 구주리에 대한 지명이 확인되고 조촌면에는 감천리, 유제리, 덕촌리의 지명이 확인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신복리에 대한 지명은 확인이 되지 않으며 그 외에 주요 마을 이름들은 지명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동산(東山)농장’과 관련하여 마을들이 새로이 재편되면서 일제강점기 중~후반기에 현재에 알려진 마을들이 새로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¹. 

¹이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일대의 동산농장과 관련하여 마을주민들이 농사를 지었다는 주민들의증언이 있어 이를 좀 더 조사하면 마을의 연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각각의 마을은 예전부터 형성되었지만, 현재의 행정동 체계와 같이 대표적인 지명만 기록상으로 언급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좌:팔복동 / 우:덕진동 2022.07.29.

 

결국 팔복동은 기존의 조촌면의 일부와 과거에는 전주천의 잦은 범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거주하기 용이하지 않은 추천 인근 지역을 합쳐 현재의 하나의 동을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복동의 명확한 지명은 1957년 조촌면 일부가 전주시와 병합되면서 당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신복리와 조촌면 일대의 팔과정에서 ‘팔(八)’자를 따와서 팔복동*이라고 하였다. 1957년 이후 팔복동은 전주시의 외곽지역으로 일부 영역의 변화는 있었지만 큰 변화 없이 동의 영역을 유지하였으며 각각의 주요한 마을을 중심으로 팔복동1가에서 팔복동3가로 나누었으며 1994년 동산동의 고랑동에 포함되어있는 감수마을 인근 지역이 편입되면서 팔복동1가의 일부를 편입하여 팔복동4가를 구획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팔복동은 총 4개의 법정동을 포함하여 그 영역을 유지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주시 팔복동

 

*팔복동 연혁/지명유래: 팔복동(八福洞)이라 불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년도 미상)에 8명의 선비가 현재 팔과정(2001.2.25.준공) 위치의 팔과정 터에서 수학하여 과거급제 한 것을 기리고자 주민들이 팔복동(八福洞)의 팔(八)자는 8명 선비의 8(八팔)을 첫 자로, 복(福)자는 팔복동에서 제일 번성한 신복리(新福里) 중간자 복(福)자를 합하여 팔복동(八福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문: 2023.01.31. 덕진구 팔복동 주민센터]_럭셔리크로우 각주

다음은 팔복동의 중요한 지명의 목록과 이에 대한 해설이다. 팔복동 내에서 확인되는 지 명은 현재는 많이 사라졌으나, 일부는 각 동의 중요한 위치로서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고 수 치지형도 상에도 표기되어 전해진다. 이들 지명은 그 동안 발행된 각종 지명유래집을 통해 참고하고자 한다².

 

²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0, 한국지명유래집 전라·제주-.

한글학회, 1991, 한글학회 지은 한국지명총람 12(전북편)

팔복동주민센터 홈페이지 http://palbok.jeonju.go.kr/index.9is

황방산, 추천대, 전주 제2산업단지

 

 

1) 팔복동 일대의 주요 옛 지명

○ 팔복동(八福洞)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453호 전주시 구역 확장에 의하여 완주군 조촌면의 동곡리, 동

산리의 일부 신복리, 여의리의 일부 유제리를 편입하고,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108호에 의하여 팔과정과 신복의 이름을 따서 팔복동이라 하는 동시에 신복리를 팔복동1가로, 동곡리를 팔복동2가로, 유제리를 팔복동3가로 하였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1, 2, 3가를 합하여 팔복동이 되었다.

 

○ 가리내

매화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팔복동의 인근의 하천인 추천(湫川), 그리고 마을 지명으로 구주리(舊酒里)를 지칭하기도 한다. 앞으로 가리내가 흐르고 있으며, 전에 주막이 있었다. 이 주막은 삼례로 이어지는 옛 호남대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감투바우

반룡리 동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감투처럼 생겼다.

 

○ 감천리(甘泉里)

신행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맑고 맛이 좋은 샘이 있었다.

 

○ 구석배미

동곡리 동북쪽에 있는 논을 칭한다.

 

○ 국골

반룡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금액보

가리내 동남쪽에 있는 보이다. 금액이란 사람이 만들었다.

2021.06.27. 금액보

 

○ 김원묵 효자문(金元默孝子門)

팔과정터 동남쪽에 있는 효자 김원묵(金元默)의 정문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증직 받았다.

 

○ 너벙바우

너방바우 모탱이에 있는 바위로 넓적하게 생겼다.

 

○ 너벙바우 모탱이

감천리에서 신행리로 가는 사이에 있는 모롱이이다.

 

○ 덕촌리(德村里)

감천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동곡리(銅谷里)

본래 전주군 조촌면의 지역으로서 동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예암리, 학상리, 상리, 신교리, 매화리, 구주리와 반룡리, 유상리의 각 일부와 이동면의 구주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곡리라 하였는데, 1957년 11월 6일 전주시에 편입되고, 같은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108호에 의하여 팔복동2가가 되었다가, 1973년 7월 1월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팔복동에 편입되었다.

 

○ 매화동(梅花洞)

상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매화나무가 많이 있었다.

 

○ 반룡교(盤龍橋)

반룡리 남쪽에 있는 다리로 길이는 8m이다.

 

○ 반룡리(盤龍里)

동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에 용혈이 있다고 한다.

 

○ 버드랑죽(유제리)

비석날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버드랑방죽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

 

○ 버드랑죽 방죽

유제리 동쪽에 있는 방죽으로 넓이는 약 6,000평 되었으며 1936년에 개축하였다.

 

○ 비석날(예암리, 禮岩里)

학상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옆에 비석이 서 있는 산등성이가 있다.

 

○ 상리(上里)

팔복동 중심에 있는 마을이다.

 

○ 신교리(新橋里, 新喬里)

상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신복리(新福里)

신교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는 팔복동 내의 마을 중에 가장 크고 팔복동의 ‘복’은 이 신복리에서 따와서 동 명칭이 붙여졌다.

 

○ 신행리(新杏里)

버드랑죽 동남쪽에 있는 마을.

 

○ 여쉬바우

학상리 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전에 여우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 와룡보(臥龍洑)

신복리 동북쪽에 있는 보이다.

 

○ 용골

덕촌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용골방죽

용골에 있는 방죽으로 넓이는 약 4,000평이다.

 

○ 용산교(龍山橋)

과거 덕진동과 팔복동을 연결하는 다리로 용산다리라고도 한다. 현재는 기린로의 개설로 인하여 8차선의 도로로 확장하면서 그 옆에 새로운 다리가 개설되었으며 추천대교로 명칭이 부여되었다.

 

○ 용쏘(용소, 龍沼)

덕촌리 남쪽, 황방산 기슭에 있는 늪을 칭한다.

 

○ 유상리(柳上里)

반룡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유제(柳堤)

버드랑죽방죽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 유제리(柳堤里)

버드랑죽과 동일하며 마을의 정식명칭이다.

 

○ 주택촌 (住宅村)

추천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6 25사변 후 피난민을 수용하기 위해서 후생주택이 세워졌다.

 

○ 지앗골

비석날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지장골 방죽

황새골 동쪽에 있는 방죽으로 넓이는 약 4,000평이다.

 

○ 천만보

주택촌 동쪽에 있는 보이다. 천만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 추천교(楸川橋)

신교리 동쪽에 있는 다리이다. 길이는 30m. 덕진동의 용산평과 가깝다.

2021.07.18. 현대의 추천대교

 

○ 추천대(楸川臺)*

가리내 동쪽, 냇가에 있는 대. 전주 이씨 추탄파(楸灘派) 문중에서 고종 3년(1866년)에 만들었다.

추천대(楸川臺) 2021.06.27.

 

*추천대(楸川臺):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호

이 정자는 조선 성종 때 병조참판 대사헌 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이경동이 고향에 돌아와 앞의 추천에 낚시를 드리우고 만년을 보내던 곳이다. 이경동은 세조 8146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인물이다. 대한제국 광무 31899에 후손 이정호가 이경동의 발자취가 서린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세우고 추천대라 이름 지었다.

 

○ 추천원* 터(楸川院-터)

가리내에 있는 역원의 터이다.

*『대전통편(大全通編)』,『대전회통(大典會通)』등의 법전에서는 이 일대는 원으로 지정되어 지방 수령이 부근의 주민을 정하여 원주(院主)로 삼고 이를 보수시키며 원주로 정한 호(戶)는 각종 부역에서 면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팔과정(八科亭)

현재의 팔과정(전주시팔복정수장 옆에 있다.)

 

동곡리와 반룡리 사이에 있는 정자 터이다. 인조 때 판교(判敎) 홍남립(洪南立), 사간(司諫) 이흥발(李興浡), 목사(牧使) 이흥록(李興錄), 필선(弼善) 이기발(李起浡), 장령(掌令) 이후선(李厚先), 진사 이생발(李生浡), 이순선(李循先), 송상주(宋尙周)의 여덟 사람*이 함께 세웠다. 

*팔과정(八科亭)과 여덟 사람(부성팔현)에 대한 포스팅은 따로 하겠습니다.

 

○ 학상리(鶴上里)

동곡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황새골

지앗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2) 팔복동 일대의 주요 자연 지명

 

 황방산(黃山)*

다른 명칭으로는 홍산(洪山), 서고산(西固山)이라고 한다. 시의 효자동·동산동·팔복동에 걸쳐서 위치한 산이며 해발고도는 217m이다. 『여지도서』(전주)에 서고산이라고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부)에는 “관아의 서쪽 15리에 있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서고산 내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인 서고사가 있다. 서고사는 908년(후백제 견훤왕 17년)에 명덕(明德)이 창건하였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시)에 도읍을 정한 뒤 동서남북에 각각 동고진, 서고진, 남고진, 북고진을 두고 각 진마다 사찰을 지어 외침을 막고자 하였다. 본래 이 사찰은 서고진에 있었다. 1363년 혜공(惠空)이 중창, 벽송이 지엄하고 1951년에중수하였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나한전, 미륵전, 오사채 2동이 있으며, 유물로는 대웅전 안에 소형 석불이 전한다. 효자동 방면에서는 홍산이라고 부르며, 홍산리, 홍산교회 등의 이름에 사용되고 있다. 동산동, 팔복동 방향에서는 황방산이라 칭하며 이는 시역이 확대되기 이전에는 완주군 조촌면과 이서면의 경계를 이룬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고사 이외에도 천고사(天寺)*등이 있다.

 

*자료검증: 황방산(黃山)은 현재 황방산(黃山) / 천고사()는 현재 천고사()로 쓰이고 있다._럭셔리크로우 각주

황방산(黃方山)의 노을 / 2021.07.21.

 

황방산의 납암정魶岩亭과 고인돌

 

 

황방산(黃方山)의 노을 / 2021.07.23.

 

 

 추천(楸川)

순 우리말로 가르내라고도 한다. 시의 송천동과 팔복동의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다. 전주천과 삼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소양천과 다시 합해지는 곳까지의 하천이다. 전주천과 삼천이 함류하는 지점에는 추천대가 있다. 덕진동과 팔복동 사이에는 다리를 건설하여 추천대교(楸川大橋)라 칭했다. 『여지도서』(전주)에는 횡탄(橫灘)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관아의 서쪽 30리에 있다. 남천, 삼천, 대야소천 물줄기가 합류하여 횡탄을 이루며, 또 서쪽으로 흘러가서 신창진을 이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추천대교(楸川大橋) 2021.07.18.

 

 

 금학천(金鶴川)

팔복동을 남-북으로 흐르는 전주천의 지류 소하천이다. 금학천과 관련된 옛 기록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금학천은 현재 전주제지가 위치한 황방산의 북서사면 일대에서 시작하여 일부는 전주제지 공장 시설에 의해서 복개된 상태로 그 수로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본 유로는 팔복동2가 393-14번지에서 확인되며 팔복동4가 249-25번지 일원에서 살짝 북동방향으로 꺾여서 직강화된 하천 유로를 따라 흘러가고 팔복동4가 1082-6번지 일원에서 전주천(추천)의 본류와 합류한다. 현재 금학천은 이 일대의 공장 건립, 도로건설 등으로 많은 부분이 복개된 상태이며 일부는 현재 남아있는 철로와 함께 평행하게 인공적인 수로의 형태로 흐르고 있다. 각종 오물과 쓰레기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으며, 최근 이러한 오염 원인을 제거하고자 자연형의 하천정비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현재 사업이 계획되고 있다.

정비사업이 끝난 금학천과 이팝나무 철길

 

금학천, 같이가개, 팔복예술공장의 위치가 보인다.

 

팔복동 철길 옆 팔복예술공장 2021.06.27.

 

이팝나무그림책도서관 2022.09.25.

 

 

 팔복동 철길

팔복동의 철길은 옛 전주시 완산구 태평동에 전주역사가 있었을 당시에 협궤철도의 개통에 따라 처음으로 개설되었으며, 이 철도는 당시 동산역 일대와 함께 ‘동산농장’에서 생산된 곡물들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였다. 1967년 이후 이 지역에 전주 제1공단의 건설*과 함께 주로 시멘트와 석탄 그리고 이 일대 공장에서 생산된 물산들을 나르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다가 1991년 전라선의 북전주~신리간 이설작업과 함께 전주역사의 노송동~우아동 이전으로 인하여 한정적인 역할만을 수행하였다.

2022.09.25. 팔복동 철길

 

그리고 지속적으로 물류수송을 위한 화물열차가 지나다녔다. 2000년대 들어서 전주 제1공단의 급격한 노후화와 공장들이 이전됨에 따라 화물열차의 이동은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하였으며, 2008년 11월 1일 이후 화물 취급이 중지됨에 따라 열차는 더 극히 일부만 제외하고는 이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현재의 철도는 거의 폐 철로와 같이 현재 그대로 남아있다.

2022.09.25. 팔복동 철길

 

 

전라선 철길의 연혁

1913년 1월에 전북철도주식회사가 부설면허를 받아 1914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여객운송은 1914년 10월부터 시작하였으며 화물수송 업무는 1914년 12월부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사설철도로는 부산초기전기선에 이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7년 10월 조선총독부에서 매수하여 광궤로 개축하고 경전북부선이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1929년 4월 18일 익산(이리)∼여수간의 철도를 전주방면에서부터 착공하여 1931년 10월 전주∼남원간이, 1933년 10월 남원∼곡성간이, 1936년 12월 곡성∼순천간이 개통되었으며, 이것이 이미 개통되어 있던 광주선과 순천에서 연결됨으로써 전구간이 개통되면서 명칭이 현재의 전라선으로 바뀌었다. 1937년 3월에는 익산∼여수 전구간의 전라선이 개통되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여객 및 화물수송량이 증가함에 따라 선로용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선로의 용량을 증대시키고 고속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복선전철화 공사를 시작하였다. 1단계 복선전철화 공사는 1999년에 완공되었고 2단계 복선전철화 공사는 2004년 8월에 완공되어 익산∼동순천 구간이 복선전철화 되었다. 나머지 구간은 2011년 10월에 복선전철화 공사가 마무리 됨으로써 익산∼여천역까지 복선전철이 개통되었다. 여천역과 여수엑스포역은 각기 역 사를 이전하여 현재 여천역∼여수엑스포역 사이에 단선전철이 개통되어 있다. [다음 백과사전 인용]

황방산 푯말에 전주경제의 꿈 전주산업단지

 

 

전주경제의 꿈 전주산업단지

1962년부터 공업화를 지향하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맞추어 1965년 새한제지(현 전주페이퍼) 유치문제가 실현된 것을 계기로 전주 제1 산업단지가 팔복동 광활한 평야지대에 둥지를 틀고 1966. 08. 12. 건설부 고시 제204호로 공단조성계획이 인가되고, 1967~1969년 168만㎡의 공장부지가 조성되었고, 이어서 1985~1987년도에 전주 제2 산업단지 69만㎡가 조성되었다. 현재 제1·2산업단지에는 조립금속 48, 섬유의복 31, 전기 전자 25개업체를 비롯하여 음식, 1차금속, 목재, 종이 등 180여 업체가 입주해 있다.

황방산에서 본 전주 제 2공단 / 2021.07.22.

 

 

2004~2009년에는 11만㎡의 전주도시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전주기계탄소기술원 등 지역혁신센터 3개소와 40여개의 업체가 입주하여 자동차 기계부품 소재 산업과 나노 산업, 탄소섬유 및 CNT 등 최첨단 탄소산업 등 21세기 첨단산업에 대한 연구와 기술을 개발하는 지역산업의 코어로서 자리하면서 지역산업의 구조를 고도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효성탄소섬유 전주공장과 같이가개 사이에 있다. 2022.09.25.

 

전주반려동물놀이터 같이가개**(팔복동 4가) / 2022.09.25.

 

2008년도부터는 전주로 입주해오는 첨단산업 위주의 기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친환경복합단지 개념의 산업단지를 3단계로 구분하여 조성하고 있으며 그 1단계는 2010년 6월 완공을 목표로 29만㎡ 를 조성하고 2단계는 2011년 분양을 목표로 23만㎡를, 3단계는 2012년부터 조성사업을 시작하되 2016년에 마칠 계획이며 그 규모는 182만㎡로서 앞으로 전주경제를 이끌어 갈 100개의 강소기업과 역내매출 1조원 이상을 목표로 삼고 있어 전주시민의 100년 먹거리를 마련할 새로운 희망의 땅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주 제 1공단 조성: 1967.03.27. / 전주 제2공단 조성: 1985.07.06._럭셔리크로우 각주

**전주반려동물놀이터 같이가개: 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4가 1165

[글출처 : 전주시 마을조사사업 “동심(洞心)”찾기 팔복동_2015년 편]

신풍교

 

팔복동과 송천동을 이어주는 신풍교 / 2023.01.16.

 

전주탄소소재국가산업단지 예정 부지 2023.01.27.

 

 

삼례역-동산역을 지나 팔복동 공단으로 전라선의 지선이 갈라진다. 북전주역(간이역)을 지나 전주페이퍼 공장이 종점이다.

사진 하단에 기찻길이 보인다.

 

전주탄소소재국가산업단지 예정 부지 2023.01.31.

 

유적지가 상당히 많이 있어 보입니다.

 

현재 팔복동4가 일부와 여의동2가, 고랑동의 넓은 땅이 전주탄소소재국가산업단지(2024년 예정)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파랗게 보이는 천막은 이 일대에 유적, 유물이 나오고 있어서...일부 부지 변경이 있을듯 합니다. 아직까지 확인된 사항은 없지만 지나가며 본 모습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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