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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전주 동별 지명유래

전주시 송천동(松川洞), 전미동(全美洞) 지명 유래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3.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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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에 앞서 이 글의 출처는 전주시 마을조사 “동심(洞心)찾기” 마을조사서임을 밝힙니다. 또한 원본 조사서의 양이 방대하여 일부 발취 하였고, 기타 편집 및 사진은 전주 럭셔리크로우의 창작물입니다. 아래 마을조사서의 첫 장에 있는 조사개요 부분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조사개요

전주시와 ()전주문화재단은 20159월에 마을조사단을 구성하여, 전주시의 33개 행정동에 대한 마을 조사를 2018년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했습니다.

 

33개 행정동에 대한 조사는 20159월의 1차년도 조사를 시작으로 20184차년도 조사까지 총 4년에 걸쳐 진행됩니다. 연도별 조사 대상 동은 아래 표와 같으며 이러한 조사동의 선정은 마을조사단의 자문위원회와 전문위원회에서 논의된 시대별 전주시의 성장과정과 동별 공동체의 변화 및 지향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3개 행정동의 4차년도 조사
33개 행정동의 4차년도 조사

 

송천동과 전주천
좌측으로 전주천이 흐르고 사진 중앙으로 송천중앙로를 따라 송천동이 보인다.

 

1. 송천동의 유래

송천동은 본래 완주군 일대로 이 일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대표적으로 오송리와 시천리라는 마을이 이 지역을 대표하였다. 송천동이라는 지명은 1957년 오송리시천리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이 두 지역을 대표하는 각각의 이름을 따서 새롭게 만든 지명이었다. 과거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치인(金致仁)‘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만 명의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 수 있는 땅’이라고 하였다. 『호구총수』에는 송천동이라는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촌면에 속해있는 주된 마을로서 용소리(龍巢里)필천리(筆川里)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필천리‘붓내’를 한자어로 한 것으로 후에 시천리(時川里)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송천동의 중심 되는 마을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 외에도 오송리(五松里)가 대표적인 마을로서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57년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이 두 대표적인 마을의 송(松)자와 천(川)자를 따와 송천동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송천이라는 지명은 인위적이기는 해도 만경강, 전주천 그리고 그 안의 실개천이 많고 건지산 일대의 소나무 군락과 더불어 지세에 어울리는 지명으로서 적절한 것이었다. 송천은 순 우리말로 ‘솔내’라고도 불린다.

 

송천동은 기록상으로는 과거의 모습을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1990년대 시가지와 아파트 단지 등의 개발과 관련하여 다수의 고고학적 유적을 통해서 유서가 깊은 동네임이 확인되었다. 대표적으로 송천동2가유적, 송천동유적(A, B지구), 전주 오송리유적, 전주 사근리 구석기유적, 전주 송천동 97-29번지유적, 전주 송천동2가 488-3번지 유적, 전주 필천리유적, 오산리유적 등 다수의 유적이 도심개발 중에 발굴조사 되었다. 이 외에도 송천동1가, 2가, 전미동1가, 2가 일원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매장문화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외에도 조선후기~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사람들의 삶의 단상이 녹아있는 다수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2023년 송천동
2023년 송천동 드론촬영(신풍교 상공)

 

∙송천1동의 현황

송천1동은 법정동으로 송천동1가, 2가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건지산의 북쪽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송천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송천 중앙로를 기점으로 동쪽을 중심이 송천1동의 행정구역이다. 송천1동은 2001년 토지구획사업 이후 지속적인 아파트 단지의 조성으로 인하여 약 40,000여 명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는 동이다. 최근에는 35사단의 이전과 함께 에코시티의 건설로 인하여 인근의 도심 환경이 개선되고 있으며, 주변과의 교통 또한 편리하여 지속적으로 인구의 유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현재 아파트 거주지 주변으로 아직 전주시 예비군대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총소리 등 의 소음으로 인한 민원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유탄에 의한 위험성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또한 급격한 인구유입과 차량의 증가 등으로 인한 안전사고와 수용 공간 부족으로 인한 일부 도시계획의 전환 혹은 수정에 대한 요구도 이어지고 있다.

송천1동
송천1동

 

∙송천2동의 현황

송천2동은 송천동1가, 2가 일부와 전미동1가, 2가의 법정동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송천2동은 전주시의 교통의 요지로서 동부대로와 전라선 철도가 동-서로 관통하고 있으며, 완주 봉동읍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발달해 있으며 이 도로를 중심으로 많은 이동이 있다. 송천2동과 관련하여 전주천과 만경강의 본류와 연접하고 있으며 대부분 잔 구릉과 평지가 교차되는 지역으로서 차후, 개발과 관련하여 지형적인 요건이 유리한 지역이다. 현재는 전미동과 송천동1가, 2가의 하천 연접부를 중심으로 농경지가 구성되어 있고, 송천동 중앙로를 중심으로 서쪽 일대를 중심으로 현재 토지구획 후 대단위의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최근에는 송천동일대에 위치한 35사단이 임실로 이전함에 따라 그 부지는 개발이 진행되어 에코시티가 건설되었으며, 이 중 송천2동은 상업지구와 녹지지구가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송천2동은 송천1동의 거주구역과 다르게 전미동과 송천동2가의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환경 정화시설이 위치하고 있으며, 교통의 결절점이라는 특징에 의해서 현재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다. 또한 근래 전주시와 완주군의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혜택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이 또한 무산되어 차후, 전미동을 포함한 송천2동 외곽지역의 토지 이용과 개발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현재 송천2동은 넓은 동의 면적과 교통의 연결점, 인근 완주군 봉동읍 일원의 전주 제3공단과 관련하여 발전 가능성이 큰 지역으로 앞으로의 변화가 기대되고 있다.

송천2동
송천2동

 

2. 송천동의 유래와 주요지명¹

송천동(행정동 : 송천1·2동, 법정동 : 송천동1가·2가, 전미동1가·2가)은 전주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북쪽으로는 고산천과 소양천이 합류한 만경강의 본류가 북동-남서방향으로 흐르며, 전미동2가 진기마을 일원에서 전주천과 합류하여 폭이 넓은 하천으로 변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동의 남쪽과 남동쪽 사이에는 건지산 자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이러한 지형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북쪽과 서쪽의 전미동, 송천동1가 지역은 주로 평야 혹은 저구릉성 산지 지형이 펼쳐져 있으며 남쪽과 남동쪽을 중심으로는 건지산 자락의 서쪽 사면과 중첩되는 부분으로 선상지와 저구릉성 산지 그리고 소규모 계곡부가 중첩되는 지형을 보인다.

송천동의 동명의 변경 과정
송천동의 동명의 변경 과정(원문의 1996년~현재까지 '송촌' 오기를 바로 고침)

 

¹한글학회, 1991, 한글학회 지은 한국지명총람 12(전북편),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0, 한국지명유래집 전라·제주-

 

이러한 지세로 인하여 과거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치인(金致仁)‘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만 명의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 수 있는 땅’이라고 하였다. 『호구총수』에는 송천동이라는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촌면에 속해있는 주된 마을로서 용소리(龍巢里)필천리(筆川里)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필천리는 ‘붓내’를 한자어로 한 것으로 후에 시천리(時川里)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송천동의 중심 되는 마을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 외에도 오송리(五松里)가 대표적인 마을로서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57년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이 두 대표적인 마을의 송(松)자와 천(川)자를 따와 송천동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송천이라는 지명은 인위적이기는 해도 만경강, 전주천 그리고 그 안의 실개천이 많고 건지산 일대의 소나무 군락과 더불어 지세에 어울리는 지명으로서 적절한 것이었다. 송천은 순 우리말로 ‘솔내’라고도 불린다. 다음은 송천동에 속해있는 법정동인 송천동1가, 2가 ·전미동1가, 2가의 일대의 마을들과 자연지명 내용을 기존문헌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1) 송천동1가·2가 일대의 주요지명

송천동(送*川洞)  *送 보낼송

조선시대에는 전주군 회포면(回浦面)에 속하였다. 1914년 조촌면으로 바뀌었다가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435호 전주시 구역 확장에 따라 완주군 조촌면의 오송리, 시천리를 편입하여,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108호에 의하여 오송과 시천의 이름을 따서 송천동이라 하고, 오천동을 송천동 1가, 시천동을 송천동 2가로 하였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1가, 2가를 합하여 송천동이 되었다. 1996년 인구증가로 인하여 송천1동과 2동으로 분동이 되었으며 1998년에는 인근의 전미동을 송천2동에 편입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 고내(고천(古川))

고천이라고도 한다. 용흥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내(고천) 뒤로 전주환경사업소이성보미산교가 보인다.

고내 or 고천(古川), 용흥리

 

∙ 구와동(拘臥洞)

수사동 등성이 너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눈소고개

신충에서 발단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동역(東域)골

신동(新東, 新洞)이라고도 불렸다. 붓내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 두간다리*

발단 남쪽 앞에 있는 다리로 길이가 두 간²이다.

²()은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1()1.818182m이다.

*두간다리: 지금의 농수산물 시장 근처(롯데 아파트 옆)에 두간다리가 있었는데, 조선시대 과거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 미산(美山, 微山)

법정동 중으로 전미동의 “미산”과 동일하다.

 

∙ 발단(버들다리, 유교)

붓내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리 앞을 흐르는 내에 버드나무가 있었다는 데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 방애시암

팔학동 남쪽에 있는 우물로 전에 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뱀-굴〔사곡〕

붓내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의 지형이 뱀이 기어가는 형상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이는 과거 사행천의 흔적이 남아 있다가 논으로 전환된 것으로 추정된다.

 

∙ 붓내-방죽[필천제(筆川提)]

붓내 동쪽에 있는 방죽으로 넓이 약 1.5정보³이다.

³정보는 옛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로 1정보는 9,917.35537이다.

 

∙ 붓내보

와룡리 북쪽에 있는 보이다.

 

∙ 사근(砂根) 사금리(沙金里)

용소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산제시암

팔학동 동쪽에 있는 샘으로 팔학, 학암 두 마을에서 산제를 올리고 있다.

 

∙ 서당골

구와동 동쪽 뒤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 서당이 있었다 한다.

 

∙ 서당골시암

서당골에 있는 샘이다.

 

∙ 수사동(水砂洞)

팔학동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시천리(詩川里)〔봇내, 붓내, 글내, 필천, 시천〕

본래 전주군 조촌면의 지역으로서 보가 있으므로 봇내가 변하여 붓내, 글내, 필천, 시천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동리, 유교리, 와룡리, 용흥리, 용소리 일부와 회포면의 월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시천리라 하였으며 1957년 11월 6일 전주시에 편입되고,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108호에 의하여 송천동 2가가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송천동에 편입되었다.

 

∙ 신풍리(新豊里)

용소 서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 신풍리 호박밭

신풍리 서쪽에 있는 밭으로 이곳에서 나는 호박 맛이 좋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 신풍보(新豊洑)

신풍리 남쪽에 있는 보이다.

신풍교와 신풍보
현재(2023.05)의 신풍교와 신풍보

 

송천 공영자전거 대여소
송천 공영자전거 대여소(덕진구 송천동1가 318-12) 서호1,2차 아파트 사이 위치

 

 

∙ 신학암(新鶴岩)

학암 서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 안팔학골

팔학동 동쪽, 즉, 장군봉 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 오송리(五松里) [오송, 오송정(五松亭)]

본래 전주군 조촌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 정자 다섯이 있으므로 오송 또는 오송정이라 하였 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금리, 신기리, 신풍리와 용소리, 덕중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오송리라 하였다. 1957년 11월 6일 전주시에 편입되고,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108호에 의하여 송천동 1가가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 여 송천동에 편입되었다.

오송정(五松亭)
오송제(五松提)에 있는 오송정(五松亭)

 

 

∙ 오송-방죽[오송제(五松提)]

오송 동쪽에 있는 방죽으로 넓이는 약 2정보이다.

오송제(五松提)
오송제(五松提)

 

∙ 와룡-리(臥龍里)

고내 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등성이가 와우형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 용소-리(龍巢里) (용소)

송천동 1가 중심에 있는 마을로 와룡리에 누워 있는 용이 용흥리에서 일어나 용소리에 깃들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 용소-방죽

수사동 북쪽에 있는 소류지로 넓이 약 1,000평이었다.

 

∙ 용흥-리(龍興里)

발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용이 일어나는 형국이라 하는 데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 원소물재

학암 북쪽에서 용소로 가는 고개로 전에 원(院)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원-오송(元五松)

오송리의 원 마을이다.

 

∙ 장군-봉(將軍峰)

팔학동 동쪽에 있는 산으로 장군대좌형이 있다고 한다고 전해진다.

 

∙ 팔학동(八鶴洞)

학암 동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학 여덟 마리가 모여 앉은 형태이다.

팔학골과 학암마을 부분
팔학골과 학암마을 부분

 

팔학골의 백로 서식지
사진 중앙 하단이 팔학골의 백로 서식지다.

 

∙ 학암-리(鶴岩里)

용소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용소방죽 앞에 있는 바위에 학이 앉아 있는 혈(穴)이 있다고 전해진다.

 

 

2) 전미동1가·2가 일대의 주요지명

∙ 전미동(全美洞)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453호에 의하여 완주군 초포면의 전당리, 미산리를 전주시에 편입하 고,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108호에 의하여 전당과 미산의 이름을 따서 전미동이라 하는 동시에 전당리를 전미동 1가로, 미산리를 전미동 2가로 하였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1가, 2가를 합하여 전미동이 되었다.

전미동 일대의 주요지명
전미동 일대의 주요지명[2023년 전주 럭셔리크로우]

 

∙ 가매소

무근들 서쪽에 있는 논이다.

 

∙ 갯드랑다리

숨멀 동북쪽 개울에 걸쳐 있는 다리 터를 말한다.

 

∙ 무근들

주정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묵은 들판에 마을이 생겼다.

 

∙ 미산리(美山里)

본래 전주군 회포면의 지역으로서 미산(군 산천) 밑이 되므로 미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희룡리*, 주정리, 화리와 진길, 월평리, 연봉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미산리라 해서 초포면에 편입되었는데, 1957년 11월 6일에 전주시에 편입되었는데, 1957년 11월 6일 전주시에 편입되고,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108호에 의하여 전미동 2가가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전미동에 편입되었다.

*희룡리: 원본의 오기로 보입니다. 월평리의 서쪽마을 회룡리라 생각해봅니다. 

미산교와 벚꽃길
미산교와 벚꽃길

 

*전주천교와 하리교를 지나 소양천, 고산천, 전주천이 모두 합수되는 곳이 삼례교이다. 전주천교 옆으로 진기마을이 있다. 

전주 진기마을 지도
전주 진기마을 지도

 

∙ 진기마을: 전주시 덕진구 전미동 2가에 위치한 진기마을은 여름철 집중호우때 자주 비 피해가 있는 마을이다. 

진기마을 앞 농수로
진기마을 앞 농수로의 범람이 홍수를 일으킨다.

 

진기마을의 농수로에 있는 작은 교량은 미산1~5교까지 있다. 즉 진기마을의 미산교는 미산1~5교를 이야기한다.

미산배수펌프장 앞 전주천과 만경강의 합수지점
진기배수펌프장 앞 전주천과 만경강의 합수지점

 

전미동 2가 진기마을
전미동 2가 진기마을

 

 

∙ 백석리(白石里)

전당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백석’이라고도 불린다.

 

∙ 백석재

백석리에서 호성동으로 가는 고개이다.

 

∙ 백석저수지(白石貯水池)

백석리 남쪽 앞에 있는 저수지로 넓이는 32정보이다. 백석지(白石池) 또는 백석제(白石堤) 라고 불린다.

백석저수지(白石貯水池)
백석지(白石池) 또는 백석제(白石堤)

 

아래 좌측 사진은 백석저수지의 북쪽 둑방향, 우측 사진은 남동쪽 방향으로 에코시티 신축 아파트의 모습이 보인다.

백석지(白石池)
백석지(白石池)

 

∙ 서낭댕이

월평 서남쪽에 있는 터이며 전에 서낭당이 있었다.

 

∙ 숨멀

주정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들 가운데 있다.

 

∙ 신미산(新美山)

숨멀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 미산리 안에서는 비교적 새로 생겼다.

 

∙ 연방즉

연봉내 서쪽에 있는 마을로 근처에 연방죽이 있다. 연봉리라고도 불린다.

 

∙ 월평리(月坪里)

주정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지형이 달 모양이며 들판에 있다.

 

∙ 은평리(隱坪里)

전당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이효자문(李孝子門)

월평 중앙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효행 정문으로 이성삼(李省三), 이억주(李億周)부자의 효

행이 출중했다고 한다.

 

∙ 장고개

월평리에서 호성등 송전리 두간다리로 가는 고개로 전에 차편이 없었을 때 이 고개를 넘어 전주시내로 장보러 가는 길이었다.

 

∙ 전당리(全堂里)

본래 전주군 회포면의 지역으로서 전당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조리, 백석리, 신봉리, 은평리, 연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전당리라 해서 초포면에 편입되었는데, 1957년 11월 6일에 전주시에 편입되고,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108호에 의하여 전미동 1가가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에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전미동에 편입되었다.

2023년 전당리 상공
2023년 전당리 상공

 

필자는 어릴 적 외갓집이 있었던 추억이 있는 장소 전당리(全堂里)를 잊지 않고 있다. 추억을 살리고자 직접 사진을 찍었다. 

마을 초입
전당리(全堂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마을 초입에는 2008.02.01에 세운 장승*을 놓았다.

 

*장승

장승은 통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목상이나 석상을 가리키는 신목(神木)이다. 마을의 수문신·수호신,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이정표 등의 구실을 하며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나무 기둥이나 돌 기둥의 상부에 사람 또는 신장의 얼굴 형태를 소박하게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등의 글씨를 새기고 거리를 표시한 신앙대상물이다. 보통 남녀 쌍이 마주 서 있다. 장승제는 마을에서 지내는 동제의 일부에 포함되어 진행되는데 잡귀를 물리는 의식으로 매우 떠들썩하고 흥겹게 지내는 특징이 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숲거리 기념비
노거수 안내판

위 사진은 숲거리 기념비와 노거수 안내판으로 모두 전당마을 입구에 있다. 

전당리 노거수_왕버들
전당리 노거수_왕버들

 

노거수(老巨樹)

전주시 노거수 관리번호: 66

•수종: 왕버들  •수령: 300년(2015년 기준)  •나무둘레: 3.4m

•수고: 10m  •관리자: 전주시장  •소재지: 전주시 덕진구 전미동1가 1065번지

숲거리 (옛수구막)
숲거리(옛수구막) 기념비

 

숲거리 (옛수구막)*

이곳 숲거리는 약 300여 년 전 성을 알 수 없는 천미옹(일명 뙤집영감님)께서 풍수지리 및 역학상 뒷동산 줄기가 작아서 마을이 조리터로 형성되어 재앙이 있음을 아시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고 자식처럼 정성들여 가꾸었다고 한다. 그 후 전당인은 수많은 고난과 재해에도 굴하지 않고 따뜻한 인간애로써 화목 단결하여 날로 번영하였다. 그리고 숲거리는 울창한 모습으로 농부들과 회천다리를 거쳐 한양길을 오가던 나그네들을 위한 쉼터가 되기도 했고 어린이들에게는 좋은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숲들은 세월 따라 고사되었고 그 모습 변함이 안타까워 우리 전당마을 사람들은 옛일을 되새겨 여기 다시 식목하니 전당인의 기개와 애향정신을 드높이며 앞으로도 이 땅에 찬란한 역사가 새롭게 펼쳐질 것을 기원하는 바이다. 1993. 4. 13.

 

*수구막이숲: 좌청룡과 우백호가 산줄기로 감싸고 있는 마을 앞쪽이 허전하게 트여 마을이 노출될 때 이것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

전당저수지
전당저수지

 

∙ 중욱가래

월평리 북쪽에 있는 논이다.

 

∙ 진조리

은평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회룡리(回龍里)

월평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가리내(시 산천)가 부근을 굽이쳐 돌아 흐르고 있다.

 

∙ 흰개보

월평 서남쪽에 있는 보로 ‘신개보’라고도 불린다.

 

3) 송천동·전미동 일원의 주요 자연지명

추천대교-중앙 호반촌-우측 송천동
좌측 추천대교-중앙 호반촌-우측 송천동

 

∙ 만경강(萬頃江)

전라북도의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율치의 밤샘(또는 진틀, 657m)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 러 황해의 새만금사업지구로 유입하는 국가 하천이다. 상류로부터 김제 · 익산 · 군산 등의 여러 고을이 발달하여 있다. 완주군에서는 고산천, 전주에서는 전주천과 소양천, 익산에서는 익산천, 군산시에서는 탑천 등의 여러 지류들이 이 하천에 합류한다. 하류인 군산 일대의 조 석 간만의 차이가 커서, 만조시에는 전주천과 소양천 및 고산천이 합류하는 대천(한내 마을, 삼례대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예로부터 관개와 주운(舟運)에 이용되어, 완주군 봉동읍 의 구만리와 전주천의 추천까지 운항이 가능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하천의 발원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우리가람길라잡이』에서는 전북 완주군 동상면의 막은대미 재 북쪽 산록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의 합수 지점(삼례교)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의 합수 지점(삼례교)

 

'만경' 지명은 조선 시대 하천의 하류에 입지하였던 만경현(현 김제시 만경읍)에서 유래되었 다. 만경(萬頃)의 뜻은 '백만이랑'의 의미로 넓은 들을 의미한다. 만경강의 하류에 형성되어 있는 평야는 '김제'와 '만경'의 합성 지명으로 금만평야로 불리기도 한다. 새만금방조제도 여기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시대에 이 하천은 '사수(泗水)'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고』(김제)에 "사수(泗水)는 속칭 회연(回淵)이라고 하는데 그 아래를 율포(栗浦)라 일컫고 그 아래를 신창진(新倉津)이라 일컫는다."라는 기사가 있고, 동일 문헌의 전주조에서도 유사한 내용의 설명이 있 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전칭으로 불렀음을 보여 준다. 『대동여지도』에도 『여지고』에 수록 된 율포, 신창진 등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한편, 고산현 남쪽의 하천에 '남천(南川)' 지명이 표기되어 있어 부분칭으로 사용하였음을 보여 준다.

 

∙ 고산천(高山川)

전라북도 완주군의 동상면 율치(栗峙)에서 발원하여 고산면을 지나서 삼례읍으로 흐르는 하 천이다. 삼례읍 부근에서 소양천(所陽川)과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유입한다. 고산천에는 동상저수지, 대아저수지, 경천저수지가 있으며, 고산천의 물은 어우리(於牛里)에서 간선수로를 이용하여 호남평야의 관개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만경강의 지류로서 생태하천으로 습지가 보전되어 있다. 지명은 조선 시대 이곳에 있었던 고산현(高山縣)에서 유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산)에는 '남천(南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근원이 운제·주줄 두 산에서 나와 현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전주 경계에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 (고산)에도 "한 물줄기는 주줄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다른 한 물줄기는 여산(礪山) 문수산(文殊山)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관아의 남쪽에서 합쳐져서 전주(全州) 땅의 횡진(橫津)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동여지도』에 만목령(萬木嶺)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감싸 돌면서 만경강으로 유입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고산천과 만경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남천(南川) 지명이 표기되어 있어 만경강의 부분칭으로 사용 되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지고』에서는 "안천(雁川)은 일명 남천(南川)이라고 한다. 남쪽 3리에 있는데 사수(泗水)의 상류(上流)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만경강 지명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고산천(高山川)
고산천(高山川)

 

∙ 소양천(所陽川)

전라북도 전주시 완주군 소양면(所陽面) 만덕산(763m)의 북쪽 산록에 위치한 신촌리 일원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만경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이 하천은 상류부의 지방 하천 과 하류의 국가 하천으로 구분된다. 상류에서 발원하여 대상천, 용문천, 구약천과 함께 소양면의 물길을 이루면서, 원암천을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 소양면에 생활용수를 공급한다. 아 중천(牙中川)이 좌안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국가 하천으로 바뀌고, 북쪽으로 흐르면서 완주군 용진면(龍進面)과 전주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해동여지도』 등의 고지도에서 이 하천의 유로가 뚜렷이 묘사되어 있다. 지명은 발원지인 완주군 소양면에서 유래되었다. 『대동 여지도』에서는 웅치(雄峙)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만경강과 합류하는 일대에 '대야천(大也川)' 지명이 기재되어 있어 부분칭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소양천(所陽川)
소양천(所陽川)

 

∙ 건지산(乾止山)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의 덕진동에 위치한 산이다(고도:99m).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李翰, 생몰미상)의 묘소인 조경단(肇慶壇)이 있고 주변에는 전북대학교, 세계 소리문화의 전당, 전주 동물원이 있다. 조경단이 있어서 능산(陵山)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시대 지리지와 지도에 지명이 수록되어 있어 유래가 오래된 지명임을 보여 준다.『신증동국여지승람』(전 주)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이 산을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소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고 기록되어 있다.『여지도서』에 "진안현(鎭安縣) 마이산(馬耳山)에서 뻗어 나와 고을의 진산(鎭山)을 이룬다. 관의 북쪽 10리에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 한편,『팔도지도』에는 건지산이 '건상산(乾上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는 건지산의 오기로 보인다.

건지산(乾止山)
건지산(乾止山)과 우측에 조경단이 보인다.

 

∙ 추천(楸川)

전라북도 전주시의 송천동과 팔복동의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다. 전주천과 삼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소양천과 다시 합해지는 곳까지의 하천이다. 전주천과 삼천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추천대(楸川臺)가 있다. 덕진동과 팔복동 사이에는 다리를 건설하여 추천대교(楸川大橋)라 칭했다. 『여지도서』(전주)에는 횡탄(橫灘)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관아의 서쪽 30리에 있다. 남천, 삼천, 대야소천 물줄기가 합류하여 횡탄을 이루며, 또 서쪽으로 흘러가서 신창진을 이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추천(楸川)
전주천과 삼천이 합류하는 지점_추천(楸川)

 

3. 송천동의 전설과 주요인물

1)전설*

송천동 일원은 다양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주요마을을 중심으로 지명이 어떻게 유래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로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 그리고 강감찬 장군의 이야기가 확인되고 있다. 대체로 이들 인물에 대한 전설은 타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밝혀진 바가 있지만, 송천동 일원에서 회자가 된다는 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송천동의 역사 중에서 교통로와 관련하여 특정 동(지역)을 넘어 송천동일대에서도 이야기가 변조 된 형태로 수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2000년에 서해숙·이정덕 등에 의해서 조사된 송천동 주민들의 구술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가능한 주민들의 방언을 가감 없이 그대로 발췌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서해숙·이정덕·전정구·한미옥, 2001, 전라문화총서 7, 우리 전주, 전주 설화. 신아출판사.

 

∙ 인물이야기

① 이성계와 강씨

-구연일시 : 2000. 7.8.(토) / -구연자 : 이홍준(남,75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건지산의 강씨 땅을 이성계가 뺴앗으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는 이야기이다.

-내 용 : 건지산 있는데 동물원 있잖아. 그 뒤에가 호성동인데 강씨들 산인데 이성계가 그 산을 뻇을려고 하니까. 강씨들이 땅을 안 뺏겨갔고 시방 부자 되지 않았어. 지금 그 산이 강씨들 산인데 이성계가 그 산을 뺏을라고 하니까 안 뻇길라고, 강씨들이 안 뺏길라고, 이성계가 펄펄 끓는 기름에 빠져 죽으라고 하니까 다 빠져 죽어갔고, 근게 다 죽게 생긴게 그냥 스톱해 갔고 헐 수 없이, 그려서 강고집이여.

 

② 강감찬과 번개

-구연일시 : 2000. 7.8.(토) / -구연자 : 이홍준(남,75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하늘에서 벼락을 자주 치자 강감찬이 벼락을 손으로 분지러서 그 뒤로 번개가 반으로 줄었다는 이야기이다

-내 용 : 그 전에 강감찬이가 남이 않는 일을 혀. 하도 벼락을 많이 때린 게 일부러 말이여 벼락을 맞을라고 시암에다 똥을 눴어. 우물에다가. 새벽에 올거 아니여? 벼락이. 칼을 잡아갔고 부러뜨렸어. 전기데. 번개를 뿐질러 버렸어. 전긴데(*전기인데) 손으로 잡아갔고 분질러부써. 어! 말이 돼. 말도 안되는 소리여. 번개를 뿐질러버렸어. 그랬다고 그러거든. 응 그 뒤로 번까 반으로 줄었디야. 번개가.

 

∙ 풍습에 관한 이야기

-구연일시 : 2000. 7.8.(토) / -구연자 : 이홍준(남,75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고량리의 동구나무가 죽자, 고량리의 마을사람들이 백호리의 디딜방아를 훔쳐갔다는 이야기이다.

-내 용 : 저 회룡리는 돌아올 회(回),자. 용용(龍)자거든. 그리고 저짝 내 건너 ‘고량리’라고 있어. 내 건너. 고량리허고 백로히거든 여가. 근게 신계주막인게 백호리여. 저짝에는 고량리가 호랭이고 여그는 개고.

그래가지고 그전에 우리 어렸을 적에는 이 디딜방아 있잖어. 디딜방아가 있는디. 고량리 정 거장 옆에 가서 둥구나무가 서섰는디, 둥구나무가 죽은게, 우리 동네로 디딜방아를 도둑질하 러 왔어. 둥구나무가 죽은게, 우리 동네로 디딜방아를 도둑질 해와갔고. 그 놈을 갖다 놓으면 인자 뭣이 모면한다냐 해갖고. 그렇게 했는디. 가질러로 왔다가 우리 동네한테 들켜부렀네. (조사자 : 훔치러 올 때 누가와요?) 아 남자들이 오지. 남자들이 와서. 거기가 호랑이고 여기는 개거든. 그래가지고 인자 이렇게 상종이 되어가지고.

 

∙ 지명 이야기

① 오룡에 대하여

-구연일시 : 2000. 7.8.(토) / -구연자 : 이홍준(남,75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덕진구 송천 2동 일대에서 용과 관련한 다섯 개 지명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내 용 : 오룡 말하자면 용흥, 반룡, 회룡, 와룡, 기억안난디 용소, 그래서 오룡이여. 오룡이 여가 감싸여 있어. 용이 . 용소는 동사무소 있는디 있고. 반룡은 철도 못미쳐 가지고 반룡이여. 아 반룡사가 거긴가 보구나. 반룡은 용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반룡이지, 용흥은 용이 흥해서 용흥 이여. (조사자 : 그러면 여기가 명당인가요?)

으음 여기가 명당이고 말고. 그러니까 인물들 나지. 사람 생겨나믄 인물이지. 부자도 많이 나와. 부자는 아들 많이 낳는게 부잔게. 보이는 것은 언제 망할지 모르지. 아들 많이 나 여가. 와룡은 여리 가믄 삼성아파트(*송천동 소재)있는디 있지 거기여. 저쪽으로 동네 쪼그만한게 산 밑에가 있지. 와룡이지. 그 옆에가 용소리. 와룡은 누울 와(臥) 자 해서 용용(龍)자 해서 와룡이여. 희룡이 월평 이 마을이고, 용소가 삼성아파트가 있는 동네가 용소여. 송천동 동사무소 있는디. 용흥은 비행장이 있는디가 기여. 조금만 가면 있어. 요렇게 돌아가면 있어.

 

② 한양가는 길목의 신계주막

-구연일시 : 2000. 7.8.(토) / -구연자 : 이홍준(남,75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신계주막은 예전에 한양가는 길목이여서, 서울로 오고가는 등짐장사들이 쉬어가던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내 용 : 시방 여 앞에 동네. 여기 있는 동네가 그전의 거시기여. 신계주막이여. 여기 신촌마을이 신계주막이여. 저 한양서 내려와 가지고 경상도로 넘어갈라믄 그 질목(*길목)을 건너 가지고, 고산리라고 허거든. ‘고산리’라고 허는디, 산 있잖어. 거가 고산리여, 그렇게 해가지고 저 초포초등학교 있는데, 저기 해가지고 저 진안으로 그렇게 넘어가는 질이거든 이게.

(조사자 : 길목이네요?)

그전에 등짐장사들이 전부 여그 와서 자고 갔어. 등짐장사들이. 여가 신계주막이여. 서울서 오는 등짐장사들이 전부 여가 와서 쉬어 갔거든.

 

③ 두간다리

-구연일시 : 2000. 7.8.(토) / -구연자 : 이홍준(남,75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지금의 농수산물 시장 근처에 두간다리가 있었는데,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았다 는 이야기이다.

-내 용 : 롯데 아파트 옆에 다리 이렇게 놨제. 농수산물 시장 들어간데. 그게 두간다리여. 두간 이여. 왜그냐믄 일간, 이간 허잖아. 두간 바우로만 지어 놨는데, 바우 두 개를 놨어. 한문으로 쓰믄. 이렇게 말하자면 칸이 아니라 간이거든. 말허자면 두 칸. 그게 서울길이여. 저 남부지방 에서 올 적에는 길이 거기로 가서 서울로 가. 과거보러 가는 길이여. 두간다리여 그게. 전설의 고향에서 한 번 나왔었어.

그리 가야 가 서울을. 여기서 저만큼을 두 개를 놨는디, 비와도 떠내려가들 못혀. 여그서 저만씩한 놈을 두 개 놔서 그래서 두간이여 두간. 그래서 서울행 허는 사람들은 반드시 건너 가야혀. 과거를 보려면, 여기서 가자면 농수산물 시장 안건너고 들어가지 말고 바로 이짝이여. 어찌키나 유명허든지 서울서 구경왔다고 그려.

 

④ 삼례고개

-구연일시 : 2000. 7.8.(토) / -구연자 : 이홍준(남,75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삼례고개를 넘는 횟수만큼 수명장수한다 하여, 욕심많은 이가 오래 살기 위해 계속 넘나들다 결국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내 용 : 착한 사람이 삼례고개를 넘으니까, 신령이 나와서 “너 3년은 연장됐다”생명이. 근게 부자집 욕심쟁이한테 얘기했어. 착한사람이. 근게(욕심많은 사람이) 자기는 가서 막 열바퀴, 스무바퀴를 돌아버렸어. 더 오래살라고. 몽땅살라고. 근게 인자 골병들어 죽어부렀제. 근게 욕 심부리지 말라고 그런거여.

 

⑤ 맥을 끊어버린 장수날과 대장날

-구연일시 : 2000. 7.8.(토) / - 구연자 : 이준문(남,84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일본인들이 건지산의 명당자리인 장수날과 대장날의 맥을 끊었다는 이야기이다.

-내 용 : 건지산 있잖여. 지금 전북대학교 산. 거그가 명당 자리가 있어요. 거그 가믄 ‘장수날’이라고 있어요. 건지산 안에 오성리 방죽 위에가 있어요. 그러고 대장날이 있어. 거그에는 대장이 나와. 모두 건지산 안에 있어. 다 거시기 말허자믄 맥이 다 이렇게 각자 있지. 그래서 일본놈들이 거그를 끊어버렸어요. 대장날을. 그냥 시방 같으믄 사람을 시켜서 맥을 끊어부렸어. 인물이 나니까 혈맥을 끊어버렸당게. 혈맥을 끊어버렸어.

 

⑥ 용혈 묘자리

-구연일시 : 2000. 7. 8.(토) / -구연자 : 주재봉 (남, 78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용혈에는 용이 여의주를 문 용혈이라는 묘자리가 있는데, 어느 집안에서 그곳에 묘를 쓰고 발복했다는 이야기이다.

-내 용 : 근디 용흥가므는 묘소가 있어. 와룡리 옆에 가면 있어. 용혈에다 묘자리를 썼는디. 용 대가리여 그게. 근데 용은 여의주를 물어야 허거든. 여의주를 물어야 하는데, 왜정때 제방을 쌓음선 거그가 큰 바우가 있었는데 폭파시켜갔고 제방을 쌓부렀어. 그래가지고 그 묘가 망해부렀어 그냥. 그 바우가 여 의주인데. 쉽게 해서 짐(*연기)이 다 나가버렸지. 그래갔고 거그서 병사난 집 묘거든, 우리 한산 이(李)가 거시긴데 병수사가 났어. 병사, 수사 옛날에 계엄사령관이나 똑같혀. 용흥에 지금도 묘 자리가 있어. 시방도 시제 지녀. 일제 강점기 때 폭파시켜 가지고 다 망혀 든 안 했는디 자손이 귀했어. 그 양반 묘가 뭔고 허니, 거시기 임진왜란 때냐? 응 병자호란 때냐 의병대장으로 갔어. 그 왜냐허믄 옥과 현감을 했는데, 아니 순천현감인가 했는디. 그것을 그만두고서는 의병을 일으켜 가지고 의병으로 갔어요. 그래가지고 그 양반이 간게 벌써 임금이 항복을 해부렀네. 그래 도로 와 부렀어. 그래서 호가 서귀여. 도로 와부렀어. 임금이 항복했 는디. 그 의병이 뭔 소용이 있어. 호가 서귀여.

 

⑦ 와룡리의 쌍바우

-구연일시 : 2000. 7.8.(토) / -구연자 : 이홍준(남,75세)

-구연장소 : 전주시 덕진구 송천2동 월평마을 경로당에서

-줄거리 : 지금은 없어졌지만, 쌍바우에서 아들 낳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는 이야기이다.

-내 용 : 와룡리라고 있잖여. 와룡 거그가서 바우가 큰놈이 있어. 쌍바우도 있고 외바우도 있어. 근디 그걸 그냥 제방 싸움선 말이야. 돌이 귀한게 일본놈들이 그냥 난포질 해가지고 다 헐어 버렀당게. 지금은 없어. 바우가 두 개여서 쌍바우여, 바우가 뽀족허니 높았었어. 양쪽으로 똑같 이. 거그서 빌으믄 아들도 낳고 그랬어. 쌍바우에서. 어떻게 빌었냐믄. 무당을 시켜서 빌어. “아들 낳게 해주쇼.” 이렇게 바우에 가서. 음식 조금 장만해 갔고 가서 아들 낳게 해달라고. 아들 못 낳으면 얼마나 섭섭혀. 딸만 낳고 있으믄 아들 낳아 달라고 그래야지. 새벽에가. 고요할 적에. 여그는 습관이 새벽에 지금 각자 집으로 가서 지하수 같은데서 물질어 다가 철륭, 장꽝 그릇에다가 물 떠다 놓고 절 허고, 아들 잘되게 남편 잘되게 해달라고 얼매나 빌었다고요.

 

⑧ 팔학골

-전승지역 :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덕진소(德津沼)에 살던 천 년 묵은 어미 학이 장방산 밑에 작은 웅덩이를 발견하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며칠 후 알 8개를 낳아 놓고 덕진 연못에 잠깐 다녀오니 웅덩이에서 먹고 자란 용 새끼가 어미 학의 알을 품고 누워 있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어미 학은 알을 지키기 위해 용 새끼에게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계곡에는 흙이 날리고 나무가 뽑히는 등 천지가 요란스러웠다. 그 바람에 학의 알은 제 날이 되지 않았음에도 부화되어 학이 되었다. 어린 학들 은 울부짖으며 하늘로 치솟았고, 어미 학은 힘을 잃고 계곡에 떨어져 버렸다. 그렇게 어미 학 이 떨어진 자리가 오늘날 마을의 지형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입증하듯 장방산 기슭의 작은 웅덩이는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깨끗하고 시원한 생수가 샘솟는다. 그래서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새끼 학들이 헤엄치는 모습과 비슷하다 고도 한다.

 

⑨ 뱀골

-전승지역 :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마을의 지형을 보면 꼭 뱀이 놀라 고개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웃 마을 팔학골 에서 학이 나래를 펴자 깜짝 놀란 용 새끼 한 마리가 펄쩍 뛰다 보니 이웃 마을에 떨어져 내린 것을 보고 뱀이 놀라 건지산을 향해 고개를 쳐든 데서 뱀골이라고 한다.

 

2)주요인물

송천동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서 태어나거나 활동을 하였던 주요한 인물은 명확하게 확인되 지 않는다. 다만, 조선 후기에 호남어사로 이곳에 부임하였던 김치인이 송천동의 지세를 보고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 즉 만 명의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 수 있는 땅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김치인에 대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치인(金致仁)16)

생몰연도 : 1716(숙종 42)∼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동부승지 김징(金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김구(金構)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재로(金在 魯)이며, 어머니는 심징(沈澂)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748년(영조 24)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해 예문관전적(藝文館典籍)과 정언(正言)을 거쳐 문 경어사(聞慶御史)로 나가 문경현감의 탐욕을 다스렸다. 이어 지평(持平)과 문학을 거쳐 1750년에는 호남어사로 활약하였다. 1752년 승지에 오르고, 이어 대사간·비변사부제조(備 邊司副提調)·대사성·부제학(副提學)·이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지냈다. 1762년 이후 이조·호 조·형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765년 우의정에 올라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하였 다.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영중추부사를 거 쳐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 1772년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로 직산현(稷山縣)으로 유배되었으 나, 반년 만에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다시 서용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어 고부 겸 승습주청사(告訃兼承襲奏請使)의 정사 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다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봉조하가 되어『명의 록(明義錄)』편찬을 주관하고, 1785년에는『대전통편(大典通編)』편찬을 주관하였다. 이 듬해 영의정으로 기용되어 정조의 명으로 당쟁의 조정에 힘썼다. 성품이 치밀하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로, 나라의 전고(典故)에 정통해 이를 정사에 잘 활용하였다. 편저로『명의록(明義 錄)』·『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가 있다. 시호는 헌숙(憲肅)이다.

 

 

4. 송천동 및 전미동의 주요 도로

 

솔내로()

-송천동 1265-74 / -송천동 2293-5

솔내는 송천(松川)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솔내는 건지산 자락의 서남쪽과 가르내 사이에 위치하며, 1957년 조촌면의 오송리와 시천리가 전주시로 편입되었다. 냇가나 저수지·(여울이 많아 전주시 북부권의 물길과 바람길의 통로였다. 시천(동아아파트와 롯데아파트 도로의 동쪽지역), 용소리(용소초등학교부근), 붓내(솔내성당 서쪽지역), 고내(하수 처리장) 등이 이에 연관되는 지명이다.

 

오송로()

-송천동 1가 산60-5 / -송천동 111-2

오송은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 하여 오송리로 불렸다 한다. 오송의 가운데 글자인 송과 시천의 가운데 글자인 천을 합성하여 송천이라고 하였다. 현재 오송지구 송천진흥더 블파크 남쪽지역으로 건지산자락의 북동능선과 북사면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바로 옆에는 오성제라는 저수지가 있다. 오송로는 송천동 솔빛중학교에서 우측으로 산길을 따라 송천현 대2차아파트와 송천진흥더블파크 남쪽으로 난 도로이다. 아직 개발되는 중이어서 송천동 오송리 인근 도로로 예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와룡로()

-송천동 1608-1 / -송천동 2664-50

와룡로는 송천뜰 한양아파트 사잇길에서 북쪽으로 쌍용아파트1,2단지, 동아아파트와 롯데1 차아파트 서쪽으로 난 도로이다. 이곳 지명은 송천뜰 북쪽에 있는 와룡리의 지명을 부여한 도로명이다. 와룡리는 뒷산 등성이가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뒷산이 명당자리라 하여 사람들이 묘를 많이 썼다고 한다. 송천동의 용흥, 와룡, 용소와 전미동의 회룡, 팔복동의 반룡을 합해져 오룡이라 하는데, 와룡리에 누워있던 용이 용흥리에서 일어나, 회룡과 반룡에서 반대로 돌아 용소리에 깃든다는 이야기가 지명과 관련하여 전해지고 있다.

 

시천로

-송천동 2945-1 / -송천동 1543-93

오송리와 함께 송천이란 동명을 만든 시천(詩川: 붓내, 글내, 필천, 봇내)리는 현재의 송천 2동 동아아파트와 롯데아파트 도로의 동쪽지역으로 지금은 상가로 변해있는 지역이다. 송천동에는 오송제와 더불어 시천제라는 방죽이 있었으나, 이곳의 시천제는 1998년 이전에 매립되어 송천도서관과 솔내청소년수련관이 세워졌다.

 

신풍로(용소로 도로명 변경)

-송천동 1684-1 / -송천동 2613

송천동 전진자동차공업사에서 전주농수산물시장까지 가는 길이다. 북쪽으로 대명궁전아파트와 제일아파트를 거쳐 동아아파트와 롯데1차아파트에 이르는 도로명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바람 따라 떠돌다가 정착한 마을이라고 하여 신풍리라 하였고, 전주 8미의 하나인 애호박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두간로()

-송천동 1832-1 / -송천동 1812-1

발단리 남쪽에 있었던 두간다리를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이 다리는 현재 농수산물시장 서쪽에 있던 독다리로, 가운데에 큰 돌을 괴어놓고, 그 위에 큰 돌 두 개를 걸쳐 놓아 두간다리라 했다 한다. 이 다리를 통해 고산·운주·대전을 거쳐 서울로 갔다 하며, 웬만한 장사들은 다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다리이다. 남쪽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 한양까지 갔던 다리라 한다. 두간다리 앞에는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자빠트리면 발단리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곳 주민들이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한다. 두간길은 농수산물 남쪽에 있는 지역을 블록을 설정하였다.

 

붓내길

붓내는 솔내성당 서쪽지역으로 붓내의 어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붓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흘러가는 내란 뜻으로 한자로는 필천(筆川)’이라 하며, 또 하나는 마을의 서쪽 가르내에 보가 있어 봇내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여 붓내가 되었다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가르내에 있는 보에서 물레방아를 돌려 방아도 찧었는데, 이때 나오는 분(가루)으로 하여 분내라 불리다가 붓내로 변했다고도 한다.

 

천마산로

-송천동 2529-7 / -호성동 2631-23

솔내고등학교 삼거리에서 동쪽방향으로 현대주택을 거쳐 현재는 길이 없지만 진흥더 블파크23단지인 현 동부우회도로의 전주시 차량등록사업소 교차로에 이르는 길이다. 전주시 차량등록사업소 우측에 있는 천마산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하늘에서 내 려오는 말의 형상이라고 하여 천마산으로 불리고 있다(현재 일부 도로 개설).

 

사근길

사근(沙根)은 용소 동쪽에 있는 마을로 송천동 오송리 맞은편에 있다. 사근리는 사금리 또는 사금평이라고 불리었으며, 현재 현대3차아파트에서 송천동 예비군훈련장에 이르는 지역이다. 송천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와 송천 2지구 주공아파트 공사현장에서의 문화재가 발굴된데 이 어, 35향토사단과 송천동 오송지구에 인접한 세진아파트 건설현장에서 구석기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지역이다.

 

전미로

-송천동 2655-5 / -전미동 274-8

전미동은 송천동에서 비행장을 굽이 돌아 하리교를 거쳐 삼례로 가는 옛길의 주변에 위치 하고 있는데, 서쪽은 전미동 1, 동쪽은 전미동 2가이다. 전미동은 대미봉에서 송천동의 고내 앞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의 북쪽 자락을 고산천이, 서쪽 자락은 가르내가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며, 대미봉에서 내려온 산줄기를 전미동에서는 송산 또는 고살뫼라 부르는데, 송천동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도로는 동부우회도로 송천동 발단리 4거리에서 전미동을 거쳐 하리교에 이르는 도로다. 법정동 통합이후 사용된 법정동명인 전미를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완주군 초포면의 전당리와 미산리가 1957년 전주시로 편입되면서 전당과 미산의 첫 자를 따서 전미동이라 하였다.

 

전미중앙로

-전미동 21229-1 / -전미동 158-1

전미동 2가 전당리 현 백석로에서 전미동 월평 미산초등학교 앞을 지나 전주천의 미산교에 이르는 도로다. 법정동 통합이후 사용된 법정동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1957년에 완주군 초포면 전당리와 미산리가 전주시로 편입되어 전당리가 전미동 1, 미산리가 전미동 2가가 되었는데, 두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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