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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전주 동별 지명유래

전주 동별 옛지명 유례 3편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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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전주 동별 옛지명 유례의 글 출처는 전주시청 홈페이지 입니다. 중복 지명 및  . → , 오기 변경은 전주 럭셔리크로우 편집 · 사진입니다. 원본을 유지하였고, 빨간색 글씨는 럭셔리크로우의 수정 또는 추가 부분입니다. 

자만동에서

 

 

전주 동별 옛지명 유례 3편 목차

28.송천동 / 29.솔가지전거리(동완산동) / 30.쇠장터(전동) / 31.쇠장터(전동)==>오기 / 수돗골(완산동)

32.숲정이(진북동) / 33.소금전다리(다가동) / 34.아중리(우아동) / 35.안경다리(교동) / 36.어은골(진북동)

37.왜막실(우아동) / 38.용머리고개(서완산동) / 39.약전골(다가동~전동) / 40.유연대(중화산동)

41.은행나무골목(풍남동) / 42.인봉리방죽(중노송동) / 43.자만동(교동) / 44.장승백이(평화동) / 45.좁은목(동서학동)

46.진영터(중앙동) / 47.진밥들, 진밭들(진북동) / 48.추천교(덕진동) / 49.투구봉(동완산동) / 50.팔학골(송천동)

51.죽뱀이(인후동)==>오기 // 52.한뎃벌(교동) / 53.흑석골(동서학동)

 

 

 

28.송천동

조선조 영조(英祖)가 시조묘(始祖廟)를 조경단(肇慶壇)에 봉안할 때 영의정인 김치인(金致仁)이 중대한 일을 도신(道臣)에게 전임시켜서는 아니된다고 하고 전주에 봉심차(奉審次) 내려왔을 때 건지산(乾止山) 일대를 둘러 보았다.

송천동 골짜기를 가리켜 건말미초(乾末微初),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라고 하면서 감탄했다는 설이 있다.

만여명의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 수 있는 자리라고 풍수지리설을 들어 예견을 한 것을 보면 현재 향토사단이 들어서게 되었음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겠다.

당시 송천동(松川洞) 일대는 적송(赤松)이 울창했고 산계곡 끝이 되는 서쪽으로 전주천 물이 넘치게 흘렀을 뿐만 아니라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맑아 솔밭과 내를 연유하여 송천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29.솔가지전거리(동완산동)

현재의 매곡교를 건너 완산칠봉을 가는 길에서 서서학동(西棲鶴洞)가는 초록바위까지 자유당 시절까지만 해도 연탄이 없는 시절이라서 솔가지며 장작 장수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을 이뤘다.  6.25 이후에도 솔가지가 흔하게 팔려 전주 솔가지라고 하면 유명했다.

 

 

30.쇠장터(전동)

현재의 매곡교(梅谷橋)다리 밑 위아래가 모두 쇠장터였다. 남문 밖 장날과 같이 2, 7일장으로 쇠장이 섰다.

쇠장이 서는 날 새벽부터 각 지방에서 몰고온 소몰이꾼들과 황소, 송아지가 법석을 떨었으며 송아지가 우는 음매소리는 구슬펐다.

간이식당처럼 차린 술판에서는 주모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소값을 털어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며, 한 쪽에서는 투전판이 벌어지는 등 쇠장터의 애환은 서민들의 생활단면을 그대로 나타내 주었다.

오랜 동안의 쇠장터는 일제시대 전주천 정화라는 미명아래 현 교대부속국교 남쪽 자리로 쇠장이 옮겨진 뒤로 매곡교 다리 밑의 쇠장터는 사라졌다.

 

 

31.쇠장터(전동)==>오기 / 수돗골(완산동)

조선조시대부터 완산칠봉 계곡에서 흐르는 생수는 삼복(三伏)더위에서도 얼음물처럼 차다하여 얼음골이라고도 불렸는데 일제시에 좁은목의 전주천 물을 끌어 올려 상수도 수원지를 만든 뒤 얼음골에서 수돗골로 바뀌어 부르고 있다.

 

 

32.숲정이(진북동)

숲정이는 숲머리의 어원으로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러한 주위의 숲정이는 완산동 초록바위와 더불어 구한말,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이 고장의 극형자(極刑者)들을 처형하는 이른바 형장(刑場)이었으며 역대 교난(敎難)을 겪어 나오는 동안 대부분의 가톨릭 교도들이 바로 숲정이에서 처형되었으며, 가톨릭계인 해성중?고등학교가 그 자리를 잡은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사실 한국 가톨릭사를 보면 종교 박해는 5차례의 교난사를 갖고 있는데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1839년의 기해대교난(己亥大敎難) 그리고 이 고장 전주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1866년 병인교난(丙寅敎難)을 들 수가 있다.

전주사람으로 병인교난(丙寅敎難)때 처형당한 신자로서는 조화서(영세명 :베드루), 이명서, 정문호, 손선지(孫善智), 한원서, 정원지, 조윤호, 김사집, 김영삼, 한베드루, 임관서 이외에도 성명을 알 수 없는 2명의 순교자까지 합쳐 13명의 신앙이 두터운 신자가 처형을 당했으며 거기에 여신도 역시 상당한 숫자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신도는 전주의 숲정이에서 희생당한 숫자이고 보면 도내 고을마다 희생자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병인년(丙寅年)의 대박해는 그 규모나 기간으로 봐서 사상 유례없는 처참한 교난이었다.

이 중 확실하게 밝혀진 일가족의 희생을 보면 1802 1 31(음력 1801 12 28) 이누갈다와 그 일가족이 순교 당하면서 숲정이에는 피가 미처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하며, 1968 10 6 7명의 순교자가 복자 위에 시복되었다.

 

 

33.소금전다리(다가동)

현재의 완산교 머리를 소금전다리, 염전교라고도 하는데 다리 건너 용머리고개를 넘어서면 경목선(京木線)을 잇닿게 된다.

조선조시대에는 소금이 귀했고 또 소금장수들이 한데 모여 소위 할인판매를 못하도록 서로 견제했는데 소금장수들이 모여 장사판을 벌였대서 소금전다리라고 했다.

 

 

34.아중리(우아동)

현 전주상고(현재 전주 제일고등학교)의 교정인 마당재를 넘어서면 아중제(牙中堤)의 맑은 물이 진주처럼 넘실대고 있다.

이 호수는 서서히 초포 들녘을 비옥하게 만들어 10월 상달이면 벼를 누렇게 만드는 근원이 되고 있다.

호반을 끼고 돌아가는 길은 산책로로 이름나 있어 아중리 유래의 풍치를 더해 준다.

 

 

35.안경다리(교동)

홍교(虹橋) 또는 남천교(南川橋)는 슬치재를 따라 내려 흐르는 한벽당 아래를 가로질러 놓였던 석교(石橋)를 말한다.

돌을 다섯 동가리로 나누어 무지개형으로 짜서 다섯 개의 창문처럼 뚫어 쌓았대서 안경다리라고 했다.

이 다리는 물 가운데에 기둥을 박고 우뚝 솟아오른 그 웅장한 위용이 정교하다 못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옥류동(玉流洞) 산신이 중바위 산의 바윗돌을 뽑아다 쌓은 듯 하다고 하여 감탄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더욱이 다리 위로 남쪽 하늘을 삼킬 듯이 눈을 부릅뜨고 앉은 다섯 개의 용()머리를 새겨 놓았었다고 하는데 승암산이 화기(火氣)를 품었다고 해서 부성의 재난을 사전에 막자는데 연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승암산의 화기를 막기에는 용의 힘이 모자랐던지 그 후 홍수가 잦아 무너져 버리고 용머리는 물에 떠내려 가버려 이제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36.어은골(진북동)

유연대(油然臺)의 등을 활 휘듯 지긋이 휜 듯 병풍친 고랑을 말하는 데 그 안은 넓적하게 깔려 나간 터널같다.

갈건야복(葛巾野服)의 은사골로도 알려진 이 곳은 숨은 잉어의 혈같은 골짜기 형상과 같다고 하여 어은골(魚隱洞)이라고 했다.

 

 

37.왜막실(우아동)

왜막실(倭幕實)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주둔한 곳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다소의 왜군들이 군복을 벗고 이 곳에다 취락의 터전을 마련했었는데 통칭 왜막실로 불렸다.

이 곳에 정착한 왜군 잔류민들은 한인으로 귀화하고 성씨를 붙였는데 왜막실 김씨(金氏) 또는 전주 김씨(金氏)등이 이들 시조가 되었다.

완산부성 밖 동쪽 귀퉁이 골짜기에 자리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작정한 이들을 받아들인 우리 조상들도 인정이 많아 왜막실 김씨라고 자처하는 이들을 모른체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38.용머리고개(서완산동)

마한(馬韓)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이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일수이신(一首二身)이 태어나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은 용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하자 인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이 때 전주천 물은 좁은목에서 폭포로 떨어진 물이 지금의 다가산 밑에서 급히 소()를 이루어 물이 많았고 물살 또한 급류였다.

일수이신(一首二身)의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일본관헌의 농락이었고, 이 전주천에서 자란 용이 천년을 기다려 승천(昇天)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고 전주천 물을 모조리 삼키고 하늘에 오르려고 힘을 한번 쓰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고 말았는데 사실은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천년에서 하루가 모자란 것이었다고 한다.

이 때 용이 떨어진 곳은 완산칠봉의 계곡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은 원시림이었다.

몸부림치다가 승천하지 못한 한()을 품고 용()의 머리가 지금의 용머리고개에 떨어졌으며, 이 후로는 우거진 송림이 정리작업을 한 듯 깨끗하게 오솔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오늘날은 경목선(京木線)이 되었고 용머리의 형상이라고 하여 용머리고개라고 했다.

 

 

39.약전골(다가동~전동)

현재 다가교에서 다가우체국과 영신당한약방 사이를 약전골이라고 했다. 약전골은 약전동(藥廛洞)이라고 하여 약재를 파는 전포(廛鋪)가 들어선 곳을 말했다.

조선조 17대 왕인 효종(孝宗) 2년 때 시작하여 1943년까지 약3백년간 약령시(藥令市)를 이뤘었는데 일종의 약재매매 시장으로 대구와 청주, 공주, 진주, 전주 등에 있었다.

전주에서는 1923 11월 처음 개장되었는데 한약방과 건재상을 하던 박계조(朴啓祚)를 중심으로 한의약계 인사들이 모여 전주 약령시 영성회를 결성하므로 근대적인 약재시장이 개설된 곳이다. 약령시는 봄, 가을 두 차례에 약 60일간 개장되었는데 전주에서는 가을에 개설되었다. 1943년 생약통제령(生藥統制令)에 의해 전주 약령시는 막을 내렸다.

 

 

40.유연대(중화산동)

완산칠봉 동남 기슭의 우람한 산악이 포물선을 그으며 전주천의 물살을 끼고 진북사(鎭北寺)에 이른 잔등을 유연대(油然臺)라고 했다.동 터오르는 새벽의 산등성이가 마치 기린이 여의주를 토해내듯 주황빛으로 찬란하다 하여 유연대라고도 했다.

 

 

41.은행나무골목(풍남동)

전주시내에는 도()나무 한 그루를 비롯해서 시()나무 6그루, ()나무 20그루가 있는데 그 가운데 단연 은행나무가 수적으로 우세한 데도 유달리 풍남동 은행(銀杏)나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 또한 은행나무 골목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리베라호텔 앞길에 있는 세종당 한약방에서 오래 전 동사무소가 있던 사거리까지를 은행나무 골목이라고 한다.

조선조 태종(太宗) 2년에 최덕지(崔德之)가 심었다는 이 은행나무는 원래 최덕지의 인품이 특출 나고 오복을 다 갖춘 사람으로 알려져 이를 흠모하는 후학(後學)은 물론이고, 여인네들까지도 상사병을 앓을 만큼 남자다운 기상이 넘쳐흘렀다. 최덕지가 세상을 떠나자 과거를 보러 떠나는 과객들이 알성 급제를 위해 은행나무 앞에서 최덕지의 학문을 숭상하는 묵념을 올렸으며 매년 정월 초하루가 도면 후학들이 제사를 지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설화를 들자면 최덕지를 상사하던 여인네들은 핑계삼을 만한 일이 없자 이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면 애를 못 낳아 쫓겨나려던 부인네도 떡두꺼비같은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매년 정월 초하루 남정네들이 제사지내고 나면 바로 여인네들도 구름처럼 몰려와 아들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눈물 흘려가며 빌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완산부성내에 하고 많은 은행나무가 많았는 데도 풍남동의 은행나무 골목으로 그 명성을 떨치었다.

오늘날에도 정월 초하루 밤이 깊을 때 간혹 부인네들이 와서 묵념을 하고 서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42.인봉리방죽(중노송동)

오늘날 문화촌(文化村)이라고 불리는 중노송동 옛날 공설운동장 자리가 방죽이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기린봉 기슭을 타고 흘러내린 계곡물과 빗물이 흥건하게 고였으며 주변에는 오래된 정자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여름철 피서객들이 모여드는 도시 중심변의 유일한 유원지였다.

6.25사변 이후까지도 그 아름다운 정취가 시민들의 눈길을 자주 끌어 들였었는데 그 자리를 메우고 공설운동장을 만들었다. 상단은 경마장, 하단은 공설운동장이 되었는데 주로 하단을 인봉리 방죽이라고 했다.

 

 

43.자만동(교동)

승암산(僧岩山)과 기린봉이 새끼친 높고 낮은 산봉우리를 가리켜 오목대(梧木臺), 이목대(梨木臺), 발산(鉢山)이라고 하며 이들이 둘러싼 골짜기를 자만동(滋滿洞)이라고 했다. 그 이름은 녹엽성음(綠葉成陰), 자만지운운(子滿枝云云)의 고가(古歌)에서 따라 붙인 마을터 이름이라 했다. 또한 이 골짜기는 전주 이씨 발상지라 해서 발이산(鉢李山)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발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승암산과 발이산을 넘어서는 형세가 노승출동(老僧出洞)같다고 하여 발산이라 전한다.

이 곳 자만동은 이태조(李太祖) 5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를 두고 얽힌 사연이 있는데 그가 유년기 때 동산인 바릿대산에서 청운을 꿈꿀 때 마을 아이들과 날마다 어울려 진법(陳法) 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하는데 그 진법놀이를 한 마루턱에 수 백년 자란 아름드리 괴목이 있었고 후대에 와서 괴목을 장군수(將軍樹)라고 불렀다.

 

 

44.장승백이(평화동)

사방목신으로 이정표지(里程標識)를 하기 위해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표지목을 꽂았던 곳이다. 이 이정표는 부성 주변의 5(2km), 10(4Km) 마다 세워 길손들의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해 주었다.

본래 장승으로 불리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푯말은 잡귀를 쫓는 액땜의 푯말로 먼길을 떠나는 길손이 도적을 만나지 않고, 우환이 없이 잘 다녀오도록 무사를 비는 사방목신(四方木神)으로 공대했다.

어느 고을마다 중요 지점에는 나찰귀(羅刹鬼), 탈의 화상을 새긴 목신(木神)을 세웠는데 키는 9척 이상이요 두 눈을 부라리고 잡귀를 쫓아냈다고 한다.

이 장승들은 오가는 길손들의 눈에 차차 가까워 올 때나 이 장승을 지나 멀리 갈 때마다 길손에게 애환을 안겨 주고 또한 길손의 애환을 묵묵히 지켜보는 낯익은 풍정이었다.

이제 찾아 볼 수 없는 사방목신(四方木神)이 세워졌던 곳은 동쪽으로는 현재의 우아동인 소리개재, 서쪽으로는 중화산동(中華山洞)인 가마귀골, 남쪽으로는 서서학동(西棲鶴洞)인 난전 미륵댕이, 북쪽으로는 덕진동(德津洞)의 추천교 자리 가련내에서 길손의 애환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전주에서 평화동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본 사람들은 장승백이라는 단어를 모를 수가 없다. 

 

 

45.좁은목(동서학동)

전주천의 상류는 동남방 약 20Km 지점의 노령산맥 분수령인 슬치(瑟峙  230m)에서 발원하여 행정구역으로는 완주군 상관면과 임실군 관촌면의 군 경계를 넘어 남쪽으로는 섬진강 경사면과 북쪽의 만경강 경사면의 분수령을 넘어 전주남원간 국도를 따라 남하하고 있다.

이러한 전주천이 전주에 진입하는 곳을 좁은목이라고 하는데 전주천이 이 좁은목을 통과할 때를 생각하면 흥미가 진진하다. 그것은 좁은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규암맥(硅岩脈)이 줄기차게 뻗어 있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암벽이 물이 흐르는 방향을 정면으로 가로막아 뚫고 흐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규암맥의 높이가 현재의 남고사(南固寺) 산기슭 정도의 높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라 상류의 하상 높이도 그 이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상황을 예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홍수 때가 되면 많은 수량이 좁은목에서 폭포수로 바뀌어 장관을 이루다가 차츰 암맥이 낮아져 여울로 흘렀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이 규암맥을 가리켜 병풍바위라 하는데 병풍바위 부근을 좁은목이라고도 한다. 이 좁은목에는 삭탈 관직당하여 귀양길을 나서는 탐관오리의 도포자락에 찬 바람이 스며든다는 유찬로 등의 열두곡(十二曲) 설화 등이 매우 흥미롭게 전해져 오고 있다.

 

 

46.진영터(중앙동)

현재의 중앙극장 주변이 수비대청 바로 진위영(鎭衛營)이 있었다. 최근세에 들어와 전라감영이 위치한 전주에 우리의 군대가 배치된 것은 1871년이었다.

전라감영 휘하에 3백여명의 신식군대가 자리잡았다고 하나 통장이니 별장이니 하는 전근대적인 편제였고 신식총이 아닌 활의 일종인 주살이라는 무기로 무장했었다.

이 곳 전주의 난후청은 그 후 4년만인 고종(高宗) 12년에 해체되고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고종 19년인 1882년 같은 자리에 진남영이라는 병영을 설치했다가 다시 7년 후인 고종 26년 이번에는 다소 정예화된 군사 3백여명으로 교체하면서 병영의 이름을 무남영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병사와 병영의 명칭이 몇 차례 바뀌더니 고종 32년인 1895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 전주와 평양 두 곳에 진위영을 설치하여 1개대대의 군대를 다시 배치했으니 이 때 비로소 신식총을 가진 신식군대가 전주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6-25 후에까지 중앙극장 남쪽으로 정구장이 있었는데 이 자리는 군마장이었다.

우리 고장의 신식군대가 주둔했던 자리를 진영터라고 해서 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7.진밥들, 진밭들(진북동)

성지평(城址坪)과 장대평(長大坪)에서 뻗어내린 모래내(沙川)벌안 진밥다리 쪽을 진밥들, 연반평(燕飯坪)이라 불렀는데 가활만민(可活萬人), 식솔대(食率垈)에서 연유되어 진밥들. 진밭들이라고 불렸다.

 

 

48.추천교(덕진동)

4백여년 전 가르내(현재의 下可마을)일대는 전주 이씨들이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비록 생활은 어렵다 하더라도 화목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추탄(楸灘)의 부친 달성공(達誠公)이 중병으로 몇 달 째 누워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위독한 사경을 당하게 되었다. 인근 비석날(현재 팔복동 버드랑주)에 거주하는 명의 소식을 듣고 선걸음에 달려가 동의보감에 의한 처방에 따라 명약첩을 받아들고 급히 귀가하는데 때 마침 뇌성벽력을 치며 폭우가 쏟아져 내려 삽시간에 전주천은 범람했다. 추탄은 암담한 가운데 촌각을 다투는 부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앞뒤를 가릴 것 없이 홍수가 넘쳐대는 전주천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냐! 제방을 넘실대던 물살이 양쪽으로 좌악 갈라지면서 추탄이 걸어 갈 길이 트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 저것 가릴 겨를이 없는 추탄은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와 숯불에 약을 정성스럽게 달여 시각을 다투는 부친의 입술을 적셔드리자 잠시 후 전신을 흥건히 적시는 땀을 흘린 부친은 숨을 급히 몰아쉬고 난 뒤 마침내 기사회춘하여 완쾌되었다. 대홍수로 넘실대던 냇물은 추탄이 건너간 다음에 합쳐져 흐르게 되므로 그의 지극한 효성은 하늘도 도왔다는 인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을 뿐만 아니라 효행의 귀감이 되어 마을 주민들은 힘을 모아 나무다리를 놓기로 했다. 오늘날 추천교의 자리가 된 나무다리를 놓았을 때도 추탄(楸灘) 자를 따서 추천교(楸川橋)라고 했다. 냇물이 갈라진 웃마을을 상가리(웃가르내), 밑으로 갈라진 마을은 하가리(아랫가르내)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1925년 콘크리트 암거 교량을 건설하고, 옛 이름대로 추천교(楸川橋)라고 했는데 팔복동 황방산 밑 추천대를 중건(重建), 그 효행을 기리고 있는데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 추탄선생, 조대비(嘉善大夫, 兵曹參判兼 知義禁府事, 司憲府, 大司憲, 楸灘先生, 釣臺碑)라고 새겨진 비는 추천교를 흐르는 물을 지켜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듯하여 보는 이들의 감회를 솟구치게 해주고 있다.

 

 

49.투구봉(동완산동)

산세가 마치 군인들의 투구처럼 보인다고 해서 투구봉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완산칠봉의 봉우리 가운데 유달리 벼락을 많이 맞아 나무 하나 살아남지 못한 산등성이로 남아 있다. 설에 의하면 산꼭대기에 철이 많이 숨겨 있어 벼락과 뜻이 맞아 자주 벼락을 맞았다고 한다.

 

 

50.팔학골(송천동)

마을의 지형이 꼭 학 한 마리가 나래를 펴 장방산의 장군봉을 향해 나르는 듯 하다. 덕진소(德津沼)에서 살던 천 년 묵은 어미학이 장방산 밑에 있는 작은 둠벙을 발견하고 나래를 접었다.

몇날 며칠 기진맥진하여 알 8개를 나놓고 정든 덕진 연못을 잠깐 다녀와서 보니 둠벙에서 먹고 자란 용새끼가 제법 의젓하게 알을 품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어미학은 죽을힘을 다 모아 용새끼에 달려들자 그 바람에 잔솔이 우거졌던 계곡은 흙이 날고 나무가 뽑히는 천지개벽의 순간처럼 요란스러웠다.

이통에 학의 알은 제날이 되지 않았는데도 부화되어 학이 되어 주둥이를 하늘로 치솟아 울부짖고 어미학은 기진하여 계곡에 떨어져 버린 그 자리가 오늘날 마을의 지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장방산 기슭의 작은 둠벙은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를 줄 모르고 항상 깨끗하고 시원한 생수가 치솟아 여름이면 아동들이 물장난을 치는 모습이 꼭 새끼학들이 헤엄치는 풍경과 같다고 한다.

 

 

51.죽뱀이(인후동)==>오기 / 팥

천성이 게으른 홀아비 촌로는 이 곳 저 곳에 청혼을 해도 선뜻 나서는 혼처가 없어 그럭저럭 살아온 것이 50을 넘겼다.

그런데 옛날 총각 때 어머니가 쑤어 주던 팥죽맛은 잊지 않고 연연했다. 날이면 날마다 팥죽 생각을 하게 되니 자연 팥죽이 먹고 싶어 미칠지경이 되어 생각다 못해 이웃 아낙네에게 간청하여 1년만 팥죽을 단골로 쑤어 달라고 하고 그 대가로 논 한 마지기를 주기로 했다. 1년이 넘고 보니 이빨은 빠지고 김치거리 조차 씹을 수 없는 잇몸이 되어 팥죽 쑤어 주기 계약은 또 1년을 연장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숨을 거두기까지 팥죽을 쑤어 주던 옆집 아낙네는 자연히 그 촌로의 논마지기를 다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팥죽뱀이라고 아예 이름이 붙여진 고라실 논 옆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해버린 여인네 집 근처를 지금도 팥죽뱀이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 이 포스팅을 하면서 생각해보니... 신기하게도 필자가 인후동에서 근무했을 때에 평생 돈을 주고 사먹지 않았던 팥죽을 사먹었던 곳이 있다. 팥칼국수, 새알팥죽이 보리밥(비빔밥)과 함께 나오는 식당으로 줄을서서 먹을만큼 유명한 음식점이있었다. 우리나라의 지명에 얽힌 단어와 이야기는 정말 그냥 나온게 아니다!

 

 

52.한뎃벌(교동)

오목대(梧木臺)와 한벽당(寒碧堂) 사이에 일세의 영웅 견훤(甄萱)이 쌓았다는 토성은 오늘날 그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으나 그 토성 아래로 하늘이 내려앉은 듯한 푸른 물이 넘실대는 전주천 물이 흘렀고 그 갯벌같은 진흙탕 골짜기를 한뎃벌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옆의 오목대와 이목대란 이름은 오동(梧桐)나무와 배나무 숲이 우거졌대서가 아니라 원 이름은 어목대(於穆臺), 미목대(眉目臺)라고 한다.

이 한뎃벌에는 조선조 초기부터 동래(東萊) 정씨(鄭氏) 가문의 한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대대로 가세가 빈곤하여 10여대 후손에 내려온 정희회(鄭希會)때에 와서야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고 밥 먹고살게 되었다.

벼슬길은 승승장구 뻗어 검정(僉正)에 올랐고 슬하에 여복(汝腹), 여립(汝立)을 두었는데 이가 바로 난세의 호걸 정여립(鄭汝立)이었고 정여립의 출생지란 점에서 한뎃벌은 더욱 이름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양쪽으로 산등성이에 가면 아늑한 마을은 비록 부자마을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무엇인가 의기가 투합되고 있다고 해서 선거 때마다 입후보자들이 고개를 제대로 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풍문이 떠돌 정도로 입김 센 동네라고 하는데 아마 정여립의 출생지와 관련지은 말인 듯 하다.

 

 

53.흑석골(동서학동) ==> 오기 / (서서학동)

속칭 한지(韓紙) 골짜기라고도 불리는 이 계곡은 전주교에서 완주군 구이면을 향해 가다보면 공수내 다리가 나오는데 이 공수내 다리에서 동쪽으로 뻗은 계곡을 올라가면 흑석골이 나온다.

흑석골은 바위가 반절 흙이 반절이라고 해서 반석리(半石里)라고도 했는데 이 바위조차 모두 검은빛을 띄고 있어 속칭 흑석골(黑石谷)이라고도 했다.

검은색을 띈 바윗덩이인 흑석(黑石)은 일명 흑연(黑鉛)의 성질을 띈 돌덩이로 한때는 이곳의 돌을 캐어다가 감마제(減磨劑)나 차량의 도말용(塗抹用)의 원료인 흑연, 흑석이라고 하여 인기가 높기도 했다.

이 흑석골의 계곡물은 일 년 내내 마르지 않아 전주 특산물인 한지 생산공장이 들어서 한지골이라고도 했다.

 

※ 구독자님의 의견으로 흑석골은 현재 서서학동으로 한지골(한지 골짜기), 닥무지작업을 한다 해서 닥무지골이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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