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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전주 동별 지명유래

전주 동별 옛지명 유례 2편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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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전주 동별 옛지명 유례의 글 출처는 전주시청 홈페이지 입니다. 중복 지명 및  . → , 오기 변경은 전주 럭셔리크로우 편집 · 사진입니다. 원본을 유지하였고, 빨간색 글씨는 럭셔리크로우의 수정 또는 추가 부분입니다. 

전주 객사=풍패지관

 

 

전주 동별 옛지명 유례 2편 목차

1.가마귀골(중화산동) / 2.가재미골(인후동) / 3.간납대(교동) / 4.강당재(중화산동) / 5.고내(송천동)

6.곤지산(동완산동) / (곤지산=완산칠봉) / 7.공기골(동서학동) / 8.공수내(서서학동) / 9.기령당(동완산동) / 10.노루목(교동)

11.따박골(중화산동) / 12.도마다리(인후동) / 13.두무소(동서학동) / 14.마당재(중노송동) / 15.명지골(인후동)

16.모래내다리(진북동) / 17.묵샘골(교동) / 18.묵샘골(교동) =>오기 같고, 물왕멀(중노송동) 변경이 맞는듯

19.미륵불공(=이두리골, 동서학동) / 20.뱀골(송천동) / 21.보광재(동서학동) / 22.분내(송천동) / 23.싸전다리(전동)

24.서낭댕이(인후동) / 25.선너머(중화산동) / 26.설대전다리(전동) / 27.세내(삼천동)

 

 

1.가마귀골(중화산동)

현재의 예수병원을 찾아가는 포장 잘된 고개를 촌노(村老)들의 구술(口述)에 의하면 옛날에는 다당부리가 돋아난 듯 울퉁불퉁하다고 하였는데 이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얌전한 여인네의 가리마처럼 반듯하게 뚫린 모래밭과 마주치게 되고, 이 세내(三川)를 끼고 한동안 걸어가면 훤히 트인 들녘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들녘은 완산부의 3대들녘의 하나인 금사평(錦絲坪)머리밭이다. 이 구릉지대 안에는 조상의 만년(萬年) 유택지(幽宅地)인 소위 명당(明堂)이 많다고 하는 외칠봉(外七峰)의 한 봉우리인 매화봉(梅花峰)이 있으며 매화봉 아래 꽃밭정에는 돌곡지(桃花地)로 넘나드는 따비골이 유명하다. 그 건너편으로 먹음직스런 복숭아 과수원이 만경창파처럼 쫘악 깔려 있는데 이 곳을 가마귀골이라고 하는데 이 곳에 오두지맥(烏頭之脈)이 있다고 해서 가마귀골이라고 한다. ()에 의하면 조선 명종(明宗)때 어느 다섯 선비들이 이 가마귀골 머리에 정자를 짓고 모악산 그 아래 들녘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벗삼아 세정에서 묻은 티끌을 털면서 시조를 읊었다니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풍정을 자아낸다.

 

 

2.가재미골(인후동)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들어 마을의 지형이 마치 가재미 모습 같다고 한 구전은 그릇된 설이며 가잠동(可潛洞), 가장곡(可葬谷)을 가재미골이라고 했는데 감여가(堪與家)의 설에 의한 것 같다.

 

 

3.간납대(교동)

간납대란 전주팔현(全州八賢)으로 알려진 운암형제(雲岩 兄弟)의 충절을 낳았대서 간납대라고 한다.

전주 한산(韓山) 이씨 가문에 무인세족(武人世族)이 있었는데 이들은 속칭 병사터라고 한 경기전 동쪽길 건너 전 전주경찰서 자리에 모여 살았다.

병자란 때 운암(雲岩) 형제는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까지 진군하여 혈전을 벌이고 대승을 거둔 뒤 고향에 돌아와 기거한 곳이 바로 기린봉 아래에 있는 적취정(積翠亭) 골짜기로 전 영생고등학교에서 국군묘지에 이르는 곳이다.

산중턱에 올라 당시의 어지러운 시사(時事)를 개탄하고 때로는 한운야학(閑雲野鶴)과 같이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간납대란 그가 한 때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지낸 까닭에 간()과 납()의 두 자를 따서 간납대(諫納臺)라고 했다고 한다.

 

 

4.강당재(중화산동)

경기전에 인접해 있던 향교를 서원너머로 옮기고 화산서원(華山書院)을 설립, 요즘 말로 학교군(學校群)을 형성한 현재의 예수병원 주위는 선비들로 항상 들끓었다. 이렇듯 많은 선비들의 통행로가 된 예수병원 길은 당시 노송이 우거진 오솔길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오르내리는 선비들이 글을 읊는 소리는 바위와 나무에 부딪쳐 골짜기는 온통 글읽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런 연유로 학문을 닦는 교실을 강당이라고 했으며, 강당을 향해 오르내리는 고개라고 하여 강당재라고 했다.

서원너머의 화산서원비(華山書院碑)만이 홀로 당시의 애환을 지켜보고 있는 듯 하다.

 

 

5.고내(송천동)

고내란 고랑, 골안의 옛말로 냇물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전주천의 간선과 지선이 뚜렷하여 농업용수에 불편이 없는 상태이나 조선조시대에는 건지산 일대의 계곡물은 너무 차가워 농업용수로는 적합치 못해 둠벙처럼 고인 고내의 물이 유일하여 마을 이름이 연유되었다.

 

 

6.곤지산(동완산동) / (곤지산=초록바위)

남천교 쪽에서 바라본 곤지산은 꼭 말처럼 보인다고 해서 갈마음수봉(渴馬飮水峰)이라고도 하는데 곤지산의 산형(山形)이 목마른 말이 초원을 찾아 강변에 목을 축이는 형상이라고 한다.

조선 말엽에는 참형자들을 효수하던 곳이라 하여 눈총을 받았던 곳이며, 숲정이 좁은목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삼동(三冬) 내내 바람이 차고 거세여 삼복 무더위 때는 피서객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 또한 해가 설핏하거나 비오는 날은 한낮이라도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아녀자들은 아예 발길을 돌리지 않았으며, 장정들까지도 간담이 서늘하다고 하여 곤지산 골목은 피해 다녔다고 한다.

 

 

7.공기골(동서학동)

아흔아홉 고개의 골짜기를 지녔다고 해서 공기골이라고 유래되었다. 공기동(孔基洞?孔器洞), 죽림리(竹林里)라고도 한다.

높은 골짜기라서 산새의 울음소리며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가 신선들이 풍월하는 시정을 되살려 주는 듯 하여 유원지로서도 이름난 곳이다.

 

 

8.공수내(서서학동)

백제 무왕 때 고달산 기슭에 보광사(普光寺)를 지을 당시의 설에 의하면 보광사를 올라가는 고개 형국이 호랑이 목(伏虎項)같다고 해서 복항사(伏項寺)라고 했다고 한다.

이 복항재에서 남으로 평촌 쪽은 험한 바위들이 솟구친 가파른 고갯길이라 하여 부성의 화객도(華客道)로 소문나 있는 고개이며 이 고개 마루에 서있는 당산나무(堂山木神)의 주변에 돌을 던지며 소원 성취를 빈 성황당이 있다.

이 성황당을 돌아 북쪽 흑석골로 내려서면 면경소, 두무소, 벼락소, 용천소 등이 있는데 이 물이 넘쳐서 서천에 합류되는 곳을 남고천이라 하며 이 개울을 두고 이두리에 얽힌 설화를 심어 공수천(空手川) 다시 말해서 공수내라고 불리고 있다.

 

 

9.기령당(동완산동)

현종(顯宗)때 세운 군자정(君子亭)을 오늘날에는 기령당이라고 한다. 본래 군자정은 용두봉을 지나 반선봉을 건너 옥적봉인 빙고동 아래 부지에 있었다. 영조(英祖)때 서문 밖 민가에 큰 불이 일어났었는데 뜻밖에 광풍이 몰아쳐 삽시간에 부성안은 화염에 휩싸였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은 단숨에 서천을 넘어 군자정까지 태워 버렸다.

그 때 홀연히 군자정의 현판은 불길에도 타지 않은 채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가 이 곳 잔등에 떨어지자 지신(地神)의 조짐이라 하여 선비들이 목욕재계하고 다시 군자정을 세웠는데 현재는 기령당(耆寧堂)이라고 한다.

 

 

10.노루목(교동)

남고산 꼭대기가 승암산을 바라보며 쏜살같이 곤두박질치며 내려오다가 좁은목 못미쳐 까무라친 형국이라 하는데 이 때 놀란 것은 바로 노루라고 한다. 또 승암산 꼭대기가 서북쪽 발산(鉢山)을 돋아놓고 한 가닥을 슬쩍 비껴 사뿐히 내려앉은 듯한 형세인 한벽류 부근을 옥류동이라고도 한다.

이 곳 옥류동 터를 멀리서 바라보면 대숲을 끼고 호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형국인데 노루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놀다가 목이 말라서 물있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라 기절 초풍하여 숨을 곳을 찾아 날뛴데서 노루목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다.

 

 

11.따박골(중화산동)

따박골, 다비골이라고도 한다. 따박골은 완산칠봉의 한 봉우리인 용두봉(龍頭峰)을 서편으로 내려가면 용의 목줄기라 하는 가파른 바윗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쌍용골 구릉지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 일대를 따박골이라고 한다.

따비란 농기구의 한 종류인데 이산의 돋아난 형국이 마치 따비를 닮은 구릉처럼 보인다고 해서 따비골이라고 불러왔다.

 

 

12.도마다리(인후동)

고려 중엽인 8백여년 전, 조셋(草浦) 마을에 사는 경주 김씨 문중은 수대를 이은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으나 인심이 가마귀 욕심이라 가난한 이웃을 돕기는 커녕 표독스럽기만 했다.

한 예로 스님들이 시주를 받으러 마을에 들르면 시주는 고사하고 콩주머니 전대를 머리에 묶고 물을 부으면 콩이 불어 머리가 쪼개어질 듯 아픈 대퇴고문을 하여 스님을 내여 쫓는 일들을 김씨 문중 청년들은 업으로 알았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옥동자 스님 한 분이 마을을 찾아가 확인하려고 시주를 청했더니 청년들이 달려들어 옥동자 스님에게까지 대퇴고문을 하여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자비를 내려 주려는 스님들을 박해하는 고약한 청년들의 버릇을 고쳐 주기로 마음을 작정한 옥동자 스님은 김씨 문중 선산을 두루 살펴본 즉 기린봉에 연결된 와우항(臥牛亢) 허리에 6기의 김씨 선조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시 명당 자리에 묘를 쓴 덕으로 부자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을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본 즉 구수(구시)다리라고 불리는 다리가 있어 이의 명칭을 바꾸면 액을 당하리라고 판단하고 도마다리라고 하기로 하였다.

도마다리라고만 하면 허리가 잘리듯 명당과 마을이 떨어지는 것으로 예견한 스님은 구수다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다리를 건너는 행인에게 동전 한냥씩을 주면서 도마다리 잘 건넜구나라고 한 마디씩 하라고 일러주었다.

또한 인근 마을에 시주를 나서는 스님들에게도 시주를 해주는 사람마다 구수다리를 도마다리라고 하면 복을 많이 받게 되니 누구나 이 말을 하도록 하라고 일렀으니 며칠 지나자 구수다리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그저 할 일 없이 앉아서도 도마다리라고 씨부렁대니 도마다리는 금방 유명하게 되었다.

차츰 인심을 잃은 조셋 마을에는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일꾼을 구할 수가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조셋 마을의 논밭은 잡초만 무성하고 점차 가세는 기울어져 생계가 막연하게 되었다.

문중 회의를 연 김씨촌 노인들은 집집마다 돈을 거둬 구수다리에서 큰 잔치를 벌여 주지육림에 인근 주민들을 초청했다.

완산부성내의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많이 몰려 배불리 먹고 돌아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역시 도마다리라고 하면 먹을 것도 생기니 앞으로도 도마다리라고 해야겠구나하였다니 조셋마을 김씨 문중은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이후로 도마다리는 더욱 유명해졌다.

 

 

13.두무소(동서학동)

남고천(南固川)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미륵산을 바라보며 관음사 부근 산허리를 굽어도는 부근을 두무소(杜舞沼)라고 부른다.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막료 중에 당대 명유(名儒)이며 천문지리에 해박한 두사청(杜思廳)이 있었는데 임란 때 이 곳 완산부성(完山府城)에 당도하여 산세를 보다가 명나라 중원의 서주(徐州)와 흡사하다고 감탄하면서 서북쪽의 터진 곳이 있어 수적지지(授敵之地)의 형세이며 남으로 뻗은 천혜의 요새지라고 했다.

이러한 산세에서는 비록 천만의 대적이 침노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침을 흘리며 감탄하는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곳까지 답사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남고산의 기암괴석이 자유분방하게 흩어져 내린 풍치는 무질서하면서도 그 가운데 어쩌면 바위덩이라도 사람이 가져다 쌓아 놓은 듯한 정교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은 옥과 같이 맑아 청간수 같고, 심화가 끓는 듯 급히 흐르다가 잔잔히 흐르는 물에 비친 하늘은 청자빛을 머금어 꼭 신선대에 오른 듯 하여 두사청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

과연 명소로다, 자고로 산자수명한 곳이 많다 한들 어찌 이 곳에 비길거냐 바로 이 자리가 명지(明地)로다하며 경탄한 나머지 스스로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청간수를 마시고 있던 장군의 말도 덩달아 춤을 추니 하늘도 땅도 사람도 짐승도 한 몸이 되어 신선춤을 추었다. 그런 후로 사람들은 두사청이 진중을 떠나 자연에 취해 진중무(陣中舞)를 추었다고 해서 이 곳을 두무소(杜舞沼)라고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14.마당재(중노송동)

현재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정 주변을 가리켜 야단법석(野壇法席)자리라고 한다.

흔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왁자지껄 수선을 피울 때 이런 경우를 야단법석을 떤다고 하는데 야단법석의 어원은 불가에서 나온 말로서 부처님께 올리는 불공예법 가운데 파격적인 집전의식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항간에서 걸핏하면 야단법석을 벌인다고 쉽게 빗대어 말을 하고 있는데 불가의 의식범절을 차분하게 따져 들어가면 지극히 엄숙하고 경건함 속에서 거행되는 집전 과정이 마당재인 것이다.

완산부성 밖의 사고사(四固寺)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사찰에는 4월 초파일이 아니더라도 연중 계절따라 불전 의식이 계속되었는데 불교문화가 꽃피울 때라서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불도들을 한꺼번에 다 법전에 수용할 수 없었다.

각 사찰의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어찌하면 좋을 거냐고 몇날 며칠 숙의한 끝에 소위 합동 집전을 하는데 중지를 모아 넓은 터를 구하게 되었다. 상업고등학교 부근의 나지막한 구릉지대가 적격지로 선정되어 야단(野壇)에 법석(法席)을 마련했다고 하여 야단법석(野壇法席)이요, 넓은 마당에서 재를 지냈다고 하여 마당재()라고 한 것이 오늘날까지 마당재라고 알려졌다. 완산부성내의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지금 마당재에 간다고 말한 것은 목적을 말한 것이 행선지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15.명지골(인후동)

명주베의 집산이라고 해서 명지골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당초 이 곳은 소나무가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골짜기로 도적무리가 날뛰던 소위 우범지대로 할 일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드나들지 않던 곳이다.

조선조 말엽인 1894년 갑오경장 때 난을 피해온 선비들이 인적이 드문 이 곳에 하나 둘 정착하고 생활하다 보니 화전만으로는 연명을 할 수 없게 되자 뽕나무를 심고 누에고치를 시작했다.

북문 밖에 사는 한 노인이 명주 베짜기를 잘한다는 소문을 염탐한 선비들은 그 노인을 모셔다 놓고 요즘말로 특별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원래 성정이 고운 선비들이었고 하루가 급한 것도 아닌 터라 한올 한올 명주베 짜기에 정성을 다한 결과 어느 다른 지방에서 생산된 명주베보다 올이 가늘고 옷감이 좋아 나무랄데 없는 일품이 되었다.

차츰 선비들이 짠 명주베의 이름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한적했던 골짜기에는 명주베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들끓게 되었고 이름없던 마을은 차차 명지골로 부르게 되었다. 일제 초기에는 선비들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매사가 눈에 가시처럼 보인 이 곳 명지골을 말살시키기 위해 인가 부근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하나 둘 마을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1978년 전주시의 제 6토지구획 정리사업으로 이제는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변모를 가져왔다.

 

 

16.모래내다리(진북동)

기린봉 뒷 기슭이 원천인 사천(砂川)은 전주의 외곽지대를 돌아 흐르다가 진북동 북방에서 본류와 합류하고 그 상류에서 삼천과 합류된다. 그런데 기린봉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도중에 모래가 많이 쌓여 모래내라고 했으며, 1935년 교량을 만들고 모래내다리라고 했다.

 

 

17.묵샘골(교동)

묵샘골은 자만동 즉 오목대와 이목대 사이의 작은 골짜기로 녹두묵을 많이 만들어내어 유명하였고 이 곳의 샘물은 어느 곳보다 물맛이 좋아 녹두를 갈거나 갈아 놓은 녹두묵을 만들 때 치는 샘물로 적격이라 간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녹두묵 외에도 도토리묵으로도 유명하다.

 

 

18.묵샘골(교동) ==>오기 같고, 물왕멀(중노송동) 변경이 맞는듯

누구나 택시를 타고 전고 뒤 물왕멀에 가자고 하면 어느 운전사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서슴없이 데려다 준다.물왕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명한 곳이다. 20여년 전만 해도 좁은 고삿길이었는데 현재는 전주의 남북로가 관통 되었다.견훤(甄萱)의 출생이 지렁이정기를 타고 낳다는 데서 전해오는 설화에 연유되고 있으나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씨로 고쳤다고 한다.견훤이 진훤으로 발음되는데서 지렁이의 정기가 떠돌고 있으며 견훤은 이 물왕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궁궐을 지어 도읍으로서의 방위를 튼튼히 했으며 성곽을 쌓았다고 하는 데서도 물왕멀의 유래는 전해오고 있다.

 

 

19.미륵불공(=이두리골, 동서학동)

옛날 난전 땅에 이두리라고 하는 노총각이 살고 있었다. 늙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살림인데도 끼니를 끓일 보리쌀 한 톨이 없어 동냥질을 나섰다.건장한 몸으로 어찌 막일이라도 하지 않고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날마다 비렁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느냐는 부성 사람들의 질책이 무서워 달산 기슭을 그저 맴돌 듯 서성거리고만 있는데 대여섯 발이 넘는 장죽을 짚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 어찌 너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서성거리는고, 인생이 불쌍하여 소원 한 가지만 들어주겠노라. 자자손손 영화를 누리고 싶느냐 아니면 당대 영화냐 둘 중에 하나만 말하라하자 이두리는 서슴없이 자자손손 뭡니까 우선 당장 배때기부터 원없이 채워 보고 싶소이다라고 하니 이두리를 가엾게 쳐다보던 백발노인은 이두리 손을 꼬옥 잡고 한 곳에 이르더니 죽장으로 땅방아를 찧으며 하는 말인 즉 이 곳에 조상의 뼈를 묻으라한 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이두리는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으나 하여튼 부친의 백골을 당일로 파다가 이장을 했더니 몇 해 안되어 당대에 부럽지 않은 갑부가 되었다.그러던 어느 날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고달산 서쪽 기슭 비바람 속에 묻혀 있는 미륵불을 옮겨 세우되 상체는 일월성신(日月星神)을 받게 하고 하체는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노인의 현몽대로 했다.일설에 의하면 괴목이 서 있는 옆구리를 뚫고 솟아났다고도 하는데 하여튼 이두리는 당대의 소원을 성취했고 미륵불은 노인의 현몽대로 옮겨졌다.오늘날 석불리(서서학동) 괴목나무 옆 미륵불이 바로 이두리 사연에 얽힌 미륵불이고, 이두리의 무덤도 그 부근에 있다고 하여 미륵불골 또는 이두리골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20.뱀골(송천동)

마을의 지형을 보면 꼭 뱀이 놀라 고개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웃 마을 팔학골에서 학이 나래를 펴자 깜짝 놀란 용새끼 한 마리가 펄쩍 뛰다 보니 이웃 마을에 떨어져 내린 것으로 봐서 뱀이 놀라 건지산을 향해 고개를 쳐든데서 뱀골이라고 한다.

 

 

21.보광재(동서학동)

공수내 못미처 장승백이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꺾으면 옛날 도수장으로 가는 길이 나선다. 보광재는 전주천과 세내의 양 쪽 물줄기를 보내는 분수령의 하나로 백제 무왕(武王)때 보광사(普光寺)란 절이 있었다고 하여 보광재라고 한다.

지사(地士)들의 설에 의하면 호랑이 목의 헐이라 하여 복호항지맥(伏虎項之脈)이라고 하여 보광재라고도 하는데 완산부성 변두리 치고는 깊은 계곡으로 유명하였다.

 

 

22.분내(송천동)

분내란 어원은 필천(筆川)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분내골의 형상은 붓으로 일점 획을 그어 내린 것과 같다 하여 붓내라고 하였는데 건지산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마을 끝에서 보를 쌓아 물레방아를 돌려 나락방아도 찧었다고 해서 붓내보다 분내로 불리었다.

 

 

23.싸전다리(전동)

전주교를 99.1월 전주시 명칭 제정위원회에서 싸전다리로 명명함

전주의 큰 길목인 팔달로 끝머리에서 남원, 순창으로 이어지는 다리였는데 옛날에는 이 다리목을 끼고 좌우로 싸전들이 늘어져 앉았었다는 데서 나온 명칭이다.

 

 

24.서낭댕이(인후동)

우리 나라는 삼한시대부터 토속신을 섬긴 기록이 있다.

백제 때도 역대 임금들이 천지신에게 제사하며 시조 묘당을 세웠고, 고구려에서는 음사(淫杞)가 많았고, 신라시대 역시 묘를 비롯하여 왕묘(王廟)를 세우고 명산 대천(大川)을 섬겼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선황신제사가 추가되더니 조선조시대부터는 민간신앙의 서낭댕이라고 하여 마을의 터를 지키는 소박한 신앙이 내려왔다.

사직단은 토(), ()의 신()을 섬기는 곳이며 국토의 안태와 오곡의 풍요를 빌었고 기우(祈雨), 방역을 위한 고사가 행해졌다. 이로 보면 성황당(城隍堂)은 시민생활 깊숙이 파고든 유일한 민간신앙이다.

전주의 성황사(城隍杞)는 고려 신종(神宗 2)때 전주목의 사록겸(司錄兼) 장서기(掌書記)인 이규보(李奎報)가 기린봉 북록에 세우고 성지의 수호를 치제 한데서 비롯되어 조선조시대에 이르러는 민간신앙으로 무병장수(無病長壽) 입신영달(立身榮達) 먼 길 떠나는 길손의 무사를 비는 등 생활 속에 파고 들었다.

전주에서는 이 곳에 처음 성황사가 세워졌고, 성황당으로서는 가장 번창한 곳이라고 해서 서민들의 말로 서낭댕이라고 불렸다.

 

 

25.선너머(중화산동)

전주의 향교와 문묘(文廟)는 고려 우왕(禑王) 6년에 본시 부성내 남부인 지금의 경기전(慶基殿) 부근에 있었는데 조선조 태종(太宗) 10년에 경기전이 조영(造營)되자 인접하고 있는 향교에서 독강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성령(聖靈)을 안위케 하는데 어긋난다고 하여 전주부의 서쪽인 화산(華山) 기슭인 삼계리에 이전했다.

이 자리에서 약 2백여년간 있었는데 당시 전주천은 현 다가산(多佳山) 밑인 신흥학교 교정을 도는 소()를 이루었으며, 장마철만 되면 선비들이 전주천을 건널 수 없었고 부성과 너무 떨어져 불편하였으며 좌묘우사(左廟右杞), 즉 객사에서 남면, 좌면에 문묘(文廟)를 세우고 우면에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하는 제도에 어긋난다고 하여 선조(宣祖) 36년 관찰사인 장만(張晩)이 품신하여 현 교동 자리에 이전했다. 또한 화산서원(華山書院)은 선조 때 향교 자리에 세웠으며 서원 옆에 희현당(希賢堂)을 두었는데 희현당은 오늘에 말하면 대학 정도의 수학을 했다.

그러나 한말 때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완용(李完用)이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인 이 곳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자 철거하고 또한 서원비(書院碑)를 현재의 중화산동(中華山洞) 2가 산13번지에 다시 세웠다.

희미하게 남은 서원비(書院碑)에는 당시의 화산서원과 희현당 그리고 황학대(黃鶴臺)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뜻있는 이의 눈길을 멈추어 주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화산을 넘어 서원이 있었다고 해서 화산서원 너머를 선너머로 부르고 있으며, 서원너머에서 나오는 미나리는 전주팔미로 이름나 있다.

 

 

26.설대전다리(전동)

오늘날 남부시장(南部市場) 머리의 매곡교(梅谷橋) 자리다.

옛날 이 다리 아래를 우시장 속칭 쇠전갱변이라고도 했으며, 다리 아래쪽에서 서천교(西川橋) 사이로 담뱃대 장사들이 좌전을 벌렸다고 해서 연죽교(煙竹橋) 또는 설대전다리라고도 불렸다.

 

 

27.세내(삼천동)

세 개의 냇물이 합쳐진 곳이라 하여 삼천으로 불리고 있는데 완주군(完州郡) 구이면을 돌아 완주군 일대와 김제군(金堤郡) 일부, 전주시의 농경지에 관개용수 하는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다. 모래사장 또한 금모래 은모래 같기만 하여 새우번식이 좋아 세천새우는 입맛을 돋구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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