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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장생거 및 벽골제중수비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1.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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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정문을 통과해 둑이 있는 곳까지 왔다면, 왼쪽 가장 먼곳에 장생거와 벽골제 중수비가 보일 것이다.

김제 벽골제 장생거

 

 

장생거는 1980년대 수문에 대한 복원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장생거의 현위치와 1975년 발굴조사 당시의 사진

 

 

장생거는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벽골제 제2수문으로... 벽골제의 수문은 원래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5개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를 만들면서 둑은 둘로 잘려졌고, 수문도 사라져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의 돌기둥만 남아 있다. 장생거는 두 기의 석주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제4수문인 경장거와 모습이 유사하다.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하단에 굵은 나무판자가 끼워져 있다. 과거 현존 나무판자와 같은 판자 여러 개를 쌓아 수문을 만들어 위 아래로 움직이며 물의 유입량을 조절하는데 사용하였다.

[글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장생거의 왼쪽 둑의 끝부분에 위치한 벽골제 중수비가 보인다.

벽골제 중수비로 가는 길

 

위 사진에 우측 둑 너머에 원평천이 흐르고 있다.

원평천의 나무다리

 

 

김제 원평천

 

 

김제 벽골제를 설명한 글과 지도 안내문

 

 

한글, 영어, 한문, 일어 안내판과 각 수문의 위치 안내도

 

 

벽골제 중수비

 

디지털스캐닝을 거쳐 재현한 벽골제 중수비
디지털스캐닝을 거쳐 재현한 벽골제 중수비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 중수비: 1415년(조선 태종 15년) 당시 수군도만호였던 김제사람 박초가 썼다고 한다

 

 

중수비 / Jungsubi Monument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의 지정 내용에는 현존 제방 약 2.5km와 더불어 1415년 중수를 기념하는 벽골제 중수비가 포함되어 있다.

중수비는 1415년(조선 태종 15) 당시 수군도만호였던 김제사람 박초가 썼으며, 중수비의 비문은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문이 전해진다.

중수비 내용은 벽골제와 김제군명의 연원, 고적에 기록된 벽골제의 규모와 관개유역, 태종의 치수의지, 각급 공사주체와 인력규모, 공사의 난이점, 제방 제원의 세부 및 완공시기가 정리되어 있다. 중수비의 원래 위치는 신털미산 정상부이나, 1980년 유적을 정비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벽골제 중수비 비양碑陽 한글본
벽골제 중수비 비양碑陽 한글본

 

 

중수비 비양碑陽 한글본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 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 95복이라 하니, 고적에 적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한 들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1143)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하늘이 우리의 국조를 열어 성군이 태어나니, 힘써 다스려서 태평세월을 성취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명하여 사방을 순시하고, 제방堤防을 완비하며 관개灌漑를 잘 통하게 하였다.

 

을미년 1415 에 판상주判尙州 이발李發 공公을 명하여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으니, 이공이 처음으로 벽골碧骨에 와서 이것을 보수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번거롭고 바빠서 시작하지 못하였다. 도관찰출척사 都觀察黜陟使 함양咸陽 박습朴習공과 경력經歷 권전權專군과, 경차관敬差官 희중凞中이 모두 여기에 와서 공사의 어렵고 쉬운 것을 고찰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니, 드디어 임금이 허가를 하였다. 각 군의 장정 총 1만 명과 일을 처리하는 사람 3백 명을 증발하고,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군과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군을 시켜 감독하게 하니, 이해 9월 갑인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0월 정축일에 완성하였다. 둑의 북쪽에는 태극포太極浦가 있는데, 조수가 몹시 격하며, 남쪽에는 양지교楊枝橋가 있는데, 물이 깊게 고여 있어서 공사하기가 무척 힘이 들어, 옛 부터 어려운 공사였다. 이제 먼저 태극포의 조수가 치는 곳에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를 양지교楊枝橋의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 세워서 기둥을 만들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木柵을 막아서 흙을 메우고, 또 제방 무너진 곳에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며, 제방의 내외로는 버들을 다섯 줄로 심어서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하였으니,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丘壟처럼 바라보였다.

 

또 장생長生, 중심中心, 경장經藏의 세 수문의 옛날 돌기둥을 보수하였고,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돌을 쪼개어 주춧돌로 삼고, 느티나무 기둥을 세웠다. 또 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 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이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또 아래의 석봉石縫은 쇠를 녹여 땜질을 해서 단단하게 하고, 다시 안쪽의 물을 막고 있는 언덕도 보수하였다.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파도가 치는 곳은 아니지만, 만약 물이 범람하여 이곳으로 새어 흐르면 물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두 수문의 양쪽에다 돌을 깎아 주춧돌로 삼아서, 그 위의 느티나무 판으로 다리를 만들어 왕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永樂 13년*이다.

출처: 김제 벽골제 사료집성

*영락永樂 13년: 중국 명나라 영락제 연호로 1403년이 1년...1415이 13년이다.[각주 럭셔리크로우]

중수비의 원위치와 현위치를 알리는 지도 사적 제111호 중수비

 

 

벽골제 한글비

 

 

벽골제 한글비: 198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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