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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김제 벽골제(金堤 碧骨堤)_농경문화박물관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1.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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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의 지난 글을 건너 뛰었다면 아래의 URL클릭!~

1.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_정문과 유채꽃 

2.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_유채꽃 들판 주변

3.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_놀이터 주변

4.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_소나무동산

5.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_농경사 주제관.체험관.전망대

6.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_쌍용조형물

7.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_테마연못과 주변

8.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_장생거 및 벽골제중수비

 

 

 

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정문과 유채꽃

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 김제시 포교리와 월승리 일대의 저수지를 ‘벽골제(碧骨堤)’라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저수지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은 농업 국가로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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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유채꽃 들판 주변

유채꽃 길을 따라...걷다보면 나비와 꿀벌이 꽃에 앉았다 날라가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넓은 평야와 꽃밭... 녹색의 풀밭과 맑은 하늘...그리고 바람... 사랑하는 가족과의 나들이... 소소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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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놀이터 주변

김제 벽골제 이야기: 김제는 학창시절 한번쯤 들어본게 김제평야인데, 평야지대인 만큼 옛날부터 농사의 중심이었고, 치수가 발달되어 벽골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볏(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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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소나무동산

농경사주제관 및 체험관 뒷편에 자리한 소나무 동산에 재미있는 조형물이 있다.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아이들 각각의 표정이 압권이다!~ 항아리 뒤에 숨어 있는 친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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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농경사 주제관.체험관.전망대

농경사 주제관과 체험관의 외관은 김제의 특징에 맞는 농촌의 삶을 잘 표현하였다. 주변의 조형물들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동심으로 돌아가기에 딱좋은 구성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달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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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쌍용조형물

[쌍룡설화 Two Dragons Stories] 「조연벽과 벽골룡」은 벽골제와 관련된 많은 설화 중 특별히 김제조씨 시조인 조연벽(趙連璧)에 대한 씨족시조전설이다. 또한 벽골제 수호신인 벽골룡의 부탁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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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테마연못과 주변

도심속 생활에서 잠시 떠나... 푸른 들판이 있는 김제 벽골제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주변의 조경이 아기자기한 조형물들과 어울려 꾸며져있다. 용두레는 깊은 곳에 고인 물을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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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金堤碧骨堤)_장생거 및 벽골제중수비

김제 벽골제 정문을 통과해 둑이 있는 곳까지 왔다면, 왼쪽 가장 먼곳에 장생거와 벽골제 중수비가 보일 것이다. 장생거는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벽골제 제2수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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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를 몇 번 와봤지만, 이곳에 박물관이 있는줄 몰랐다. 카탈로그 또는 안내문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정면
단야광장에서 바라본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정면



단야광장과 단야루
박물관에서 바라본 단야광장과 단야루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우측면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의 이력
박물관의 이력이 써있다. 1997년 준공되었고, 규모는 600평이다

 

박물관 안내도: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 입장시간: 09:00~06:00

 

제1전시실-농경문화
제1전시실-농경문화

 

제1전시실-농경문화
제1전시실-농경문화
제1전시실-농경문화
제1전시실-농경문화



 

제2전시실-생활민속
제2전시실-생활민속



제2전시실
제2전시실-발굴상황
제2전시실-세시풍속
제2전시실



 

우리의 일상속 신앙
우리의 일상속 신앙

 


[곡식숭배]

민간신앙에는 곡식과 관련된 신앙양태가 많다. 호남에서는 벼가 여물 무렵 날을 택해 잘 익은 이삭으로 밥을 지어 성주, 조상, 조왕(竈王) 등에게 천신하는데 이를 '올베심리'라 한다. 신앙의 대상에게 곡식을 제물로 올리는 것이다.
매년 햅쌀로 바꾸는 조상단지나 성조독의 경우 곡식이 조상이나 성주의 신체(神體)를 대신한다. 또 됫박에 쌀을 담아 보자기에 싸서 배앓이를 치유하는 '잔밥 먹이기'는 곡식의 생명력이 치유력으로 작용한 사례이다. 곡식이 제물로 쓰이고 신체로 섬겨지고 치유에 쓰이는 바탕에는 곡식이 가지는 생명력과 풍요의 원리 및 그에 대한 숭배가 깔려있다.

잔밥먹이기
잔밥먹이기
잔밥먹이기

 

잔밥먹이기: 가족 가운데 배앓이 병이 나면 그 집의 할머니 또는 주부가 됫박에 쌀을 담아 보자기에 싸서 병자의 아픈 곳을 쓰다듬으며 치유를 기원하였다.

 

제3전시실-벽골제언
제3전시실-벽골제언

 

 

제3전시실
제3전시실



 

湖南 호남, 김제 “벽골제호의 남쪽”

전라도와 충청도의 이름이 호남과 호서가 된 것은 이 벽골제에서 유래한 것이다

全羅忠清之名為湖南湖西 由於此堤 碧骨堤

유형원柳馨遠(1622~1673), 『반계수록磻溪隨錄』

호남의 유래
호남의 유래



1415년 벽골제 중수비

김제 벽골제 중수비는 건립 당시 신털미산 정상에 세워진 후, 숙종 10년(1684)에 중건 되었다. 중수비는 1980년 사적 벽골제에 대한 유적정화공사가 진행되면서 박물관 좌측, 장생거 옆 현재의 비각에 이전 설치하였으나, 비각이 보호시설이므로 관람객들이 중수비를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금번 전시개선을 통해 벽골제 중수축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람객이 보고 읽을 수 있도록 디지털스캐닝을 거쳐 재현하였다.  [재현 | 성보보전연구소]

1415년 중수비(전면)
1415년 중수비(배면)
1415년 중수비(전면): 디지털스캐닝을 거쳐 재현한 모형 1415년 중수비(배면): 디지털스캐닝을 거쳐 재현한 모형

 

중수비 비음碑陰 한문본

중수비의 비음碑陰 즉, 배면은 현재 전면에 비해 훼손이 덜 된 상태이다. 비음의 내용은 중수를 지휘한 도 관찰출척사 박습을 비롯하여 비명을 저술한 수군도만호 박초까지 집행부 6인이 병기되고 이후 사업에 참여한 조직의 세부가 정리되어 있다. 금번 디지털스캐닝 작업을 통해 기존 탁본으로 읽어낼 수 없었던 글자들을 추가로 읽어낼 수 있었다. 현재 스캐닝을 통해 읽어낸 글자들을 반영하여 우선 전시하고 특정하기 어려운 글자들은 이후 문장의 전후관계나 문자의 형태비교를 통해 정보량을 늘려 중수 정보를 보다 자세하게 축적하고자 한다.



중수비 비양碑陽 한글본

중수비의 전면은 현재 마멸이 심하여 읽어낼 수 없다. 다행히 중수비 전면의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제군조에 기록된 바, 여기 한글 번역본을 가로쓰기로 실어 벽골제 중수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중수비의 전면에는 기록자 박초가 벽골제와 김제 군명의 연원, 고적에 기록된 벽골제의 규모와 관개유역, 태종의 치수의지, 각급 공사 주체와 인력규모, 공사의 난이점, 제방 제원의 세부(둑, 수문, 수문작동 방식) 및 완공시기를 정리하였다. 벽골제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이다.

김제 벽골제 사료집성 내용을 발취한 한글판 중수비 모형
김제 벽골제 사료집성 내용을 발취한 한글판 중수비 모형이다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 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 95복이라 하니, 고적에 적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한 들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1143)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하늘이 우리의 국조를 열어 성군이 태어나니, 힘써 다스려서 태평세월을 성취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명하여 사방을 순시하고, 제방堤防을 완비하며 관개灌漑를 잘 통하게 하였다.

 

을미년 1415 에 판상주判尙州 이발李發 공公을 명하여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으니, 이공이 처음으로 벽골碧骨에 와서 이것을 보수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번거롭고 바빠서 시작하지 못하였다. 도관찰출척사 都觀察黜陟使 함양咸陽 박습朴習공과 경력經歷 권전權專군과, 경차관敬差官 희중凞中이 모두 여기에 와서 공사의 어렵고 쉬운 것을 고찰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니, 드디어 임금이 허가를 하였다. 각 군의 장정 총 1만 명과 일을 처리하는 사람 3백 명을 증발하고,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군과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군을 시켜 감독하게 하니, 이해 9월 갑인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0월 정축일에 완성하였다. 둑의 북쪽에는 태극포太極浦가 있는데, 조수가 몹시 격하며, 남쪽에는 양지교楊枝橋가 있는데, 물이 깊게 고여 있어서 공사하기가 무척 힘이 들어, 옛 부터 어려운 공사였다. 이제 먼저 태극포의 조수가 치는 곳에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를 양지교楊枝橋의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 세워서 기둥을 만들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木柵을 막아서 흙을 메우고, 또 제방 무너진 곳에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며, 제방의 내외로는 버들을 다섯 줄로 심어서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하였으니,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丘壟처럼 바라보였다.

 

또 장생長生, 중심中心, 경장經藏의 세 수문의 옛날 돌기둥을 보수하였고,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돌을 쪼개어 주춧돌로 삼고, 느티나무 기둥을 세웠다. 또 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 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이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또 아래의 석봉石縫은 쇠를 녹여 땜질을 해서 단단하게 하고, 다시 안쪽의 물을 막고 있는 언덕도 보수하였다.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파도가 치는 곳은 아니지만, 만약 물이 범람하여 이곳으로 새어 흐르면 물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두 수문의 양쪽에다 돌을 깎아 주춧돌로 삼아서, 그 위의 느티나무 판으로 다리를 만들어 왕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永樂 13년*이다.

출처: 김제 벽골제 사료집성

*영락永樂 13년: 중국 명나라 영락제 연호로 1403년이 1년...1415이 13년이다.[각주 럭셔리크로우]

벽골제와 수신용
벽골제와 수신용



벽골제 주변의 지명
벽골제 주변의 지명 등이 나온다

 


벽골제 전설 속으로(벽골제 주변의 지명)

1. 신털미산

한자로 초혜산草鞋山 이라고도 한다. 1415년(태종 15) 벽골제 중수시 수축에 동원되었던 일꾼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해진 짚신을 버린 것이 쌓여 산을 이루었다고 하여 신털미산이라 한다. 중수 후 산위에 벽골제 중수비를 세웠는데 1980년 유적을 정비 하면서 장생거 옆으로 이전하였다.

 

2. 되배미

벽골제를 중수할 당시 동원된 일꾼들이 만여 명이나 되어 인원을 일일이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게를 진 장정 500명이 들어설 수 있는 크기의 논으로 곡식을 되질하듯이 사람을 되질 했다고 하여 이 논을 되배미라 불렀다고 한다.

 

3. 제주방죽

벽골제 중수에는 전국에서 많은 일꾼들이 동원 되었고 보수공사시 제주도 장정들만 일하던 곳이 제주방죽이라는 설이 있다. 또는 중수에 동원된 제주도 일꾼들이 중수가 끝난 뒤에야 도착하였고 허탈한 마음에 명금산 아래에다 방죽을 파놓은 것이 제주방죽이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4. 명금산 鳴琴山

통일신라 때 벽골제 보수공사가 있었다.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낭자는 일꾼들을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거문고를 연주하였다고 하는데, 거기서 명금산이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5. 접주, 내주평, 용두, 강정마을

김제시 곳곳에는 벽골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지명들이 많다. 봉남면 대송리의 접주 및 내광리 내주평 등의 지명은 배와 연관이 있고 봉남면 양전동 용두마을에는 용이 살았다고 한다. 황산 기슭의 강정마을은 벽골제 물이 머물러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

벽골제는 김제 뿐 아니라 정읍 지역까지 이르렀다. 벽골제로부터 동남간으로 약 6km 떨어진 정읍시 감곡면 오리사는 배가 들어왔다 하여 속칭 '배들이'라 부른다. 10km 떨어진 방교리 호락 마을은 ‘호수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이름이다.

 

7. 단야

통일신라 제38대 원성왕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 벽골제 축조를 위해 토목기술자인 원덕랑을 급파 하였다. 원덕랑이 보수공사에 힘을 쏟는 동안, 태수의 딸 단야는 원덕랑을 흠모하게 되었다. 한편, 큰 공사에는 '용추에 제물을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원덕랑이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하자 백성들 사이에서 우려가 번져갔다. 그 즈음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가 김제에 도착하자, 태수는 월내를 보쌈하여 제물로 바쳐 단야의 사랑을 이루고, 보수공사도 완공 시키겠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아버지의 계책을 알아챈 단야는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고, 벽골제는 무사히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근거해 최근에 벽골제에 단야각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있다.

김제조씨 가문전설: 조연벽의 꿈이야기
김제조씨 가문전설: 조연벽의 꿈이야기

 


벽골제 용 수호자(Defender of the Dragon of Byeokgolje)

김제조씨 가문전설

김제 조씨의 시조 조연벽과 관련하여 <벽골제용 수호자>전설이 전해진다. 어느 날 조연벽의 꿈에 벽골제 용이 나타나 벽골제를 빼앗으러 온 흑룡黑龍을 퇴치해 줄 것을 부탁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조연벽은 다음날 활로 흑룡을 물리쳤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벽골제용은 자손이 흥할 것을 약속했고, 고려 원종元宗 갑자년(1264)에 태어난 조간은 풍골이 비범하고 등에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점이 있었으며, 양쪽 어깨에 비늘이 있어 사람들이 ‘벽골제 용의 정기가 어린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용 수호 전설은 치수治水와 관련된 것으로, 김제 조씨가 치수자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지역의 문벌로 성장해 갈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선룡을 수호하여 왕업을 일으키는 이야기구조는 고려의 왕조설화인 작제건 설화와 벽골제용 수호자인 조연벽설화에서 반복된다.

이식위천: 밥은 하늘
이식위천: 밥은 하늘



이식위천: 밥은 하늘
밥은 하늘

 

 

임금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근본으로 여긴다.

동진관 입구
동진관 입구



동진관 설립에 관한 이야기
동진관 설립에 관한 이야기



근현대사 물건들이 전시
근현대사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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