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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완주 독립운동 추모공원(完州 獨立運動 追慕公園) 현충시설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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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독립운동 추모공원 / 完州 獨立運動 追慕公園

Wanju Independence Movement Memorial Park

 

∙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만수동길 22[용복리 278]

현충시설 지정: 2013. 5. 13.

완주독립운동추모공원은 10,446㎡ 부지에 사당(忠烈祠), 기념관, 관리사, 전각 등을 갖추고 있고, 높이 9m의 3개의 석탑인 독립운동 추념탑, 6.25전쟁 참전 기념탑, 베트남 참전 기념탑 등이 있다.

완주군 독립운동기념관
완주군 독립운동기념관

 

完州 獨立記念館
完州 獨立記念館

 

우측 입구

 

아래 사진은 완주군 독립운동기념관 문을 지나 나오는 독립기념관의 모습이다.

우국지사 백산 장병구선생구국비
애국지사 백산 장병구선생구국비

 

애국지사 백산 장병구선생구국비(國之士 栢山 張炳九先生救國碑)와 백산 장병구선생 추모시가 나온다.

백산 장병구선생
백산 장병구선생 추모시

 

추모시 _백산 장병구선생 영전에

대둔산 정기 어리고 화암사 불경소리 감도는 용복골짜기에 조국의 광복과 栢山(백산)을 축복하는 동녘의 햇살이 찬란히 投射(투사)하는도다.

 

심산유곡 동굴에서 독립자금 조달하려다. 무고한 육년 옥고를 臥薪嘗膽(와신상담)의 심경으로 출옥 후 항일운동 계속하다가 갖은 탄압을 애국정신의 일념으로 생애를 불태우신 조국의 수호신이여!

 

栢竹(백죽)같은 性情(성정) 泰山(태산)같은 義氣(의기) 구국일념으로 한 을 오롯이 바치심은 애국애족의 고결하고 狷介(견개) 하신 생애셨습니다.

 

광복된 조국의 영광 도약하는 민족의 웅비 이제 彼岸(피안)에서 기뻐하시고 기원하여 주시옵소서 영생에 복략을 누리시옵소서 / 김대종 지음 · 오정문 씀

顯忠門 현충문
顯忠門 현충문

 

顯忠門 현충문
顯忠門 현충문

 

위 사진의 우측 공간으로 잠시 이동해서 보면 아래 사진과 같다.

태극문양의 삼문이 있다.

 

삼문을 지나면 순국선열을 모신 사당(忠烈祠)이 나온다.

忠烈祠 충열사
忠烈祠 충열사

 

顯忠門 현충문
顯忠門 현충문

 

顯忠門 현충문
顯忠門 현충문

 

현충문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들어가면 獨立運動 追念塔(독립운동 추념탑)이 나온다.

獨立運動 追念塔(독립운동 추념탑)
獨立運動 追念塔(독립운동 추념탑)

 

獨立運動 追念塔(독립운동 추념탑)
獨立運動 追念塔(독립운동 추념탑)

 

독립운동 추념탑의 제작 동기 및 의도
독립운동 추념탑의 제작 동기 및 의도

 

작품명제 : 독립운동 추념탑

제작동기 : 일재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의도 및 조형적 의미-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무기나 도구로 활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던 바, 제작자는 역사속의 활과 화살을 조형화하고자 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활과 화살로 삼아 조국과 민족의 성전에 바쳤으며 그 기백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 가슴에 흐르는 것이다. 탑신부는 사람의 몸과 화살을, 우측 곡선 R은 활을 상징하여 독립 쟁취를 위한 기개와 절개를 표현했다. 윗 부준은 삼태극 불 모양으로 민족의 밝은 미래와 세계를 향해 웅비하는 완주군을 나타내고자 했다.

조각 : 김종원... 김무용, 정덕규, 장현태, 문종식, 강영수, 장석철

제작 : 장인석재

독립운동 추념탑 좌측 비
독립운동 추념탑 좌측 비

 

민족의 얼 / 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 한 몸 바쳤노라. 독립운동 추념탑 뒤로 한글 독립 선언문이 있다.

독립 선언문
독립 선언문

 

독립 선언문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 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정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터이며, 사람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지 여러 천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지 이제 십년이 되도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의 발전이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속에 칼날을 품으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데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며, 물러서 계획을 세우는 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

 

병자수호조약 이후, 시시때때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탓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인은 실생활에서,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이 터전을 식민지로 삼고 우리 문화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낼 뿐이요. 우리의 영구한 사회의 기틀과, 뛰어난 이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려 하지 아니 하노라. 자기를 일깨우기에 다급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여가를 갖지도 못하였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에게는 예부터의 잘못을 따져볼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나를 바로잡는 데 있을 뿐, 결코 남을 헐뜯는 데 있지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을 따라 자기 집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는 일일 뿐,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의 감정을 가지고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일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인 일본의 위정자의 공명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실을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합병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뤄진 당장의 평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짓된 통계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과 수 없는 원한의 도랑이 날이 갈수록 깊이 패이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번 살펴 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인 것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안함과 위대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뻔한 터에, 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 나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 하누나. 새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가 본시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나니, 남자·여자,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공약삼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인도·생존·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나라를 세운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민족대표 손병희 외 32인

독립운동 추념탑 좌측 전경
독립운동 추념탑 좌측 전경

 

고귀한 생명으로 조국을 지켜야 했던 임의 거룩한 정신

고귀한 생명으로 조국을 지켜야 했던 임의 거룩한 정신
태극기가 게양된 곳

 

작은 정원
작은 정원이 있다.

 

베트남참전기념탑과 6.25참전기념탑
베트남참전기념탑(중앙)과 6.25참전기념탑(좌측)

 

베트남참전기념탑
베트남참전기념탑

 

베트남참전기념탑 뒤편
베트남참전기념탑 뒤편

 

베트남(월남) 참전 부대의 마크가 보인다.  청룡부대, 백구부대, 십자성부대, 주월사령부, 비둘기부대, 주월사공군지원단, 백마부대, 맹호부대가 파병되었다.

청룡부대
백구부대
십자성부대
주월사령부
비둘기부대
주월사공군지원단
백마부대
맹호부대

 

베트남(월남) 참전 기념탑 건립 취지문과 기념탑 연혁
베트남(월남) 참전 기념탑 건립 취지문과 기념탑 연혁

 

베트남(월남) 참전 기념탑 건립 취지문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국군 파병이었다. 1964년 9월 이동외과 병원 병력 130명을 시작으로 1966년까지 파병 국군은 4만 8천명에 이르게 되어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국가가 되었다. 그 후 베트남 전쟁은 연합군의 패배로 1971년 12월 청룡부대를 필두로 1973년 3월 까지 철수가 끝났는데 파병 8년 동안 총 32만명이 참전하여 5,000여명의 전사자와 11,000 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 후 월남과 월맹은 통일이 되었고 우리나라와 국교 수교가 이루어져 경제 문화 인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베트남 파병으로 인하여 소중한 인명 피해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 기간 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기도 한 밝은 면도 있었다는 사실에 당시 파월 장병들은 가슴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이와같은 현실속에서 그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여 했던 전우들이 다시 이 곳에 모여 세계 평화 수호에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희생과 열정이 이 고장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아로 새겨져 자자손손 영원히 교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에 베트남 참전 기념탑을 세운다. -2006년 3월 베트남 참전 전우 일동-

 

기념탑 건립 연혁

2002. 4. : 기념탑 추진 계획 수립

2002. 5. : 기념탑 추진 위원 구성

2003. 7. : 사업 타당성 정식 건의, 사업비 일억 오천 지원 약속

2003. 10. : 사업계획서 제출

2003. 12. : 사업비 군의회 통과 확정.

2004. 2. : 복지과장 입회하에 추진 총회

2004. 4. : 사업 승인

2005. 12. : 기념탑 공모 공고

2005. 12. 30. : 계약완료

2006. 5. : 완공

 

기념탑 공사 개요

∙공사기간: 2005.12.30.~2006.05.  / 공사금액: 일억오천만원 / 탑규격: 6,000 × 4,000 × 9,500 / 석재중량: 약 100 ton. / 석종: 익산 화강석

월남파병 동의 및 개요
월남파병 동의 및 개요

 

越南派兵 動議 (월남파병 동의)

한국정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월남파병을 하지 않으면 안될 불가피성 때문에 능동적으로 월남 파병을 선택하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첫째: 우리나라는 한·미간의 군사동맹협정에 따라 자유수호의 동반자로써 10,962명 부상 쌍무적인 이행 조항을 준수하고 국제 유대강화를 위해서이다.

둘째: 6.25 한국전쟁 당시 우리를 도왔던 자유우방(UN)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고 국제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셋째: 우리의 자주국방과 국가경제발전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국자본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월남파병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越南派兵의 概要(월남파병의 개요)

1) 파병부대: 8개 부대(주월사, 맹호, 백마, 청용, 십자성, 비둘기, 백구, 주월사 공군지원대)

2) 파월기간: 1964년 7월 18일 ~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8개월간 월남참전

3) 파월병력: 312,853명 참전, 4,960명 전사 (순직 포함), 10,962명 부상, 총 15,922명 손실

4) 작전: 총 577,476회(대부대작전 1,174회, 소부대전투 576,302회를 실시)

5) 평정사업 : 7,000㎡ 를 평정하고 월남난민 120만명을 거주정착 및 보호

6) 대민사업: 한국군은 양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전투보다 대민 지원사업을 우선하여 병행 실시

월남참전의 의의 및 성과
월남참전의 의의 및 성과

 

韓國軍 越南參戰의 意義(한국군 월남참전의 의의)

1) 유사이래 처음으로 남의 나라를 돕기 위해 해외에 파병했다.

2) 6.25때에 도움을 받은 UN에 대한 은혜 보답으로 국제신의를 지켰다.

3) 국제 유대강화로 국위를 향상시켰다.

4) 방위산업 육성과 자주국방 태세로 주체성을 확립했다.

5) 전투경험으로 새로운 전략과 전술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6) 무한경쟁과 협력시대의 세계진출에 시발점이 되어 자신감을 일깨웠다.

7) 국가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되어 새역사 창조에 기여했다는 점 등이다.

 

越南派兵의 成果(월남파병의 성과)

1964년부터 1970년대 이어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국가발전은 오직 월남참전의 특수(特需)라운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국가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월남 특수는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안보체제를 구축했다.

둘째: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셋째: 군사발전을 도모했다.

넷째: 국제유대를 강화했다.

다섯째: 선진국가로 진입했다.

 

베트남 기념탑의 의미
베트남 기념탑의 의미

 

베트남 기념탑의 의미

숫자 3은 단군신화에서부터 길수와 신성수로 여겨져 왔다. 3이라는 숫자는 최초의 순양인 1과 최초의 순음인 2로 이루어진 완전무결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로부터 솟대는 장승과 함께 마을의 안녕 수호를 위해 세워 졌으며 그 솟대 3개를 탑으로 형상화하여 상스런 의미를 더욱 조화롭고 신성하게 조형화 하고자 했다. 동시에 탑의 시원을 솟대의 상스런 의미(안녕 수호, 풍농)와 완전수인 3의 상징(조화, 안정, 완성)에 두어 역사적, 문화적, 미래 창의적인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또한 마을의 안녕 수호를 넘어 세계평화, 자유를 기원하는 우리 민족정신과 자유수호의 의지를 굵고 간결한 곡선미로 표현했다.

∙설계자: 김종원 / ∙제작처: 장인석재 / ∙모 형: 이수래 / ∙탑전면글씨: 오정문

∙조각 및 가공: 김무용, 이분노, 진한담, 장원혁, 조한섭, 박성목, 장한천, 김종원

양각 조각물에는 참전용사의 모습이 보인다.
양각 조각물에는 참전용사의 모습이 보인다.

 

6.25 참전 기념탑
6.25 참전 기념탑

 

아래 사진은 6.25 참전 기념탑 뒤편의 모습이다. 

6.25 참전 기념탑 뒤편의 모습
6.25 참전 기념탑 뒤편의 모습

 
6.25 기념탑의 의미
6.25 기념탑의 의미

 

6.25 기념탑의 의미

동양사상의 근본인 음양오행사상 중에서 木의 좋은 기운을 선택했다. 목의 본성은 대지를 뚫고 뻗어 나가는 힘과 사계절 중 봄을 말한다. 즉 굳은 땅을 뚫고 강하게 뻗어 나오는 새싹을 통해 탑을 형상화 했다. 돌의 특징을 살려 1000년의 세월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통돌을 사용하여 새싹의 유연한 선을 전통적 부드러운 곡선미로 극대화하여 단단한 돌에서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듯 한 선을 표현한다. 탑신 중심의 기하학적 문양에서 전쟁의 아픔과 붉은 원은 음양의 조화를 통한 통일을 기원하고 좌우 부재는 힘차게 뻗어 전진하는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나타내고자 했다. 탑 둘래석의 기둥은 전통 양식인 홍살문의 창을 의미하고 삿된 기운을 막는 역할을 상징하며 5개 단체의 비신이 탑을 에워싸고 있는 형상으로 조형화 했다.

설계자: 김종원 / 제작저: 장인석재 / 모 형: 이수래 / 탑전면글씨: 오정문

조각 및 가공: 김무용, 이분노, 진한담, 장원혁, 조한섭, 박성목, 장한천, 김종원

취지문
취지문

 

취지문

여기에 새긴 국가에 영웅이신 분들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전·후 군경들로서 남다르게 뛰어난 전공을 세워 국민으로부터 영광스런 훈장과 조국 수호를 위해 용감히 싸우시다 부상을 입어 상이 군경이 되신 분과 사랑하는 님과 가족을 먼저 보내고 꿋꿋하게 사시는 미망인, 전몰군경, 국가 유공자님들이시니 먼저 가신 님들의 값진 희생이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조국의 앞날을 더욱 더 밝게 비치어 지기를 기원하며 국민의 이름으로 그 위엄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자 명각비를 세우노라. 2000년 5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 6.25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 6.25

 

조형물 좌우측면에는  6.25전쟁 시 국가에 헌신해 목숨을 바친 군경의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져있다.

십자형 전각 한옥 건축물
십자형 전각 한옥 건축물

 

십자형 한옥 건축물
건축물이 독특하게 십자형이다.

 

전각 내부 등
전각 내부 등

 

전각의 창
전각의 창

 

記念館 기념관
記念館 기념관

 

기념관(記念館)은 문이 닫혀 있어서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이는 언제 다시 찾을 수 있는 동기가 될 듯합니다. 

기념관과 완주 독립운동 추모공원 전경
기념관과 완주 독립운동 추모공원 전경

 

이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우리고장에 완주독립운동추모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국권회복의 뜻을 품고 독립운동에 투신, 독립운동단체에서 군자금 조달을 맡아 활동하신 독립운동가 장병구(張炳九 1897~1983) 선생의 활동*도 알게 되었다. 3.1운동 때 독립 선언문의 전문을 쓰며 민족대표의 생각과 자유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장병구(張炳九)선생의 활동: 일제치하 1922년 5월 21일 당시 김영한(金永翰)·김익환(金益煥)·문병래(文柄來)·김덕칠(金德七)·김명섭(金明燮)·서보국(徐寶局) 등과 함께 금당리(金塘里)에서 1원권 약 4만 장과 50전 지폐 약 3천 장을 인쇄하여 독립운동단체에서 군자금 조달을 하다 일본경찰의 추적으로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소 후에도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며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헌신하셨다. 1992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 됨.

 

또한 현재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는 완주 독립운동 추모공원의 월남참전, 6.25전쟁 기념비를 통해 국가에 헌신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정신을 기릴 수 있어서 평화와 자유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었다.

 

곧 6월 6일 현충일이 돌아옵니다. 아이들과 함께 현충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완주 독립운동 추모공원을 다녀오시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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