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03일 익산 왕궁리유적과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을 둘러보고 익산토성(오금산성, 보덕성)으로 향했다. 오늘의 포스팅에 나오는 사진은 모두 전주 럭셔리크로우의 사진입니다. 익산토성의 유물은 2023년 3월 19일 국립익산박물관_전북의 고대 성곽 특별전에서 담아온 사진입니다.
주차장 옆으로 익산토성(오금산성) 안내문과 익산의 관광자원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익산토성(사적 제92호)
익산 평야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오금산 구릉 위의 이 성은, 흙과 돌로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690m 정도이다. 오금산에 자리 잡고 있어 「오금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고구려 왕족 안승을 보덕국왕에 임명하고 이곳에 살도록 하였다고 하여 「보덕성」으로도 부른다. 이 성은 1980년과 1984년의 발굴 조사로 성의 규모와 구조가 대략 밝혀졌는데, 토성으로 축조하고 남문이 있는 골짜기에 석축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말기와 통일신라의 기와와 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 무왕(600~641) 때에 처음 쌓은 산성으로 추정된다.
Iksan Toseong Earthen Fortress(Historic Site No.92)
Commanding a fine view of the Iksan plain, this mountain fortress on Mt. Ogeumsan was built with clay and stoness. It is called 'Ogeum-sanseong,' after the mountain, and has a circumference of about 690 meters. It is also known as 'Bodeok-seong,' referring to a member of the royal family of the fallen Goguryeo Kingdom who was made king of Bodeok by Unified Silla and lived here. The size and structure of this fortress were determined through excavations in 1980 and 1984. The wall was earthen, and the wall section of the South Gate in the valley was of stone. Roof tiles and pottery dating to the late Baekje and Unified Silla periods suggest that this mountion fortress was first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Mu(600~641) of Baekje.
주요관광안내소 전화번호
▪익산역관광안내소 Tour Information / Tel.(063)859-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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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관광안내소 Mireuksaji Information / Tel. (063)832-0059
▪익산 백제왕궁박물관 Iksan Wanggung-ri Relices Musuem / Tel.(063)859-4631
익산토성(오금산성)
Earthen Fortification in Iksan (Ogeumsanseong Fortress)
다섯 덩어리의 황금이 나온 오금산
사적 제92호로 지정된 익산토성은 오금산에 있어서 ‘오금산성’, 고구려 안승이 세운 보덕국의 성이라는 의미로 ‘보덕성’이라 부른다. ‘서동이 다섯 덩어리의 금을 얻었다’는 오금산의 전설과 보덕성의 유래는 백제 말과 통일신라 초에 익산토성이 군사적으로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오금산성 입구에서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나 그리 높지 않다. 산 정상에서는 금마 평야의 물결치는 초록 들판과 파란 하늘이 맞닿은 장관을 조망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동과 첫날밤을 보낸 선화공주는 왕비가 준 ‘황금’을 보여주며 장터에서 팔아 오라고 했다. 그러자 서동은 마를 캐던 오금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며, 금 다섯 덩어리를 신라 왕궁으로 보냈다. 이 일로 서동은 신라 진평왕에게 사위로 인정받게 된다.
오금산성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포곡식으로 축성되어 백제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발굴조사 결과 성문과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연화문이 그려진 수막새와 수도를 표시하는 *수부, **북사가 새겨진 기와와 그릇이 출토되었다. 함께 출토된 솥 모양의 토기와 뚜껑 덮은 접시는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이 사는 왕궁과 수도를 방어하는 익산토성의 존재는 국가의 수도로 발전했던 익산의 과거를 잘 보여 준다.
*수부(首府): 수도 지역임을 지칭하는 유물로 익산 왕궁리유적, 부여 관북리유적, 부소산성에서 출토됨
**북사(北舍): 왕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물로 부여 관북리유적, 쌍북리유적에서 출토됨
<문헌으로 보는 오금산> 『삼국유사』 2권 「기이」 무왕,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권33 익산군, 「금마지」상 고적, 『대동지지』 「팔도지지」 전라도 익산
익산토성(오금산성) 야생마 군락지
이곳 오금산(五金山)은 서동이 마(薯)를 캐어 홀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할 때 하늘도 감복하였는지 마를 캐던 산에서 금 다섯 덩이(五金)를 얻어 훗날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현재도 대나무 숲 사이에서 야생마(薯)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마(薯):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자생한다. 산과 들에 자라는 덩굴성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길게 덩굴지면서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가며, 길이 1.5~1.8m이다. 잎은 마주나지만 드물게 어긋나며, 잎몸은 넓은 피침형 또는 난형으로 길이 5~10cm, 폭 2~5cm, 끝은 날카롭게 뾰족하다. 꽃은 8월에 피며 열매는 삭과, 넓은 타원형으로 3개의 날개가 있다.
※ 이곳은 야생마 군락지로 불법채취를 금지합니다. -무왕의 도시 익산
익산토성(益山土城)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오금산(五金山)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포곡식 성곽. 산성 · 토성. 사적.
▪개설
오금산 봉우리에서 동서로 뻗은 100m 안팎의 산등성이에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1980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원래 백제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뒤에 돌로 고쳐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 안에서는 백제 사비시기 토기와 기와,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때 조성된 이후 고려시대까지 중요한 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 넓은입 항아리 / 廣口壺 / Jar with Wide Mouth / 백제_국립전주박물관
2. 병 / 瓶 / Bottle / 백제_국립전주박물관
3. 편병 / 扁瓶 / Flat Bottle / 통일신라
4. ‘#’이 새겨진 뚜껑과 세발토기 / 蓋・三足土器 / 백제
5. 청동장신구 / 青銅裝身具 / Bronze Ornament / 통일신라
▪역사적 변천
보덕성이라고도 부른다. 곧『삼국사기』와『동국여지승람』등에 기록된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이 문무왕 10년(670) 6월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 자리잡은 뒤 신문왕 4년(684) 11월까지 보덕국에 속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므로,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다. 다만『신증동국여지승람』익산군 고적조에는 “보덕성은 군 서쪽 1리에 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라고 한 것을 토대로, 현재의 익산토성을 보덕성으로 지목하였다. 같은 책 불우조에도 “오금사(五金寺)가 보덕성 남쪽에 있다”고 하여, 익산토성을 보덕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 의거하여 보덕성인 익산토성을 보덕국의 치소였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로 나타난 입지나 구조, 내부 시설,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보덕국의 치소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고, 성벽 전면에 걸쳐 돌을 맞추어 쌓았던 흔적이 확인되므로 토성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내용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4m 안팎이고, 너비는 5.5~6m이다. 남쪽 성벽 일부는 처음 쌓은 지점에서 약간 앞으로 내어 고쳐 쌓았지만, 나머지 3면은 평면 구조의 변동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남쪽 이외의 성벽은 1∼2단의 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토루를 쌓은 구조이다. 바깥쪽 성벽 받침돌 앞에는 3∼6m의 외환도(外環道)를 두었고, 그 앞에는 물 없는 못인 외황(外隍)을 설치하였는데 그리 깊지는 않은 편이다. 성벽의 동남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에는 누대(樓臺)가 있었던 듯 주변에 기와와 토기 조각이 제법 많이 출토되었다.
토루(土壘)는 북쪽 성벽의 경우 산의 경사면에 기대어 내탁(內托)하여 판축 방식으로 흙을 쌓았고, 남쪽 성벽은 호석열(護石列)과 기둥을 설치하고 판축 방식으로 흙을 쌓았다. 기둥 구멍〔柱孔〕의 지름은 30㎝ 안팎이고, 간격은 1∼1.4m로 일정하지 않다. 기둥 구멍과 판축한 토루가 끝나는 동쪽 성벽에서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깬돌을 이용하여 남·북쪽 성벽에 면을 맞추어 협축(夾築)한 처음의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흙과 막돌로 다져 채웠으며 너비는 6m이다. 남쪽에 다시 쌓은 성벽은 네모지게 잘 가공된 성돌로 축조하였는데, 성돌은 길이 40∼50㎝, 두께 30∼40㎝로, 8단 정도가 남아 있다.
산성의 정문인 남문은 너비가 약 4.3m 정도로, 처음 쌓은 성벽의 판축 토루를 잘라 만들었는데, 터의 동쪽 벽은 기초 부분만 남았으나 서쪽 벽은 몇 단이 남은 상태이다. 문터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던 흔적이 있고, 위에는 문루가 설치되었던 듯하다. 기초 부분의 앞면은 단벽(段壁) 형태로 쌓았지만, 뒷면에는 깬돌 등의 막돌로 두께 5.2m를 뒷채움하였으며, 뒷채움석 뒷면에는 모래와 점토를 번갈아 판축성토하였다.
문터의 동쪽과 서쪽 벽 아래에는 좁은 배수로가 설치되었으며 2개의 문비주공석(門扉柱孔石)도 확인되었다. 문터 앞면에는 문을 드나들기 위한 몇 단의 계단 시설도 남아 있다. 돌로 고쳐 쌓은 성벽의 바깥쪽 벽은 비교적 크고 네모지게 잘 다듬어진 성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나 안쪽 벽은 작고 그다지 가공되지 않은 깬돌로 쌓았다.
성곽 안의 서쪽 경사면에서는 밑이 넓고 목이 좁은 플라스크 모양의 백제 저장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구덩이는 처음에 토성을 축조한 뒤 일정 기간 동안 백제의 주민들이 거주하였음을 알려 준다. 서쪽 성벽 능선 중앙부에서는 윗부분 지름 1.5m, 아랫부분 지름 1m, 현재 깊이 0.9m인 돌로 쌓은 둥근 우물 모습의 유구도 확인되었지만 정확한 용도와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원모양 토제품 圓形土製品
백제 | 장수 합미산성, 정읍 고사부리성, 익산토성
국립전주박물관,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성곽의 집수정에서는 많은 수량의 원모양 토제품이 확인 되고 있다. 대부분 삼국시대 기와를 가공하여 만든 것이며, 집터에서는 삼국시대 토기를 가공하여 만든 원모양 토제품도 확인된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헐거나 깨드리는 것과 관련된 의례행위에 사용하거나 게임의 말, 무게를 재는 것 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징
두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 걸친 많은 토기와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백제 유물로는 항아리, 벼루, 시루, 뚜껑접시 등의 토기와 연화무늬·물결무늬·무늬없는 수막새, 도장이 찍힌 기와(印刻瓦) 등 상당수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도장이 찍힌 인각와에는 ‘모(毛)’, ‘전(煎)’, ‘해(解)’, ‘사(斯)’, ‘경(京)’, ‘장(長)’, ‘상□(上□)’ 등의 글자가 있으며, 익산의 옛 지명인 ‘금마저(金馬渚)’가 돋을새김된 암키와도 있다.
도장을 찍은 기와 = 인장와印章瓦*
Roof Tiles with stamped Letters
왕궁에서는 기와의 표면에 도장을 찍은 기와가 60여 종류 넘게 확인되었습니다. 도장 내용을 보면 백제의 행정구역 명칭, 연대를 표시한 것, 생산자의 이름을 한 글자씩 표시한 것, 특별한 표시를 위해 한 글자만을 찍은 것, 글자가 아닌 기호를 표시한 것 등 다양합니다. 기와 생산 과정이나 검수 과정에서 생산지나 생산자, 생산 연대, 기와의 사용처 등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글 출처: 백제왕궁박물관]
도장기와(印章瓦) : ‘上水’(상수)를 찍은 도장기와 ‘申’‘斯’(신.사)를 찍은 도장기와
백제 토기나 기와류는 주로 수구 안의 광장과 남문터 주변, 동남 모서리의 대지 위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반면에 통일신라시대 유물은 동남 모서리의 대지에서 발견되었고, 고려시대의 것은 동남 모서리의 대지와 서남 모서리의 대지 위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유물이 수구 안의 광장과 남문터 주변에서 전혀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석성으로 개축된 시기는 백제 말이나 통일신라 초로 판단된다. 또한 백제 유물이 대체로 6세기 후반∼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편년되므로, 이 성은 이 시기에 처음 축조된 뒤 다시 돌로 쌓은 다음에 고려시대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익산토성은 백제 산성이 테뫼식에서 포곡식으로 변화하였고, 석축과 토루의 두 가지 축성 방법으로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특히 토루는 판축 공법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외피석과 함께 기둥 구멍을 설치하고서 판축성토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산성은 익산 왕궁리의 백제 궁성지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백제 무왕 때 익산 천도를 위해 축조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왕궁리 궁성과 함께 백제 왕실이 익산 지역을 경영하려고 쌓은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불어 왕궁리 궁성으로 이어지는 만경강 유역을 방어하면서,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산성, 용화산성, 선인봉산성 등과 함께 낭산이나 삼기, 함열 방향의 요로(要路)를 지킬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익산오금산성발굴조사보고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5), 『미륵산의 정기』(익산군, 1982), 『보덕성 발굴 약보고』(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1), 「금마보덕성의 위치에 대한 고찰」(이강오,『고고미술』138·139, 1978), 「금마저에 대하여」(도수희,『백제연구』5, 1974)
[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망대를 중심으로 익산쌍릉(무왕릉)_1.5km, 서동생가터_1.2km , 왕궁리유적지_2.7km 안내판이 있습니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익산쌍릉(盆山雙陵) 사적 제87호 → 1.5km
익산쌍릉은 백제 사비기의 왕릉으로서, 7세기 전반 익산에 왕궁성과 미륵사, 제석사 등을 조영하며 백제의 중흥을 꿈꿨던 제 30대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1917년 약식조사에서 관못과 관고리, 금제투각금구를 비롯해 무령왕릉의 관재와 같은 일본 고야산의 금송으로 제작된 목관이 수습되었으며 무덤의 내부구조는 부여 능산리고분군과 같은 횡혈식석실분으로 확인되었다.
서동생가터(薯童生家址) → 1.2km
삼국유사 무왕조에 의하면 「백제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고 기록 되었다. 이 연못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마룡지이며 마룡지 동측에서 초석과 백제시대 기와편이 다량 수습되어 서동의 생가터로 알려져 있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서 백제 왕족이었던 무왕의 아버지가 익산에 내려와 살면서 장을 낳았고 오금산에서 마를 캐어 생업을 삼던 서동(薯童)이 신라 진평왕의 세째딸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금을 얻어 백제 제 30대 왕위에 오르고 익산으로 천도하였다. 현재 익산 고도보존 육성사업에 의해 서동생가터 정비사업이 진행중이다. / 마룡지(연동제)
백제왕궁(익산 왕궁리유적 / 百濟王宮(益山王宮里遺蹟) )
사적 제408호 → 2.7km / 백제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 익산
왕궁리유적은 백제말기 무왕대에 조성된 왕궁터이다. 평지성 구릉에 남북492m, 동서234m, 폭3m 내외의 궁장을 두른 후, 내부에 경사면을 따라 4단의 석축을 쌓고 평탄대지를 조성하여 정무공간과 생활공간, 후원공간을 배치한 궁성유적이다. 궁성으로서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탑ᅳ-금당-강당으로 구성된 1탑 1금당식 사찰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는데, 이는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오층석탑과 그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를 통해서 밝혀졌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전각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 백제의 자연친화적 조경기술을 보여주는 정원시설 등의 궁성관련 유구가 밝혀지고 전달린토기, 8엽단판연화문수막새와 인장와(수부首府명 기와 등), 유리·금제품, 도가니 등 총 10,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백제 왕궁의 면모가 더욱 선명해 졌다.
서문지 및 집수정이 나오는 탐방로가 나옵니다. 여기에도 오래된 익산토성 설명문이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서문지의 발굴 조사 및 보수?가 한창이라 푸른 천막으로 덮여 있어 사진이 없습니다.
익산토성(오금산성)을 오셨다면 남문지→전망대→서쪽 탐방로→북쪽 탐방로→동쪽 탐방로→남문지 방향으로 탐방하시길 추천드립니다.
북쪽 탐방로의 끝부분 동쪽 방향을 보시면 완주군의 산맥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높은 산이 운장산(1,125m)입니다.
위 사진: 익산토성 남문지 서쪽방향 뷰
익산토성(益山土城)은 포곡식 산성으로 백제시대 판축 방식으로 흙을 쌓은 토성이다. 직접 익산토성(오금산성)을 둘러보니 남쪽 사면에 석성벽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성의 중앙 부분이 계곡으로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남문지 쪽으로 흙과 물이 내려오는 구조이다 보니 토성으로만 성벽을 지지하기 어려웠을 듯하다. 자연스럽게 석성벽으로 보강했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문터의 바닥에 돌을 깔았고, 남문 밑에는 개울물이 흐르는 수구水口* 자리도 확인 되었다.
* 수구水口 : 물을 흘려보내거나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장치로 배수로 같은 역할을 한다.
백제 30대 왕 무왕武王(재위 600~641)의 흔적이 많이 있는 지역으로 오금산(익산토성)-서동생가터(마룡지)-무왕릉(익산 왕릉원)의 위치를 선으로 그려보면 재미있게 삼각형 영역이 나온다. 또한 왕궁리유적과 제석사지, 무왕릉과 고도리 석불입상의 거리에도 비밀이 있을 듯하다.
현재 서동생가터 주변으로 발굴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백제의 대형 석축 저온저장시설이 확인된 가운데 왕실과 관련된 시설로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백제 30대 무왕의 흔적이 가장 많이 확인되고 있는 재미있는 지역이다. [전주 럭셔리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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