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7일~30일까지 3박 4일간의 제주 여행 중에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관람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 29)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제주도의 각 고을을 순시하고, 그 과정과 주요 행사들을 화공 김남길(金南吉)에게 그리게 한 화첩입니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관한 이야기는 국립제주박물관의 해설 및 제주특별자치도>제주목관아의 글을 인용하였습니다.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
▪조선 朝鮮 1703년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보물 / 복제품複製品
1702년(숙종 29)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제주 방어와 군민의 풍속을 살피기 위해 순력巡歷을 실시하고, 재임기간 중에 있었던 중요한 일을 담아 「탐라순력도」를 제작하였다. 순력은 각 도의 관찰사가 정기적으로 도내 각 고을의 풍속과 민생을 살피기 위해 돌아보는 것으로 제주에서는 섬이라는 특성상 군사 직책도 겸한 제주목사가 이를 수행하였다. 「탐라순력도」는 제주 지도 1면에 행사 장면 39면, 완성한 뒤 새로 추가한 그림 1면을 포함하여 모두 41개의 그림과 서문 2면 등 총 43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면마다 상단에 제목, 중간에 그림, 하단에 일시, 장소, 이름, 수치 정보들을 넣었다. 이러한 3단 구성은 조선시대 관료들의 모임을 그린 계회도契會圖의 영향으로 보인다.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에 걸쳐 실시했던 순력장면이 22면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이 밖에도 명승지를 탐방하거나 양로잔치 및 활쏘기 대회를 거행하는 등 다양한 행사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서문을 쓴 일자가 1703년 음력 5월 13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첩의 제작 시기는 순력행사가 있었던 1702년 이듬해인 1703년 5월 초순경으로 추측된다. 그림은 화공 김남길이 그렸는데 그의 다른 그림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삼읍을 점검하다 三邑操點
1702년(숙종 29)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 41점 가운데 「제주조점」, 「정의조점」, 「대정조점」은 각 고을을 점검 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무관직, 백성, 논과 밭, 성정군, 창고의 곡식 수량을 공통적으로 기록하였다. 제주목과 달리 정의현과 대정현에는 목자牧子와 보인保人, 말과 검은 소의 수량을 더 기록하였다. 세 읍 모두 문묘와 제기, 제복, 서책, 군기와 집물 등도 점검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제주목사가 제주목뿐만 아니라 정의현과 대정현을 아울러 감독 관할하였던 것도 살펴볼 수 있다.
*성장: 성을 지키는 장수
**치총: 네 개의 성문에 배치한 우두머리 장령
***결: 1결은 1동의 10배로 넓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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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3읍 濟州三邑
The Three Eup System
조선은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330여 개 부府·목牧·군郡·현縣에는 수령을 내려 보냈습니다. 1393년(태조 2) 여의손呂義孫(?~?)이 첫번째 제주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1416년(태종 16)에는 제주 목사 오식吳湜(1370~1426)이 남쪽의 토착 세력을 통제하고 한라산 북쪽에만 관아官衙가 있는 불편을 덜기 위해 현감縣監 2명을 파견해달라고 건의합니다. 이후 제주목濟州牧, 정의현㫌義縣, 대정현大靜縣 체제가 되었습니다.
한라장촉(漢拏壯囑)
「탐라순력도」 첫 장에 수록된 제주도와 주변 지형이 그려진 지도로 「한라장촉」은 ‘한라산 주변의 장대한 경관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고 아래쪽이 북쪽으로 한양에 있는 임금이 내려다보는 방향에서 그렸다. 그래서 제주목의 동쪽이 ‘좌면左面’, 서쪽이 ‘우면右面’이다. 제주의 오름과 마을 이름을 비롯하여 방어시설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통해 본 제주의 진상
진상은 원래부터 납세의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각 도(道) 단위로 지방관이 한 달에 한 번씩 상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주·현에 그 부담이 배정되었고, 이것이 다시 각 민호民戶에 배정 되었다. 조선시대 제주의 진상물 품목으로는 말 · 귤 · 전복 · 옥돔 · 버섯 · 한약재 등을 들 수 있으며, 탐라순력도의 감귤봉진(柑橘封進) · 공마봉진(貢馬封進) 등의 화폭을 통해 조선시대 진상품의 봉진 절차를 엿볼 수 있다.
감귤봉진(柑橘封進)_귤 진상
감귤봉진은 망경루 앞뜰에서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봉진하는 그림이다. 진상할 감귤의 선별 · 검사 · 포장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망경루 앞뜰에서 여인들이 귤을 종류별로 선별하고 있고, 연희각에 앉은 이형상 목사의 입회하에 검사를 거친 다음 여인들 옆에서 남정들이 만든 나무통에 봉하고 있다.
그리고 감귤을 봉진하는 과정에서 짓눌려서 훼손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짚단을 이용해 싸고 나무통에 다른 물건과 함께 넣도록 했다. 당시 진상한 귤의 종류와 수량은 다음과 같다.
한편, 영조(1724)대 이후로는 임금의 특명으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제주 귤을 하사하면서 제술(製述)을 시험하던 황감제(黃柑製)라는 시험제도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에 수석으로 합격하면 문과의 전시에 곧바로 나아가는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
감귤의 봉진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매년 8월 귤나무의 상태를 조사하고, 귤의 수를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한다. 제주성 근처의 과원은 제주목사가 직접 시찰하고, 먼 마을에는 비장(裨將)을 파견해 일일이 과실 수를 조사해 문부에 기재한다. 봉진 시기가 오면 3읍의 수령이 책임지고 문부에 기재된 수에 맞추어 귤을 영문에 가져오게끔 한다.
2. 매년 9월에 제일 먼저 유자를 봉진한다.
3. 매년 10월에 당금귤을 천신용으로 예조(禮曹)에 보낸다. 물선진상은 초운에서 7운까지 이루어졌는데, 물선진상용 귤의 종류는 당금귤 · 금귤 · 감자 등이었다.
4. 매년 11월에 유감 · 동정귤 · 당유자 · 감자 · 산귤 등이 천신용과 물선진상용으로 봉진되었다.
5. 매년 2월에 청귤이 청신용과 물선진상용으로 봉진되었다. 청귤은 겨울을 넘겨야 제 맛이 나기 때문에 새해 들어 처음 올리는 천신용으로 봉진되었다.
공마봉진(貢馬封進)
진상에 필요한 말을 각 목장에서 징발하여 제주목사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1702년(숙종 28) 6월 7일에 실시되었다. 목자들이 자기가 관리하는 말들을 이끌고 목사 앞을 지나며 점검하고 있다.
공마점검은 관덕정 앞에서 목사가 입회한 가운데 실시되었다. 공마봉진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를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했다.
당시 봉진되었던 말은 어승마 20마리, 연례마 8마리, 차비마 80마리, 탄일마 20마리, 동지마 20마리, 정조마 20마리, 세공마 200마리, 흉구마 32마리, 노태마 33마리 등 총 433마리였고, 검은 소 20마리였다. 어승마와 차비마는 식년*마다 바쳤으므로, 이 해가 식년에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승마(御乘馬)와 차비마(差備馬)는 3년마다 바치는 말로 식년공마(式年貢馬)라 한다. [각주:럭셔리크로우]
당시 공마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봉진되었다.
1. 제주목사가 조정의 지시에 따라 그 할당량을 3읍의 감목관에게 배정한다.
2. 3읍의 감목관은 각 목장에 공마에 충당할 마필의 수집을 명한다.
3. 각 목장에서는 구마군·결책군·목자 등을 동원하여 공마를 가려낸다. 이때 미원장에 몰아넣은 마필들을 사장으로 통과시키면서 공마에 적합한 마필을 골라낸다.
4. 가려낸 공마를 소속 영문(營門)에 인도한다.
5. 제주·정의·대정 영문에서는 감목관의 책임 아래 습마(習馬) 6명이 각 목장에서 보내온 말의 마적(馬籍)·낙인자(烙印字)·말 주인(개인 말인 경우) 등을 확인한다.
6. 말의 나이, 키, 털빛, 건강, 조습실태 등을 조사하여 골라서 공마의 목록과 함께 보고한다.
7. 골라진 공마는 세목(細目)과 함께 조천포, 화북포로 운반해 진상선에 실어 조정에 바쳐진다.
우리가 아는 제주도의 또 다른 이름 삼다도(三多島)는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돌(石): 제주도는 화산 활동으로 인해 섬 전체에 돌이 많습니다. 특히 현무암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이며, 마을의 담장과 밭의 경계도 돌로 쌓았습니다.
▪바람(風): 제주도는 섬이라는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어 풍력발전기가 많이 보입니다.
▪여자(女): 제주도는 예로부터 해녀가 많아 여자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과거 제주도 남성들이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여성의 비율이 높다고합니다.
옛날 조선시대에 제주濟州가 본관인 고득종高得宗(1388~1452)은 홍화각기弘化閣記에 제주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북쪽에는 큰 바다요, 남쪽에는 높은 산이로다. 집집마다 귤橘과 유자柚子요, 곳곳마다 준마駿馬로다. [고득종高得宗(1388~1452)_홍화각기弘化閣記]
진상의 폐단
제주도는 예로부터 귤과 말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제주에서 진상해야 했던 품목은 이 두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해산물과 약재는 물론 매, 노루, 사슴꼬리, 사슴 혀, 꿩, 멧돼지, 호피, 녹피, 식용 표고버섯, 갓 재료인 양태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했습니다.
다양한 진상품과 과도한 액수는 결국 진상 폐단으로 이어졌습니다. 목자(牧子), 과원직(果園直), 포작인(鮑作人), 잠녀(潛女), 약한(藥漢) 등 진상물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피역을 선택했습니다. 심지어 육지로 도망치는 주민들이 늘어 인구가 감소했지만, 진상 액수는 줄지 않아 남은 주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또한 제주에서 제대로 생산되지 않는 진주, 앵무목, 무회목 등의 진상물을 무리하게 강요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옛날부터 제주인들의 힘들었을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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