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제석사지를 36도가 넘어가는 7월의 어느 날 다녀오게 되었다. 익산 제석사지(益山 帝釋寺址)는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로 1998년 5월 12일 사적 405호로 지정되었다.
익산 제석사지 : 주소_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247-1
제석사지로 가는 길은 전주-삼례-왕궁리유적-백제왕궁박물관 뒷 길을 이용했다.
익산 제석사지는 왕궁리 유적에서 직선거리로 약 1km 위치에 있어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아래 보이는 사적 제405호 제석사지 종합정비사업 안내판은 제석사지 마을 입구 주차장부터 폐기장까지 많이 보이는 대표 안내판입니다.
제석사지는 마을과 논 · 밭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 단계별 정비 사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토지매입이 진행 중이며, 일부 건물지 등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익산 제석사지 | 益山 帝釋寺址 Jeseoksa Temple Site, Iksan
사적 제405호 Historic Site No. 405
익산 제석사지는 백제 무왕 때 세운 제석사가 있던 터이다. 「관세음응험기」* 에 따르면, 제석사는 무왕 40년(639) 벼락으로 탑 하부 초석에 있던 사리장엄만 남고 모두 불타버려 다시 지었다고 한다. 발굴 조사에서 금당지 · 목탑지 · 회랑지 · 중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제석사지 북쪽 400m 지점에는 제석사 화재 후 폐기물을 버렸던 유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제석사의 가치와 위상을 보여 주는 천부상, 악귀상 등 불에 탄 소조편, 벽체편, 흙벽돌, 백제 기와편 등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석사지는 지금까지 조사된 1탑 1금당식** 백제 사찰 중에서 최대 규모이다. 익산 왕궁리유적, 미륵사지 등과 함께 백제의 익산 천도를 뒷받침해 주는 곳으로써 백제의 불교문화와 뛰어난 건축 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관세음응험기 : 일본 교토 쇼렌인에 소장된 보물로, 관음신앙 사례집이다.
**1탑 1금당식 : 중문과 탑, 불전, 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사찰 건축 방식.
목탑터 앞으로 안내판과 익산 스탬프 투어 BOX가 있다.
목탑터 | Wooden Pagoda Site
목탑터는 중문터에서 약 18.5m 떨어져 있고, 중문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37m이다. 목탑터의 중심에는 길이 182cm, 너비 175cm, 두께 76cm인 심초석이 2조각으로 깨진 채로 놓여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 길이 60cm, 너비 26cm, 깊이 16cm인 사리 공이 뚫려 있다. 목탑은 하층 기단의 길이가 21.2m인 이중 기단구조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단 안쪽에는 한 변의 길이가 11.2m인 불단으로 추정되는 단이 설치되어 있다. 목탑의 기초는 약 3m 높이로 정교하게 구분하여 판축해 만들어져 있다. 사방 각 면의 중앙부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지하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작업 통로가 네모서리에서 확인된다.
초석 윗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처음 보자마자 생각난 것은 별자리였고, 현재의 생각은 태양계 행성을 표현한 것 같다! 가운데는 태양과 수성 또는 달과 지구 그 주변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아직 학계에 연구가 안된 거라면, 이 논리는 "전주 럭셔리크로우" 의 고대 삼국 중 백제의 천문학 부분에서 그 흔적을 찾을 때 나왔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금당터(金堂址)
금당터는 목탑터에서 약 17m 떨어져 있고, 목탑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1m이다. 기단은 길이 약 30m, 너비 약 21m의 상층 기단과 길이 약 32m, 너비 약 23m의 하층기단으로 이루어진 이중기단 구조를 하고 있다. 기초는 적갈색의 사질 점토와 황색 마사토로 정교하게 판축하여 만들어져 있다. 길이가 약 5m, 너비가 약 3m인 계단 시설의 흔적이 앞·뒷면의 중앙 2군데에 있다. 제석사지 금당터는 백제 시대 금당 중에서 규모 가 큰 편이고, 가로와 세로의 평면 비율은 1:0.74로 부여 금강사지의 중창금당과 비슷하다. 금당터에서는 인동당초문 암막새가 전형적인 백제 시대 인동 자엽의 수막새와 함께 온전한 형태로 여러 점 출토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강당터(講堂址) | Lecture Hall Site
강당터는 금당터에서 약 26m 떨어져 있고, 금당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7m이다. 기단은 길이 약 52m, 너비 약 18m의 단층기단으로 추정된다. 또한 계단은 앞·뒷면과 왼쪽 중앙 3군데에 확인되며, 오른쪽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뒷면 중앙 계단의 규모는 길이 약 150cm, 너비 88cm이다. 강당터는 규모나 구조에서 익산 미륵사지의 강당터와 비슷하다.
승방터(僧坊址) | Monks' Dormitory Site
승방은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 제석사지에서는 강당지 북편으로 18.1m 지점에 승방이 위치하고 있다. 중문·탑·금당·강당 건물들과 같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된 긴 직사각형 형태의 남향건물이다. 승방 기단의 규모는 남북 13.1m로 추정되며, 동서 규모는 경작과 조사범위 내에 입지한 민가로 인하여 파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다만, 잔존해 있는 북측기단열의 동서길이가 65.5m로 강당터의 동서 너비보다 넓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승방터의 기단열은 동·서 회랑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동서건물터 외측기단 석렬까지 연장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부여 정림사지, 금강사지 승방과 유사하다.
목탑지-금당지-강당지-승방지 등에서 나온 유물들은 어디에 있을까? 미륵사지가 있는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된 제석사지 발굴 유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백제왕궁박물관에서 보았던 무왕과 익산 왕궁리유적이 왕궁이라는 설을 뒷받침해주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가 여기에도 나온다.
위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보았다. 아래의 원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다.
익산 제석사지(益山 帝釋寺址)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 사적.
개설
금마에서 동남쪽으로 약 6㎞ 떨어진 궁평(宮坪)마을 입구 쪽에 있는 제석사지(帝釋寺址)는 백제무왕이 수도를 왕궁평으로 옮기려고 지은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주존(主尊) 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이다. 목탑지 이외에는 대부분 민가가 들어섰거나 논밭으로 경작되어 그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 1998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제석사지가 자리하고 있는 궁평은 백제 때의 내궁(內宮)터로 알려져 있다. 내궁이란 내원당(內願堂), 내불당(內佛堂), 내사(內寺)의 성격을 띤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시는 제석사원(帝釋寺院)을 말한다. 이곳의 사지가 제석사지라는 것은 왕궁면이 일제 초기인 1913년 이전에는 제석면(帝釋面)으로 불리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출토되어 1942년도 국립공주박물관에 기탁된 제석사(帝釋寺) 명(銘)의 명문기와와 함께 인동문와당(忍冬紋瓦當)을 통하여 이곳이 바로 백제시대의 제석사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고대국가에서 불교는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왕실이나 국가 차원에서 거대한 사찰을 건립하였다.
신라에서는 황룡사(皇龍寺)가, 백제에서는 미륵사(彌勒寺)가 그와 같은 성격의 사찰이다. 그리고 고대의 도읍지에는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시고 신앙하는 제석사가 있었다. 백제무왕이 제석사를 건립한 것과 관련하여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육고(陸杲) 등이 지은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왕40년(정관(貞觀)13년 서기 639년)에 벼락으로 폐사(전소)되었으나 탑 아래 심초석에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동판금강반야경을 넣었던 칠함만이 보존되어 다시 사찰을 지어 안치하였다고 기록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에 천도하여 새로운 정사를 지었는데, 정관(貞觀) 13년(무왕 40년, 639) 11월 뇌우에 의하여 제석정사의 불당, 칠급부도(七級浮圖) 및 낭방(廊房) 등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런데 탑 아래의 초석 속에는 종종칠보(種種七寶)와 불사리를 넣은 수정병, 동판으로 만든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목칠함에 넣어두었는데, 초석을 빼내보니 모두 소진되고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을 넣어둔 칠함만이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수정병은 내외가 철견(徹見)하고 뚜껑 역시 움직이지 않았는데 사리는 모두 없어져 나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병을 가지고 대왕한테 가니 대왕은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 병을 열어 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병 안에 있어서 밖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왕과 여러 궁인들은 불교에 대한 신앙을 배가하고 다시 탑을 쌓아 이를 저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서 나오는 사리병과 금강반야경은 왕궁리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와 매우 흡사하다. 다만 동판 불경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순금제 금판 불경으로 구리와 금의 차이가 날 뿐이다. 그리고 사리가 6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 왕궁리오층석탑 안에서는 16개가 들어 있었다. 또, 목칠함 속에 있었다고 했으나 금제함 속에 들어 있었던 점만이 다르다. 이곳 유구에 대한 훼손을 방지하고 제석사지의 보존과 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를 얻고 그 범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1993년 말에서 1994년 초에 걸쳐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목탑지·금당지 기단·강당지 기단이 확인되었다. 또한 남북 일직선상에 목탑과 불전과 강당을 둔 가람배치(伽藍配置)였으며, 목탑과 불전 사이 그리고 불전과 강당 사이에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떨어져 건물을 배치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때문에 제석사지의 가람배치는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또는 금강사지(金剛寺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일직선상에 앞에는 중문(中門)을 두고 그 뒤에 탑과 불전과 강당을 배치하여 중문에서부터 강당까지를 회랑(廻廊)으로 구획한 1탑1금당(一塔一金堂)의 가람배치임이 확인되었다.
내용
목탑지(木塔址)는 외형상으로 파악이 된다. 사방 약 12m 정도의 규모와 약 1.5m 내외의 높이로 토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2매로 절단된 대형의 심초석(心礎石) 1기가 남아 있어 육안으로 이곳이 목탑지임을 알 수 있다. 토단의 한 변이 12m 정도이기 때문에 목탑지의 규모는 한 변이 대체적으로 이 정도의 크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금당지(金堂址)의 남측기단은 동서 31.7m, 남북 23.2m로 금당지의 기단구조는 미륵사지 탑지나 불전지에서와 같은 형태의 2중기단(二重基壇)으로 확인되었다. 즉 제석사지 불전지의 기단구조는 면석을 겸한 지대석 위에 하층기단 갑석(甲石)을 올리고 갑석의 안쪽에 상층기단 지대석을 두고 그 위에 면석과 갑석을 올린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건물의 서쪽 기단부에서는 계단지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아 건물의 측면부에는 계단을 시설하지 않고 미륵사지 불전지에서와 같이 전면과 후면에만 계단을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강당지(講堂址)의 남북 길이는 18.4m이며 동서의 길이는 사찰중심선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보았을 때 약 52.7m로 확인되고 면적은 약 291평의 규모로 보인다. 기단구조는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이루어졌다.
특징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주로 수막새와 암막새·인각와·명문와 및 평기와 조각들이 대부분인데, 백제유적에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석사지는 몇 개 남아있지 않은 백제사찰지로서의 중요성과 함께 『관세음응험기』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과 무왕대에 익산천도의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된 유적이라는 점, '93년 실시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시굴)조사결과 목탑지·금당지·강당지 등의 기단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유적에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왕궁리유적전시관도록(王宮里遺蹟展示館圖錄)』(왕궁리유적전시관편, 왕궁리유적전시관,2009)『익산(益山) 제석사지(帝釋寺址) 시굴조사보고서(試掘調査報告書)』(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1994)
「백제제석사지(百濟帝石寺址)의 연구」(황수영,『백제연구총서』4권,1994)
*제석천 : 불교에서 도리천의 왕을 의미하는 수호신.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須彌山)이 있는데 그 정상에 도리천이라는 하늘이 있다고 한다. 제석천이 머무르는 곳이 도리천(忉利天)이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제석천(帝釋天)]
익산 제석사지 출토 석재 | Be excavated stone artifact from lksan Jaeseok-Temple
제석사지 발굴조사 및 유적 정비과정에서 수습된 석재들이다. 초석, 지대석, 갑석 등 다양한 종류가 확인되는데, 제석사의 건물에 쓰였던 부재로 추정된다.
날씨가 점점 맑아져와서 처음으로 돌아와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마을 입구에 주차된 차로 다시 간다.
오늘 날씨는 37℃ 까지 올랐고, 엄청 습하다. 차에서 에어컨을 켜놓고 다시 제석사지 폐기장으로 출발!~
제석사지 폐기장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에 찾았지...모르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그 흔한 방향 안내판도 없었다. 제석사지 정비사업이 단계적이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직도 아쉬운점이 많이 보였다. 마을에서 북쪽으로 400m를 올라가면 폐기장이 나온다.
서북 방향으로 미륵산이 보인다.
익산 제석사 폐기장 | Iksan Jeseoks-Temple, Waste Site
제석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폐기장은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전반적인 범위와 규모가 파악되었는데, 평면형태는 아래쪽이 약간 각진 타원형이며, 규모는 남북(잔존) 32.4m, 동서 약 28m 이다. 폐기장 내부에서는 수막새를 비롯한 삼국시대(백제)의 다양한 와전(瓦塼)과 소조상, 건물 벽체편 등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조사결과 일괄 폐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기록된 "정관 13년(639년) 뇌우로 인해 불당과 칠층탑 및 회랑과 승방이 모두 불탔다. (...以貞觀十三年歲次 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 帝釋精舍 佛堂 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燒盡...) 라고 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전소된 제석사의 폐기물을 이곳에 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제석사지 폐기장 유물을 살펴봅니다.
소조 동물상, 소조 악귀상, 소조 승려상
소조상 얼굴과 소조 악귀상
소조 천부상
제석사지편을 완성하고자 더운 여름날 많이 고생했습니다. 다시 제석사지의 유물을 찾아서 익산국립박물관으로 가야했고, 제석사지에 대한 공부와 함께 왕궁리유적과 무왕, 백제사, 제석사지 연결 고리를 만들어 가야했습니다. 역사를 하나 하나 알아 갈때 재미와 보람도 있지만, 제석사지의 경우 폐기장도 중요했고, 일본의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의 내용이 또 맞아 갔던 부분들... 왕궁리 유적과 동서 방향 동일선상에서 약1km 차이에 위치한 부분... 다시 왕궁리 유적 서쪽으로 고도리석불입상이 있는것과 익산 쌍릉까지...역사의 연결고리를 찾아가 봅니다.
언젠가는 제석사지 터에 복원된 제석사를 볼 수 있겠지요?
과거에는 폐기장 이었으나, 현재는 과거의 열쇠가 된 제석사지 폐기장에서 "전주 럭셔리크로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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