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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정읍 송우암수명유허비(宋尤庵 受命 遺墟碑) 우암 송시열의 흔적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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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5월 01일과 2021년 08월 21일에 찾아갔던 정읍 송우암 수명 유허비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한다.
송우암 수명 유허비는 정읍 시내권(주변관광지: 충렬사_충무공원, 정읍향교, 정읍사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정읍의 유명한 시내 거리인 정읍쌍화차거리에 맛집이 있는 곳이라 접근성이 좋다.

정읍쌍화차거리

 

 

 

 

 

유허비각 遺墟碑閣 (2021년 08월 21일)

 

 

 

유허비각 遺墟碑閣 (2020년 05월 01일)

 

 

정읍 송우암 수명 유허비(宋尤庵 受命 遺墟碑) | Stele of Song Si-yeol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0| Jeollabuk-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50

송우암 수명 유허비1

 

 

송우암 수명 유허비2

 

 

유허비각 遺墟碑閣과 안내문

 

 

송우암 수명 유허비는 조선 후기 유학자 송시열(宋時烈)의 죽음을 기려, 그가 죽은 곳에 세운 것이다. 숙종 15(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 간 송시열은 조정의 명령으로 서울로 다시 끌려오던 도중, 68일 새벽에 정읍에 도착하여 객사에서 *사약을 받고 바로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송시열의 무고함이 밝혀져 영조 7(1731)에는 그가 사약을 받았던 이 자리에 비를 세웠다. 현재의 비각은 1925년에 군수 이동한이 다시 세운 것이다. [2021년 08월의 안내판]

 

*사약(賜藥): 왕족 또는 사대부가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극약.

宋尤庵 受命 遺墟碑 (2020.05.01.)
 

 

송우암 수명 유허비(宋尤庵 受命 遺墟碑) | Song U-am Sumyeong Yuheobi

Jeollabuk do tangible Cultural Property No. 50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 | 전라북도 정읍시 수성동

이 비석은 조선후기 유학자 송시열(1607~1689)의 죽음을 기려, 그가 죽은 곳에 세운 것이다. 숙종 15년(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간 송시열은 조정의 명령으로 서울로 다시 끌려오던 도중, 6월 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사에서 사약을 받고 다음날 새벽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송시열의 무고함이 밝혀져 숙종 21년 정읍 하모리 모촌에 고암 서원을 세우고, 영조 7년(1731)에는 그가 사약을 받았던 이 자리에 비를 세웠다. 현재의 비각은 1925년에 군수 이동한(李東漢)이 다시 세운 것이다. [2020년 05월의 안내판]

유허비각 遺墟碑閣

 

 

유허비각 遺墟碑閣

 

 

비각 안의 비석

 

 

약 1년 사이에 앞면의 철책과 안내판이 변경 되었다. 내용으로 봤을 때에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송시열은 "6월 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사에서 사약을 받고 다음날(6월 8일) 새벽 숨을 거두었다." 라는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다음날 새벽 숨을 거두었다는 표현도 많은 문헌을 고증한 결과 6월 8일 아침 진시(辰時-7~9시)에 돌아가셨다는 표현이 맞는것 같다!

 

그렇다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누구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조선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영보(英甫), 우암(尤庵), 우재(尤齋), 문정(文正)
-출생일: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요약: 송시열은 조선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607년(선조 40)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년에 사망했다. 김장생·김집 부자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효종 재위 시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현종 즉위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주자의 교의를 신봉·실천하는 데 전념하여 거대한 사상체계를 완성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될 정도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당쟁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숙종 대의 기사환국* 때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송시열(宋時烈)]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

 

 

기사환국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쉽게 이야기 하면 드라마의 소재로 많이 나오는 장희빈 이야기로 생각하면 쉬울듯하다! 여기에서 원자는 훗날의 경종(宗) 조선 제20대 왕(재위:1720~1724)이다. 그래도 이왕 공부할 겸 기사환국의 구체적 이야기를 알아보고자한다.

 

숙종1680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경왕후(仁敬王后)가 서거하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았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宗社)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희빈으로 높였다. 이에 대하여 노론측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봉조하(奉朝賀)로서 옛날 송나라 신종(神宗)28세에 철종(哲宗)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번왕(藩王)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태자로 책봉하여 그 뒤를 잇게 한 고사를 들어 반대론다시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는 노론이 축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黜送)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으며, 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민종도(閔宗道민암(閔黯목창명(睦昌明)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론계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李頤命김만중(金萬重김수흥·김수항(金壽恒) 등이 복주(伏誅) 또는 유배당하였다. 그 해 4월에 이르러 숙종이 중전 민씨를 폐비할 뜻을 비추자, 이에 노론측은 오두인(吳斗寅)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그 주동자인 박태보(朴泰輔이세화(李世華오두인 등이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 갔으며, 52일에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후궁 장씨가 1686년에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淑媛)으로 봉해진 이듬해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으로 올랐는데, 이는 장씨로 인한 정국변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조사석은 장씨의 외가와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무렵 동평군 항(東平君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제조로서 궁중을 무상 출입 하였는데, 숙원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그와 연결을 맺고 있었다. 후궁 장씨의 이러한 주위 인물들이 마침내 그녀의 생남을 계기로 남인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원자 정호 때는 민암·민종도·이의징(李義徵) 등의 남인이 동평군·장희재 등과 직접 연락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장씨의 집안은 작은아버지가 역관으로 중인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신분으로 왕비에까지 책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경제상의 변동으로 상인·역관 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이 일로 1683년 경신환국 이래 집권해 온 서인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크게 진출하였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기사환국(己巳換局)_집필 1995년 이태진]

 
국보 제239호_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초상화, 작가미상

[그림출처: 문화체육관광부_국립중앙박물관_소장품]



평상복 차림에 복건을 쓴 이 작품은 송시열을 그린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수작으로 평가된다. 주름 및 수염에 보이는 섬세한 얼굴 표현과 사실적인 묘사력이 두드러진다. 몸의 윤곽을 그린 견고한 필선과 음영을 표현하지 않은 직선 위주의 간명한 옷 주름은 조선 중기 학문과 사상을 지배한 거두(巨頭)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얼굴과 복식에서 음영 처리가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은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정조가 1778년에 지은 찬시가 예서로 씌어 있고, 오른쪽에는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글이 해서로 씌어 있다. 이 작품은 정조의 어제로 미루어 보아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세기 전형적인 특징 또한 남아 있어 정조 연간에 원본에 충실하게 옮겨 그렸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본관이 충남 논산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우재(禺齋), 화양동주(華陽洞主)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으로,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노론(老論)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초상화는 우암 송시열이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幅巾)을 쓴 모습을 반신상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의 우측의 글의 내용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내용 보기가 원문입니다.
 
 

송시열이 스스로 경계하는 글과 정조의 글

이 초상화에는 송시열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찬(自讚)과 정조가 송시열을 칭송하는 글[御製]이 적혀 있어 더욱 흥미롭습니다. 화면 오른쪽에 쓰인 자찬은 1651년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것으로 이때를 초상화가 제작된 시기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림에 표현된 모습이 연로해 보여 초상화가 그려졌을 당시에 쓴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고, 정조의 어제가 쓰인 1778년에 그려진 이모본(移模本)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상단의 표제만으로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이 글들이 초상화의 품격을 더욱더 높여 주고 있습니다.

 

麋鹿之群 자연 속에서 사슴들과 함께 지내며
蓬蓽之廬 초가집에서 사는구나.
窓明人靜 창문은 환히 밝고 주위가 고요할 때
忍飢看書 주린 배 참으면서 책을 보았다네.
爾形枯臞 네 모습 볼품없고
爾學空疎 네 학문 텅 비었구나.
帝衷爾負 천제(天帝)의 진실한 마음을 어기고
聖言爾侮 성인(聖人)의 말씀 업신여겼으니.
宜爾置之 너는 단언하건대
蠶魚之伍 책벌레구나.

崇禎紀元後辛卯 1651(효종 2) 우옹(尤翁)이 화양서옥에서 직접 글을 尤翁自警于華陽書屋 짓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다.

 

御製 正廟朝 정조대왕이 지은 글

節義千秋高 절개와 의리는 천년 세월이 흘러도 고상하여
平生我敬重 평생 동안 나는 존경하였다.
烈祖屢褒崇 역대 임금들도 누차 칭찬하고 높이 평가하였으니
士林孰不聳 사림(士林)들인들 어느 누가 공경하지 않겠는가?
橫竪皆當理 종횡무진으로 내뱉는 말씀은 모두 이치에 합당하여
蔚然理學宗 아름답게도 학문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不盡經淪業 천하를 다스릴 원대한 계획을 펼치지 못하고
吁嗟叔季逢 !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네.
洛中祠屋在 한양의 사당(祠堂)
遺像肅淸高 엄숙하고 고고한 선생의 초상화가 있어
衿佩盈庭會 온 유생들이 모두 모일 때에
承宣奠一醪 승지(承旨)가 한 잔 술을 올린다.

崇禎紀元後再戊戌三月, 1778년 바쁜 국정(國政)에 틈을 내어 글을 짓다.
追製於萬機之暇

 

[글 출처: 문화체육관광부_국립중앙박물관_소장품]

 

비문의 전체

 

 

비각의 비문

 

좌측면과 우측면의 비문

 

 

가첨석 (加檐石)


비석의 *가첨석(加檐石) 부위가 약간 크게 느껴진다.
*가첨석(加檐石): 비석을 지붕처럼 덮은 덮개돌

가첨석과 비각 내부의 모습

 

비석에 새긴글

 

비석에 새긴글의 내용을 해석하기가 어렵다. 한자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찾아봤다. 아래 글은 정읍시청 홈페이지에서 찾은 내용이다. 좀 더 구체적인 비석의 역사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송우암 수명 유허비 宋尤庵 受命 遺墟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지정일: 1974년 9월 27일
-시 대: 조선 영조 7년(1731년)
-소재지: 전북 정읍시 우암로 54-1(수성동)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은 조선조 숙종 15년(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같은 해 5월 28일 조정(朝廷)의 명령으로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하는 도중(途中)에 6월 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관(客館)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6월 아침 *진시(辰時)에 돌아가니 그 때 나이 83세였다.

그 뒤 6년이 지나서 우암(尤庵)의 무고(無辜)함이 밝혀져 숙종 21년(1995) 5월에 지금의 정읍시 하모리 모촌(井邑市 下茅里 茅村)에 고암서원(考庵書院)이 세워졌고, 영조 (英祖) 7년(1731)에 이 곳에 수명 유허비(受命 遺墟碑)가 세워졌다.
이 비각(碑閣)은 영조(英祖) 44년(1768)과 순조(純祖) 11년(1811)에 고쳐 수선(重修)하고 지금의 비각은 여섯 번째나 고쳐 지은 것으로, 1925년 군수 이동한(郡守 李東漢)이 고쳤으며, 군수 김삼주(郡守 金三柱)가 앞면(前面)의 흙담을 헐어내고 철책(鐵柵)으로 만들었다.

*진시(辰時): 아침 7~9시
비각 안의 비석

 

 

송우암수명유허비문(宋尤庵受命遺墟碑文)

 

송우암수명유허비문(宋尤庵受命遺墟碑文)

아아여기는 우암 송선생이 명을 받은 곳이다.
그 해, 기사(1689)년에 군흉들이 장차 큰 일을 행하는데 선생의 도덕성이 세상에 큰 스승이 되거늘 먼저 독한 솜씨를 써서 이 해 이월에 제주로 귀양 보냈다가 또다시 글을 올려 잡아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이 고을에 이른 뒤에 그 명령이 이르니 그 때가 유월 팔일이었다.

아아옛적 공자와 주자의 불행은 오히려 아철의 화에 벗어났는데 이제 선생은 이를 면하지 못했으니 어찌 이 어려움이 소매를 돌리고 옥살이를 하고 숨어사는 세상보다도 심함이 있음인가. 아 슬프도다. 선생이 계실 때에 곤전 자리가 기울어짐을 듣고 통곡하며 식음을 끊고 권수암 상하에게 이별을 고하되 학문은 주자를 주로하고 사업은 효종의 유지를 따를지니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먹으므로 박부득이 인통함원 박부득이여덟자를 주노니 잊지 말라 주자께서 임종에 문인에게 곧을직 한 자를 가르쳤는데 내 말도 또 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이로부터 선생은 식음을 아니한지 이미 여러 날이라 기운은 점점 미약하되 더욱 스스로 신칙하며 여러 번 약을 올리라 하며 말씀하되 한 목숨 끊는데 명령을 받는 데 미치지 못할까 두렵다 하더라 하루 전에 흰 기운이 하늘을 지나고 이 날 밤에 규성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기운이 집을 꿰었다.

육년 지난 갑술(1694)년에 성상께서 크게 깨닫고 특별히 선생의 벼슬을 회복하고 시호를 문정이라 주었다.
선생의 휘는 시열이요 자는 영보이요 은진 사람이니 만력 정미(1507)년에 낳았으며 효종께서 큰 뜻이 있어 연하여 유자의 석인에 올라 선생을 먼저 부르고 뜻이 합하여 밝고 화더니 현종조에 이르러 좌상이 되었고 숙종 초에 소인들의 말로써 바다섬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옴에 예로 높임이 더 지극하더니 이윽고 세상 도가 무너지고 괴변이 일어나 선생은 마침내 큰 화를 입었으니 아아 차마 말하랴. 이 고을은 선생의 서원이 있고 유족이 있는지라 남쪽 선비들은 이르되 이 옛 땅에 또 가히 기록이 없지 못하리라 하고 드디어 뜻을 모아 도를 갖추고 의현에게 글을 쓰라 하는데 식견이 어둡고 글이 옹졸하여 감히 크게 펴서 말하지 못하고 삼가 선생 임명시에 일을 기록하여서 뒷 사람 이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은 조선조 숙종 15(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같은해 528일 조정(朝廷)의 명령으로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하는 도중(途中)6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관(客館)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6월 아침 진시(辰時)에 돌아가니 그 때 나이 83세였다.

그 뒤 6년이 지나서 우암(尤庵)의 무고(無辜)함이 밝혀져 숙종 21(1995) 5월에 지금의 정읍시 하모리 모촌(井邑市 下茅里 茅村)에 고암서원(考庵書院)이 세워졌고, 영조 (英祖) 7(1731)에 이 곳에 수명 유허비(受命 遺墟碑)가 세워졌다.
이 비각(碑閣)은 영조(英祖) 44(1768)과 순조(純祖) 11(1811)에 고쳐 수선(重修)하고 지금의 비각은 여섯 번째나 고쳐 지은 것으로, 1925년 군수 이동한(郡守 李東漢)이 고쳤으 며, 군수 김삼주(郡守 金三柱)가 앞면(前面)의 흙담을 헐어내고 철책(鐵柵)으로 만들었다.

[글 출처: 정읍시청 홈페이지_문화관광_도지정문화재]

 

 

일단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늘 공부하는 영·정조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영조 (英祖) 7년(1731)에 이 곳에 수명 유허비(受命 遺墟碑)가 처음 세워졌고, 여섯 번이나 고쳐 지은 것과 국보 제239호_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초상에서 정조대왕이 1778년 바쁜 국정(國政)에 틈을 내어 글을 쓴 부분 등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의 역사적 평가와 더불어 내가 살고 있는 이 고장에 관련 유적들이 남아 있음에 감사했다!

짬뽕맛집 양자강

 


송우암 수명 유허비의 거의 맞은편에 보이는 양자강에서 가족과 단란한 식사를 함께 했다. 양자강은 생방송오늘, 생활의 달인, 백종원의 3대천왕 등에 나온 짬뽕명가로 비빔짬뽕, 볶음 탕수육 등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중화요리전문점 양자강

 


가게에 사람이 없으면 홀과 주방 등을 찍지만 사진이 없는걸 보니...만석이 틀림 없다!~

비빔짬뽕이 유명하다고

 

짬뽕명가 양자강 메뉴판

 

테이블이 빨간색입니다.

 

기본 반찬은 김치, 단무지, 양파


이 날 정확히 시킨 메뉴가 가물가물 합니다. 세트메뉴(3,5번)인지...아이가 있어서 짜장은 확실하고, 저는 짬뽕을 시켰는데, 비빔짬뽕인지, 삼선짬뽕인지....확실한건 괜찮았다는 것!~

탕수육 군만두

 

탕수육 소스

 

짜장면

 

양자강 짬뽕!~

 


짬뽕 좋아하는 분께서 찾는 다면, 정읍쌍화차거리의 양자강을 추천합니다. 송우암 수명 유허비는 가까우니 잠시 들려서 보고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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