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주 럭셔리크로우입니다. 익산 왕궁리유적-제석사지-고도리 석조여래입상-무왕릉(쌍릉)-미륵사지로 연결하여 포스팅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22.07.08.에 고도리 석불 편을 완성하고자 사진을 찍었습니다.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익산 금마면 고도리(益山 古都里)에 있는 석조 불상으로 높이는 4.24m로 1963년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불상이 서 있어서 동고도리 (여女)석상, 서고도리 (남男)석상이라 구분짓습니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 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 / 보물 제46호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돌로 만든 불상으로 두 개의 불상이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서 있다. 두 불상이 평소에는 떨어져 지내다가 매년 음력 12월이 되면 만나서 회포를 풀고 새벽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두 개의 불상은 머리부터 받침돌까지 돌기둥 한 개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머리 위에 높고 네모난 갓 모양의 관을 쓰고 있다. 고려 시대에 돌로 만든 불상은 신체를 단순하게 표현하고 큰 돌을 사용하였는데,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역시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동고도리 (여女)석불입상
군남석불중건기(郡南石佛重建記) 비문에 따르면 / 쌍석장인(雙石丈人)이 쓰러져 흙에 묻혀 있고, 비 · 바람에 풍화되고 이끼가 자라 있어 수풀을 헤치고, 흙을 걷어내 옛 자리에 옮겼다고 써 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쌍석와불(雙石臥佛)과 쌍석장인(雙石丈人)이라 표현 한다. 일반적인 석상과 불상의 의미가 섞여 있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오년(철종 9, 1858년) 4월 하순 군민 소휘건이 삼가 기록하다.
익산군수로 부임해 온 황종석(黃鍾奭)이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때는 조선 철종 9년, 무오년(戊午年) 이다.
위 사진 좌측 중앙에... 함풍咸豐 8년(철종9, 1858년) 5월 세우다.
동고도리 석상 또는 동고도리 석불입상의 표정을 감상해보자.
아래 사진에서 보면 낮은 코와 가느다란 눈과 입술, 긴 귀의 모습이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 약 200m 떨어진 서고도리 (여女)석불입상을 보기 위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두 석상 사이에 흐르는 익산천 위로 작은 다리가 있다.
서고도리 (남男)석불입상
태양이 서고도리 석불입상의 바로 뒤에 있어서 사진을 찍기가 힘들었습니다.
서고도리 (남男)석불입상의 푯말도 내용은 같습니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의 국립중앙박물관_문화재 설명문을 보겠습니다.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상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손, 대좌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에 두 불상이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4각형의 높은 관(冠) 위에 다시 4각형의 갓을 쓰고 있다. 4각형의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는데,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다. 목은 무척 짧게 표현되어서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이 간신히 배에 나타내었다. 도포자락 같은 옷은 특별한 무늬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臺座)와 불상을 같은 돌에 새겼는데, 앞면을 약간 깍아 대좌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마치 분묘(墳墓)의 석인상(石人像)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체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보인다.
이제 서고도리 석불입상의 얼굴표정을 감상해보자. 동고도리에 비해 확실히 남성성이 느껴진다.
아래 사진에서 더 두드러지게 관모의 아랫부분 사각 귓퉁이에 네개의 구멍이 뚫린게 보인다. 이부분은 동쪽과 서쪽 석불입상의 관모에 모두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원래 장식이 있었던것 같다! 또한 쓰러지면서 목 부위가 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사진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코아래 인중 및 입술 아래 양 옆으로 수염이 보인다. 동쪽의 석불입상에는 없는... 그래서 서쪽의 서고도리 석불입상은 (남男)석상, 동쪽의 동고도리 석불입상은 (여女)석상으로 보여진다.
역광에서 찍다보니 부처님 뒤에 있는 후광이 광배(光背)처럼 보인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의 조성 시기에 대한 글을 찾아 보았습니다.
원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부분 발취입니다.
...머리에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1963년 지정)과 같은 사각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그 위에는 한 겹의 사각형 보개(寶蓋)가 있다. 얼굴의 기본 형태도 사각형인데, 볼은 약간 둥글며, 조금 튀어나온 턱이 목 대신 몸통과 얼굴을 구분해주고 있다 .거의 평면에 가까운 안면에 가는 눈과 눈썹 그리고 짧은 코와 작은 입을 음각선으로 나타냈다. 괴량감은 없지만 차분하고 웃음기 머금은 인상적인 상호(相好)임을 느낄 수 있다. 극히 단순하고 형식적인 형태의 귀가 길게 묘사되어 있다. 몸통은 사다리꼴의 사면체 석주(石柱)에 불과하다. 옷은 통견(通肩)으로 양어깨에서부터 평행선을 이루며 내려와 발목에서 좌우로 갈라져 양 측면까지 이어졌다. 옷주름이 신체보다 약간 도드라지게 되어 있으나 무늬는 전혀 없다. 앞으로 모아 배에 붙인 손과 팔의 일부가 음각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를 밟고 선 발도 형식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대좌는 신체보다 약간 커서 앞으로 튀어나와 있으나, 역시 무늬가 없다. ...(중략)...
이 상은 조각 수법이 지극히 단순하여 세부적인 고찰은 어렵지만, 높은 관을 쓴 점이라든지 그 위에 보개를 올려놓은 점 등은 이웃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2018년 지정)과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성 시기는 훨씬 뒤인 고려시대 말엽으로 짐작된다.
다음 이야기는 1872년 군현 지도에 나온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과 무왕릉(쌍릉) 과의 관계 그리고 왕궁리 유적과 제석사지의 위치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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