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의 찜 통 더위를 해치고 익산 쌍릉으로 출발!~ 전주에서 삼례 익산 왕궁리유적을 지나 조금만 가면 목적지에 쉽게 올 수 있다.
이곳 주차장은 약 40대 정도는 충분히 주차가 가능하고 늘 한산하다. 주차 걱정이 필요 없다. 반대로 말하면 찾는 이도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라 능히 포스팅을 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익산쌍릉 안내판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는 배롱나무에 선홍빛 꽃이 피어있었다.
익산 쌍릉 Royal Tombs in Iksan
굴식돌방무덤 2기가 남북으로 180m 거리에 있어 쌍릉이라고 불렸으며, 백제 30대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전한다. 쌍릉은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무덤으로, ‘말통*대왕릉’ 이라 부른다고 쓰여 있다. 봉분이 큰 북쪽 것을 대왕릉, 작은 남쪽 것을 소왕릉이라고 한다. 모두 둥그런 봉분을 쌓았으며, 무덤방은 화강암을 매끈하게 다듬어서 백제왕릉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고분들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1917년 일본인이 발굴하였는데, 이미 도굴되었지만 썩고 남은 목관과 관 꾸미개, 토기 등을 수습하였으며,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7년과 2019년에 다시 발굴조사하였는데, 대왕릉 무덤방에 있던 인골은 7세기 전반에 사망한 50세 이상의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따라서 쌍릉은 641년에 죽은 백제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으며 미륵사, 왕궁성 등 무왕의 익산 경영과 직접 관련되는 무덤으로 추정한다.
*말통: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과 같은 의미, 말은 서 의 뜻인 ‘마’, 통은 동으로 ‘마를 캐는 아이’ 를 가리킴.
왕릉이 비슷한 부분이 소나무 숲으로 되어있는데, 이곳 쌍릉 역시 마찬가지로 소나무 숲으로 되어있다. 우선 가까운 소왕릉부터 보기로 한다.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알아보니 현대에 만들어진 돌상과 돌의자라 한다.
소왕릉(小王陵)
이 무덤은 180m 북서쪽에 있는 대왕릉보다 봉분이 작아서 소왕릉이라고 불렸다. 무덤방은 대왕릉과 같이 화강암을 매끈하게 다듬어서 만든 백제 후기 굴식돌방이다. 둥그런 봉분은 지름이 13.0m, 높이가 3.0m로 대왕릉보다 작으며, 무덤방도 길이가 3.43m, 너비가 1.28m, 높이가 1.75m로 대왕릉보다 약간 작다.
대왕릉처럼 판축기법* 으로 봉분을 쌓았다. 무덤방 입구와 봉분에서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묘표석**으로 보이는 돌 2매가 발견되었다. 무덤방 바닥 한가운데에 길이가 2.45m, 너비가 0.63m, 높이가 0.20m인 관대***가 만들어져 있다.
소왕릉은 무왕의 왕비 무덤으로 전해왔으나 발굴조사에서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봉분을 대왕릉처럼 쌓았으며 무덤방의 크기나 모양 등으로 볼 때 대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왕릉급이라고 할 수 있다.
*판축기법 : 나무판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다져 쌓는 기법
**묘표석 : 무덤의 주인공을 알리는 비석과 같은 돌
***관대 : 무덤 안에 시신을 넣은 관을 얹어 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널받침
소왕릉은 대왕릉에 없는 석렬 시설이 보인다. 성토부가 끝나는 지점에는 장방형의 석재(길이 60~100cm)를 세워 반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석렬을 시설하였다.
소왕릉을 둘러보고 다시 대왕릉쪽으로 이동해본다. 참고로 소왕릉과 대왕릉의 거리는 약 200미터 입니다.
대왕릉(大王陵)
이 무덤은 쌍릉 가운데 북쪽에 자리한 봉분이 큰 무덤으로 대왕릉이라고 불린다. 무덤방은 화강암을 매끈하게 다듬어서 만든 백제 후기 굴식돌방이다. 둥그런 봉분은 지름이 25m 정도이며, 높이가 4.0m이다. 무덤방은 길이가 4.01m, 너비가 1.75m, 높이가 2.25m이다. 백제왕릉이라고 하는 부여 능산리 굴식돌방 무덤과 같은 모양인데, 길이가 3.26m로 능산리에서 가장 큰 동하총보다도 크다. 남면 중앙에 널길*이 있는데 널문**으로 닫혀있었다. 무덤방 바닥 한가운데에 길이가 2.7m, 너비가 0.84m, 높이가 0.25m인 관대***가 있다. 2017년 조사에서 판축기법****으로 봉분을 쌓은 것을 확인했는데, 백제 고분 가운데 첫 사례였다. 대왕릉은 무덤방의 모양이나 크기, 인골 분석을 통해 백제 30대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한다.
*널길: 고분의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무덤방까지 이르는 길
**널문: 시신을 안치한 무덤방의 문
***관대: 무덤 안에 시신을 넣은 관을 얹어 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널받침
****판축기법: 나무판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다져 쌓는 기법
대왕릉의 사진은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며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익산 쌍릉(무왕릉)의 발굴 이야기를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익산 쌍릉
익산 쌍릉은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한다. 오금산 서쪽 능선에서 뻗어 내린 낮은 구름상에 2기의 원형 봉토분이 약 180m의 거리를 두고 북쪽에는 대왕릉 남쪽에 소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쌍릉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쌍릉(雙陵)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라고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금마군조에서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왕비)의 능이 있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이다.” 라고 쌍릉의 피장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절요』 충숙왕 16년조(1329년)에는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조상 호강왕의 능을 발굴(도굴)하였다....” 라고, 쌍릉의 도굴사실을 전하고 있다.
익산쌍릉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12월에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조사되었다. 조사결과는 13행으로 기술된 약식 보고서와 유리건판사진 및 조사당시 봉분 및 석실의 실측도로만 전해지고 있어서 그 구체적인 조사 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 소왕릉에 대해서는 대왕릉과 동일한 형식으로 되어있고, 규모의 크기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7년~2019년까지 익산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쌍릉을 재조사하였다. 이는 익산쌍릉의 명확한 정체성을 파악하고, 향후 효율적인 보존·정비 방안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대왕릉 발굴조사 결과
봉분의 규모는 직경 25m, 높이 4m 내외로 확인되었으며, 봉분은 제석사지 목탑지 기단조성과 같은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봉분 내에서 조사된 석실묘의 구조는 단면 육각형의 7세기대 백제 사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확인되었다. 잘 다듬어진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벽석 위에 1매의 고임석을 두고 2매의 천장을 올린 형태이다. 짧은 연도를 두고 현실 내 중앙에는 목관을 안치하였던 화강암제 관대(길이 270cm, 너비 84cm, 높이 25cm)가 놓여있다. 석실 규모는 길이 401cm, 너비 175cm, 높이 225cm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왕릉보다도 큰 규모이고, 석재를 다듬은 기술과 구조의 치밀한 짜임새 등을 볼 때, 매우 공력을 들여 만든 석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 내 관대 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상자 안에는 102 조각의 인골이 담겨 있었다. 인골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피장자의 성별이나 생전상황들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확인되었다. 대왕릉의 석실 앞쪽으로는 길이 21m, 너비 4-6m 규모의 묘도가 조사되었으며, 웅장한 규모의 묘도를 통해 장례가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묘도가 조성되기 전, 석실을 중심으로 봉분의 일정한 범위에서 표시적 성토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사실은 대왕릉의 석실축조 완료 시점과 장례 행위 간에 일정한 시간적 차이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소왕릉 조사결과
봉분의 규모는 직경 13m, 높이 3m 정도로, 대왕릉에 비해 서 작지만, 봉분 끝 주변으로 서쪽 6m, 동쪽 13m 길이 이상의 범위에 성토하여 묘역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전방부(남쪽 일원)는 봉분 성토층이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완만한 경사의 성토부를 조성하고 있다. 성토부가 끝나는 지점에는 장방형의 석재(길이 60~100cm)를 세워 반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석렬을 시설하였다. 봉분의 축조는 대왕릉에서와 마찬가지로 석실을 중심으로 층층이 다져 쌓은 판축기법이 이용되었다.
석실은 봉분의 남쪽에 치우쳐 위치하며,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두고 있다. 석실묘의 구조는 잘 다듬어진 판석을 이용해 뒷 벽과 양쪽 긴 벽을 세웠으며, 그 위로 1매의 고임석을 놓고 2매의 뚜껑 돌로 덮었다. 내부 중앙에는 1매의 화강암제 관대(길이 245cm, 너비 63cm, 높이 20cm)를 놓았다. 짧은 연도를 가지며, 현실과 연도는 각각 1매의 석재를 이용해 이중으로 폐쇄하였다. 전체적인 구조는 대왕릉의 석실과 동일하며, 석재의 가공양상 및 짜임새의 치밀함도 매우 유사하다. 다만, 그 규모가 길이 343cm, 너비 128cm, 높이 178cm로 대왕릉에 비해 작다.
묘도는 봉분의 전방부(남쪽일원)에 형성된 성토부를 수직에 가깝게 절개하여 조성하였는데, 그 규모는 길이 15m, 너비 4~6m, 최대깊이 3m이다. 묘도의 중앙에는 배수로를 길게 시설하였다.
소왕릉 조사에서는 2기의 묘표석이 출토되었다. 1기는 석비 형태로 석실묘 입구 부근, 다른 1기는 석주 형태로 봉분 내에서 확인되었다. 모두 일제강점기 교란 범위 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원래 위치는 알 수 없다. 2기 모두 글씨가 없는 무자비(無字碑)로서 벽사의 의미로 세웠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소왕릉은 대왕릉과 비교하여 봉분, 석실, 묘도 등의 규모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석실의 구조 등 전반적인 양상은 거의 동일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왕릉 내에서는 옥제장구, 금동좌금구, 유문목제, 소소도제완 등이 출토되었고, 소왕릉 내에서는 목관의 본체와 뚜껑을 결합하고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 관식도금교구와 도금투금구가 출토되었다.
익산 쌍릉(무왕릉)의 발굴 유물은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국립익산박물관의 포스팅은 시간 될 때 따로 하겠습니다.
대왕릉 석실 모형과 봉토 설명
대왕릉(무왕릉)의 봉토 쌓기 관련
대왕릉 봉토의 가장 큰 특징이 성벽이나 대형 건물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때 필요한 치밀한 판축기술* 이 쓰였고, 백제 왕릉급 무덤 중에서 유일한 사례라 합니다.
*판축기술: 점토와 모래를 번갈아 가며 단단하게 다진 토층
대왕릉의 나무널 Wooden coffin of the larger tomb of Ssangneung
이 나무널은 1917년에 대왕릉 돌방 안에서 수습한 것입니다. 백제 후기 최고급 나무널로서 공주 무령왕릉 및 부여 능산리고분군 동하총의 나무널과 비교할 만합니다. 나무널의 길이는 255cm, 폭은 76cm, 높이는 65cm 정도입니다. 뚜껑과 상·하·좌·우 측판 및 바닥판으로 구성되었고, 금동제 못과 투금구·좌금구로 이를 결합했습니다. 소재는 일본에서 수입한 고급 금송金松입니다. 한편 2018년 대왕릉 돌방 재조사 때 출토된 102점의 인골은 국립부여 문화재 연구소의 분석에 의하면 50~60대의 노년층으로서 키는 161~170.1cm이며 620~659년에 사망한 남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고칼로리 식사 때문에 노인성 질환을 앓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런 조사 결과는 대왕릉의 주인을 무왕*으로 보는 주장에 힘을 실어줍니다.
*무왕(재위 600∼641).
나무널 장식 Wooden coffin adornments
나무널은 죽은 왕이 휴식하는 공간이자 죽은 왕을 무덤까지 운반하는 들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상장례에 온 타국의 조문사신들에게 나라의 품격을 과시하는 효과도 가졌습니다. 대왕릉의 나무널을 고급 목재와 화려 한 금속공예품으로 만든 이유입니다. 대왕릉 나무널에 부착된 금속공예품은 투금구와 좌금구 그리고 널못입니다. 좌금구에는 축조기법으로 세밀한 무늬를 새겼습니다. 산 모양 투금구는 세련된 감각을 보여 줍니다. 널못은 도금한 청동제 머리와 동제 몸을 접합해 완성했습니다. 또 위치에 따라 길이와 크기를 다르게 조정했습니다. 익산 경영 이전 백제 사비기의 왕들이 잠든 부여 능산리고분군에서도 투금구와 널못(중상총), 나무널의 금속 테두리 장식(동하총) 등을 수습한 바 있습니다.
100년만에 다시 만난 쌍릉
대왕릉의 돌방 Stone chamber of the larger tomb of Ssangneung
대왕릉 봉분 속에 깊숙이 감췄던 돌방이 1,400년 만에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위에서 본 돌방은 긴 직사각형이고 잘라 본 모습은 육각형에 가깝습니다. 바닥에는 나무관을 올린 받침돌이 있습니다. 화강암을 아주 정밀하게 다듬었고 각 부재 연결부에는 빈틈이 없습니다. 돌방의 길이는 400cm, 너비는 175cm, 높이는 225cm 내외입니다. 부여의 왕릉인 동하총(길이 326cm)과 중하총(높이 215cm) 보다 큽니다. 돌방 각 측면의 길이가 대부분 25cm로 나뉘기 때문에 설계자가 남조척(1척=25cm)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방은 크기·기술·짜임새 등 모든 면에서 백제 왕릉의 격을 갖추었습니다.
다시 이 무덤의 주인공은 서동과 선화공주가 맞는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고려사절요』 충숙왕 16년조(1329년)에는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조상 호강왕의 능을 발굴(도굴)하였다....” 라고, 쌍릉의 도굴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시 일제강점기인 1917년 12월에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조사되었다. 조사결과는 13행으로 기술된 약식 보고서와 유리건판사진 및 조사당시 봉분 및 석실의 실측도로만 전해지고 있어서 그 구체적인 조사 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
1917년 12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에서 야쓰이 세이이쓰, 오바 쓰네키치, 오가와 게이키치는 소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발굴 결과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과거 도굴 및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익산쌍릉은 아직도 소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많은 학계의 연구가 필요하다.
사실 무왕릉을 포스팅하면서 많은 자료를 찾았고, 논문 수준의 글을 쓰고 싶었지만, 지면이 길어지는 이유로 많은 부분 미륵사지를 포스팅할 때 다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금제사리봉영기에 백제 무왕의 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발원문이 나오기도 했으나 백제 무왕의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서동, 사택적덕의 딸=선화공주가 성립되어야 하지만, 많은 논란이 따르니...미륵사지 포스팅에서 저의 가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에게 백제 왕릉의 품격을 묻거든 익산 쌍릉을 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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