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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익산 망모당(望慕堂)과 장중마을 마당바위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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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중마을로 운전대를 잡았다. 망모당(望慕堂)에 거의 도착할 즈음 장중마을의 논에 노랗게 익어가는 벼와 하늘이 조화를 이뤄 여느 농촌의 풍경처럼 다가와 사진을 찍어본다.

장중마을 10월의 풍경
장중마을 10월의 풍경

 

10월 노랗게 익은 벼
10월 노랗게 익은 벼

 

망모당 푯말이 보이는 곳 주차장은 약 20여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관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망모당 주차장
망모당 주차장

 

망모당(望慕堂) 푯말
망모당(望慕堂) 푯말

 

망모당 望慕堂
망모당 望慕堂

 

망모당으로 들어가는 길 전시된 사진들
망모당으로 들어가는 길 전시된 사진들

 

망모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동네 할머니들의 글과 왕궁면 사진이 있어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장중마을 마당바위
왕궁면 장중마을
왕궁리오층석탑
망모당 주변

 

 

전시를 준비하는 어머님께 물어보니 마을 음악회가 있다고 하신다. 삐뚤삐뚤한 글씨 액자는 이 마을 할머님들께서 쓰신 글이라고 알려주셨다. 인상이 남았던 몇 개의 글을 사진으로 남겼다.

고마우면 고맙다고 크게 인사하라
꽃화분
전시 화분
행복해지고 싶거든 기쁘다 즐겁다 맛있다 되도록 밝은 표현을 써라

고우면 고맙다고 크게 인사하라! / 행복해지고 싶거든 기쁘다 즐겁다 맛있다 되도록 밝은 표현을 써라!

선택한 우주에서 그대는 빛나는 별이다
~선택한 우주에서 그대는 빛나는 별이다

 

조금 발길을 옮기니 망모당(望慕堂)의 안내판과 비석이 나온다.

망모당의 안내판과 비석
망모당의 안내판과 비석

 

지극한 효심으로 세운 망모당 (Mangmodang Built with Filial Affection)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Jangam Village, Gwangam-ri, Wanggung-myeon, Iksan)표옹 송영구(1556~1620)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왕궁면에서 태어났다. 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잠 못 이루고 있을 때 우연히 허드렛일 하는 아이*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도움을 주었다. 표옹이 선영을 그리워하는 뜻의 망모당(望慕堂)을 짓고 은거할 때 예전에 도움을 받은 주지번이 명나라 사신이 되어 은인을 찾아왔다. 선친이 그리워 세운 망모당에 어려운 이를 긍휼이 여기는 어진 마음과 사제의 의리를 현판으로 남겼으니 인과 예가 효와 신으로 만나 한자리에 모였다. 매년 음력 716일은 망모당의 소쇄일(청소하는 날) 로 진천 송씨 후손들은 망모당에 모여 표옹의 지극한 효심을 기린다. -20215월 익산시장-

 

*아이: 여기에서 표현은 아이지만 청년이라는 표현이 맞아 보인다.[전주 럭셔리크로우]

지극한 효심으로 세운 망모당
지극한 효심으로 세운 망모당

 

충숙공 표옹 송선생 강생 유지비
충숙공 표옹 송선생 강생 유지비

 

지극한 효심으로 세운 망모당의 안내판과 충숙공 표옹 송선생 강생 유지비를 둘러보고 다시 망모당을 향해 걸어갑니다.

망모당 측면 풍경
감나무 앞으로 망모당 입구가 보인다

감나무와 망모당
감나무와 망모당

 

망모당 앞
망모당 앞

 

좌측의 비가 망모당 상량문이다
좌측의 비가 망모당 상량문이다

 

망모당 상량문 육위시 정면
망모당 상량문 육위시 좌측면

 

망모당 상량문 육위시 표옹 송영구 (望慕堂 上樑文 六偉詩 瓢翁 宋英耉)

 

동쪽으로 던지니,

앞들의 봄 농사 해마다 풍년들기 소원하네.

곡식 심는 것이 마침내 밥과 술을 위함이요,

이 집 열고 제사드림이 농사짓는 보람일세.

 

서쪽으로 던지니,

큰키나무 천 쪽의 구름과 가지런히 어우르고

가지들이 춤을 추는데 바람이 노래 않으리오

내 사랑하는 사람아 달도 내려와 품으려 하네.

 

남쪽으로 던지니,

저만치서 울타리 숲은 강남의 녹나무 같아라.

까치와 길조들이 촘촘한 가지에 둥지를 틀며

훈풍에 상서로운 햇빛 깨끗한 남기에 비치네.

 

북쪽으로 뻗치니,

백년의 솔과 노송나무 벽공에 바라다 보이네.

후손은 효행의 보답 받아 장수하고 창성하여

하늘같이 망극한 그 은혜 길이길이 사모하리.

 

위쪽으로 뻗치니,

하늘이 내는 재목은 얼마나 높이 자라나는가,

진세가 멸망하는 노래소리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의 구름 기운은 장대한 용의 형상이로다.

 

아래쪽에 뻗치니,

방은 겨울날에 마땅하고 마루는 여름에 좋아,

언제나 그리운 건 봄날 산야의 아름다움인데,

최상의 어여쁜 건 천봉에 달 뜨는 가을밤일세.

 

망모당 상량문 육위시뒷면에는 망모당 상량문이 있다. 비석에 지면을 이렇게 많이 할애하고 싶지 않았으나 내용도 그렇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내용으로 보여 상량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망모당 상량문-표옹 송영구
망모당 상량문-표옹 송영구

 

望慕堂 上樑文 瓢翁 宋英耉 망모당 상량문  표옹 송영구

 

事亡如存 苟欲善繼善述. 奉先思孝 莫若肯構肯堂 天其祐之 神旣醉止.

돌아가신 분을 살아계신 것처럼 섬기라는 뜻을 잘 이어서 설명하기를 내가 진실로 바라노라.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는 데는 어버이가 먼저 시작하고 자식이 이어가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니 이는 하늘이 그것을 복주고 지신地神도 한껏 즐거워하는 것이리라.

 

唯此江南雄府 紆北盛村 土品膏腴 厥種禾黍菽麥 人物富庶 其民士農工商.

여기 한강漢江 남쪽에 위대한 완부完府에 속한 우주紆州 북쪽에 왕성한 마을이 있으니 땅은 기름져 벼와 조, 콩과 보리를 심고, 인물이 많아 백성은 사농공상에 종사하고 있다.

 

先祖不樂市朝 來此開業 後孫因資衣食 至今承家 庶幾無忝 爾生.

우리 선조는 도시와 벼슬을 즐겨 아니하고 이곳에 와서 생업을 잡았으니 후손은 그 자산으로 인하여 의식衣食을 삼아 지금까지 집안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같이 너희 후생들도 선조에 욕됨이 없기를 바란다.

 

方屬 不肖子某 分憂百里外 念昔先人, 經亂十年餘 修我舊屋.

지금의 불초자 모某는 지방관이 되어 백리 밖에 나가 근무하면서 윗대의 선조들을 생각했고, 십년에 걸친 전란을 겪은 끝에 살아온 우리 옛집을 수리했다.

 

秪自景山揆日 不勞輦糞燔椔 九畝一 東作西成 廬數間足矣.

大夫三 左昭右穆 祭四時必於.

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를 잡은 날로부터 땅을 일구는 힘든 고역이 없이도 구무九畝의 한 땅을 받아 봄에는 가꾸고 가을에 거둬들이며, 초가 서너 칸으로 살아온 것이 족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러니 규례에 따라 대부大夫는 삼대의 조상을 모시고 사철에 제사를 드림이 마땅하도다.

 

旣與梓匠經營 爰及弟兄計慮. 人力閒於農際 量多少而分工.

丘木害於墓庭 擇時日而告伐. 力綿雖同蟻役人衆不難鳩材.

목수와 경영를 수립하고 이에 형제들이 헤아려 계획을 세웠다. 인력을 농한기에 틈을 빌리고 작업량을 따라서 나누어 공사를 맡겼다. 무덤가의 나무를 날을 받아서 베었다. 일이 오래 걸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였고 여럿으로부터 자재와 경비 모으기에도 어렵지는 않았다.

 

方正平圜 但願神保是格 榱題楹桷 適取風雨攸除, 闢園樹而方中 竹苞

松茂處 閭閻而差上柱正樑高.

반듯하고 균형 있게 세웠으니 다만 원하는 바는 이 품격을 신이 보우하여 처마 서까래와 기둥이 비바람을 적절히 취하여 제하기를 바라노라. 정원을 만들어 사방 나무를 심고 대나무 두르고 소나무 무성한 곳에 여염집과는 약간 달리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높이 올리노라.

 

伏願 上樑之後 不騫不崩, 以妥以侑 報爾福祿 俾盡孝思孔明 宜爾室家

庶 致嘉貧式讌.

상량한 뒤에 공손히 기원하기는 이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말기를 바라며, 온당하고 정성들여 너희가 받은 조상의 복록에 보답할 수 있도록 제삿날을 잘 맞추어 지내고, 집안을 화목케 하며, 반가운 손님이 여기 많이 이르러 즐거운 잔치하기를 바라노라.

진천송씨 우산정사 안내도
진천송씨 우산정사 안내도

 

망모당 상량문 비석의 맞은편에 있는 진천송씨 우산정사 관광안내판으로 다음 럭셔리크로우의 여행지다. 우산정사삼정승소나무용솔 등 볼거리가 있고, 진천송씨 충숙공파 우산종중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표옹 송영구 묘소 및 신도비 소재지가 완주군 봉동읍에 있다는 내용
표옹 송영구 묘소 및 신도비 소재지가 완주군 봉동읍에 있다는 내용

 

망모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90호
망모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90호
망모당 Mangmodang Pavilion 望慕堂
망모당 Mangmodang Pavilion 望慕堂

 

망모당 Mangmodang Pavilion 望慕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Jeollabuk-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망모당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조참판을 지낸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1556~1620)가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1605년 집의 후원에 세운 정자이다. 이곳에서 선영을 바라보며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망모당이라 하였다. 편액(건축물의 명칭을 쓴 액자) 글씨는 중국 명나라의 명필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이다. 주지번은 송영구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맺은 인연으로 그를 스승처럼 여겼다.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정자를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글씨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앞면은 주초석의 높이가 1m에 달하나 뒷면은 지반의 기단을 높이고 주춧돌을 낮게 놓았다. 망모당은 건립 연대가 빠르며, 조선 시대, 상류층의 생활문화와 함께 우수한 건축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망모당 대문
망모당 대문

 

대문 앞 정면으로 망모당(望慕堂) 현판이 보인다

정면에 망모당 현판이 보인다
望慕堂

망모당 望慕堂
망모당 望慕堂

 

망모당 望慕堂 현판
망모당 望慕堂 현판

 

망모당 내부
망모당 내부

 

대문 안
대문 안

 

충숙공 표옹 송영구 선생의 영정
충숙공 표옹 송영구 선생의 영정

 

측면의 방에서
측면의 방에서

 

가장 위 편액이 망모당 상량문
가장 위 편액이 망모당 상량문

 

망모당 중수기
망모당 중수기3

 망모당 중수기Ⅲ

충숙공의 긍구긍당(肯構肯堂)의 뜻 이 이 망모당에 가득한데 2006년 6월의 긴 장마로 건물이오래되어 지붕이 붕괴되고 기둥 하나까지 무너졌다. 그 승조상문(崇祖尚門)의 정신을 후손들의 가슴마다 충만케 하려는 우리 종중의 귀한 전통을 또한 이어받아 복구의 노력에 최선을 경주하였다. 지방 문화재인 당을 복원하도록 익산 시청에 여러 번 방문하여 건의하고, 익산시의원 병원(炳元) 호진(鎬珍)등 과 협력하여 1년여 동안 힘을 썼다. 이로서 2007년 4월에 시작하여 만 1년 동안 중수하여 완공하게 되었다. 하늘이 돕고 땅의 신이 기뻐한다는 표옹공의 천기우지 신기취지(天其祐之 神旣醉止)의 의미를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담장 전체를 개량하여 2008년 5월에 완공하고, 뒤뜰 정원도 6월에 넓고 확 트이게 조경공사를 마무리하였다. 모든 공사기간인 2년 동안은 소쇄일(掃灑日) 행사를 부득이 하지 못했으나 2008년에는 다시 기꺼이 재개하였다. 2009년 3월까지는 입구에서 남장까지 하수도공사와 경계석 및 포장공사를 익산시의원 병원 종친의 노력으로 주변 환경을 깨끗이 단장하였다. 이로서 충숙공의 망모(聖慕)의 뜻에 조금이라도 부응한 것 같아 우산종중의 모든 종인들과 함께 후대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이 중수기를 기록한다. -2009년 8월 13대손 재규

망모당 중수기1
망모당의 천장

앞면의 주초석과 하단부
앞면의 주초석과 하단부

 

망모당 우측면
망모당 지붕 뒤로 가을 하늘

망모당 처마끝과 가을 하늘
망모당 처마끝과 가을 하늘

 

망모당 좌측면
망모당 좌측면

 

망모당의 문지방
망모당의 문지방

 

문지방(門地枋)

문지방門地枋은 방과 방의 경계, 혹은 문의 안과 밖의 경계로 먼지나 바람, 벌레나 곤충 등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생긴 건축 구조물이다. 대문은 사람의 얼굴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며, 대문의 문지방은 사람의 얼굴 전체 가운데 턱에 해당하기에 ‘문턱’이라고도 칭한다. [글 출처: 국립민속박물관>한국민속대백과사전]

 

그래서 어렸을 때 문턱에 앉거나 밟을 경우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부모님께 문턱에 앉지 말라고 꾸지람을 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는 문턱이 사람의 머리에 해당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망모당 대문의 형태
망모당 대문의 형태

 

망모당 좌측면과 정원

 

망모당 좌측면 돌담과 대문
망모당 좌측면 돌담

망모당 좌측면
망모당 좌측면

 

망모당 뒷면
망모당 뒷면

 

망모당 뒤뜰
망모당 뒤뜰

 

잠시 좌측 동산으로 올라가기 전 드론을 올려서 사진도 남겨봅니다.

망모당 우측면
망모당 우측면

 

망모당
망모당

 

망모당 뒷 산에서
망모당 뒷 산에서

망모당 전경
망모당 전경

 

망모당 뒷 산에 핀 코스모스
망모당 뒷 산에 핀 코스모스

 

망모당 뒷산에서 내려와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망모당 상량문 비의 우측 글을 남겨봅니다.

망모당 상량문 우측면
망모당 상량문 우측면

 

이 상량문은 1605년 상량식에 표옹공瓢翁 宋英耉(1556-1620) 이 직접 지은 것으로 표옹 유고집에 전해 내려온다. 여기서 선영先塋을 바라다 보면서 효도와 숭조崇祖의 마음으로 사모한다는 뜻을 망모望慕 라 이름하였다. 망모당 편액은 1606년 명明나라 조사詔使로 조선에 왔던 주지번朱之蕃(1555-1624) 한림원 수찬 翰林院 修撰의 친필인데, 충숙공忠肅公이 1593년 성절사 聖節使 서장관으로 당시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 처음 만나 맺었던 인연의 보답으로 주지번朱之蕃이 이곳 왕궁 장암에 직접 내려와 쓰여진 편액이며 지금의 표옹공 瓢翁 宋英耉 유택幽宅도 그때 당시 주지번朱之蕃이 소점所點한 명당지로 알려지고 있다.

장중마을 마당바위
장중마을 마당바위

 

장중마을 마당바위

망모당에서 나와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장중마을 마당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마당바위(場岩장암)말 그대로 이 일대 마을 이름은 장암마을이었는데, 중리마을과 합해져 현재 장중마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장암場岩마을의 이름 유례이기도 합니다. 場岩장암에는 약100명 정도가 앉아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바위로 (場마당장, 岩바위암) 마당바위가 된 것입니다.

장중교에서 찍은 마당바위
장중교에서 찍은 마당바위

 

아래 망모당의 위치를 보면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 명당임이 쉽게 보입니다.

마당바위 위치 (장중교 앞)
마당바위 위치 (장중교 앞)

 

원래 장암(場岩)마을 마당바위 앞으로는 왕궁천이 흐르고 바로 앞에는 현재 장중교가 있다. 지금은 그 바로 옆에 새교량이 만들어지고 있다. 

마당바위 아래로 왕궁천이 흐른다
마당바위 아래로 왕궁천이 흐른다

 

위에서 본 마당바위
위에서 본 마당바위

 

사진 찍기 힘든 곳입니다
사진 찍기 힘든 곳입니다

 

사진을 찍고 내려오며 중앙 하단 부위 정도에서 바위에 난 성혈을 발견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도통 알 수 없었습니다.

근대의 것인지 오래된 것인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확실한건 오랜 역사를 지닌 거대 암반 위에는 성혈이나 문자가 있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아래에서 위로 찍은 사진
아래에서 위로 찍은 사진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찍은 사진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찍은 사진

 

망모당(望慕堂)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1556-1620)의 선영先塋을 바라 보면서 효도와 숭조崇祖의 마음으로 사모한다는 뜻을 망모望慕라 이름하였다. 망모당 상량문에는 표옹공의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는 후손이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집안을 화목케 하며, 반가운 손님이 여기 많이 이르러 즐거운 잔치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망모당(望慕堂)의 편액
망모당(望慕堂)의 편액

 

한편, 망모당(望慕堂)의 편액은 1606년 명明나라 조사詔使로 조선에 왔던 주지번朱之蕃(1555-1624) 한림원 수찬 翰林院 修撰의 친필인데, 충숙공 忠肅公이 1593년 성절사 聖節使 서장관으로 당시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 인연이 있었다.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에서 일을하는 청년이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을 공부하는 것을 알고 숙소의 허드렛일을 하며 어떻게 어려운 남화경을 암송하는지 물었고 과거를 준비하는 청년은 몇 차례 시험에 낙방해 돈이 다 떨어져 일을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사정이 딱한 청년에게 조선의 과거 시험 요령을 알려주며 서책과 돈까지 주게된다. 그 청년이 바로 주지번朱之蕃이었다. 주지번은 2년 후(1595년) 시험에서 장원 급제하게 된다. 이후 주지번朱之蕃은 1606년 중국 황태손 탄생 경사를 알리기 위해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 된다.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초서체로 가로4.66m, 세로 1.79m 크기의 현판이다

 

전라감영에 왔던 주지번은 전주객사全州客舍풍패지관豊沛之館 편액을 써서 전주가 조선의 풍패지향豐沛之鄕임을 입증해 준다. 이후 처음 만나 맺었던 인연의 보답으로 주지번朱之蕃이 왕궁 장암에 직접 와 망모당望慕堂의 편액을 썼다. 지금의 표옹공 瓢翁 宋英耉 유택幽宅도 그때 당시 주지번朱之蕃이 소점所點한 명당지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당시 주지번은 전국을 돌며 몇 개의 편액을 남겼고 대표적으로 서울 성균관대의 명륜당明倫堂, 강릉 경포대의 제일강산第一江山, 괴산 고산정孤山亭의 호산승집湖山勝集 등 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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