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의 푸르름을 따라 친구와 함께 당일코스로 충청 수영성과 예산 가야사지로 떠났었다. 사진은 많지 않지만, 이야깃거리는 충분해 보여 이제서야 포스팅을 남겨본다.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 忠淸水營城
사적 제501호 / Historical Site No. 501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수영은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였으며, 조운선의 보호와 안내 그리고 외적 방어 역할을 하다가 1896년 폐영廢營 되었다.
충청수영성은 1510년 수사 이장생李長生이 돌로 쌓은 성이며, 현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서문을 비롯하여 1,650m가 남아 있다. 북벽과 남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았고, 서벽은 바다와 면한 지점에 쌓았으며, 서벽 앞은 유(U)자 모양의 포구를 이루어 전형적인 조선 시대 수군진水軍鎭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내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중 영보정永保亭은 천하 명승으로 알려져 조선 시대 유명 시인 묵객들이 방문하여 많은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충청수군은 임진왜란 때는 남해 바다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칠천량 해전1597에서는 수사 최호崔湖가 통제사 원균과 연합하여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병자호란1636 때는 수사 강진흔姜晉昕이 강화도 갑곶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등 국가 위기 시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다른 수영성 유적*은 훼손되어 원래의 경관을 잃어 버렸지만 이곳 충청수영성은 지형과 함께 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다. [글 출처: 보령 충청수영성 안내판]
*조선시대 5대 수영: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좌수영, 경상 우수영, 충청수영이 있었다.
보령 충청수영성의 옛날 모습이 궁금해지죠? 우리 선조들이 남긴 1872년 지방지도에서 옛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같이 보시죠!~ 아래 그림은 1872년 지방지도 중 보령부지도 충청수영성 부분입니다.
보령부지도 保寧府地圖,지금의 충남 보령통합시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주교면, 오천면 일대. 충청도 해안 방어 기지인 水營이 있던 지역으로 1871년(고종8)에 水營에 합속되면서 兼府使로 승격되었다. 지도의 상단에는 보령부와 수영에 대한 연혁을 비롯한 몇 가지 지지 항목이 주기되어 있고 各面에는 소속 동리명과 인구수도 기재되었다. 東西南北의 글자로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는 청색의 담채를 사용하여 서로 연결시켜 그렸으며 점을 찍어 수목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하천과 바다는 황색을 사용하여 채색한 점이 독특하다. 伏兵里, 軍入浦, 冠巖, 蟻坪, 高巒山, 王臺山 등과 같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는 특정 지명은 그 지명의 유래를 옆에 주기하여 놓았다. 고을의 남쪽에는 大川市, 북쪽에는 瓮巖浦市 등의 장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노란색의 지붕을 그려 가옥이 밀집해 있음을 나타내었다. 주변 지역의 社倉, 堤堰 등도 상세히 그렸는데 이 지역 자체가 해안 방어와 관련된 요충지의 성격을 지니므로 樓亭, 寺刹 등과 관련된 문화 유적은 드문 편이다. 해안의 섬들은 보령에 속한 땅이 아니라 대부분 洪州와 庇仁의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다. [글, 사진 출처: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보령 충청수영성은 2019년 당시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성에 들어가기 앞서 오천면 종합안내도의 내용도 살펴봅니다.
오천면 종합안내도
오천면은 본토와 16개 유인도와 67개 무인도 그리고 10개 법정리로 구성되며 활력 넘치게 살아가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백제시대 회이포로 불러지던 오천항은 당나라와의 교역의 교두보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고 세곡수송을 맡았던 조운선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충청수영을 세웠는데 서해안의 수군사령부로서 규모가 군선 140여척에 병력이 8,400여명에 달했습니다. 우리나라 5개 수군영 중에서 보존이 제일 잘되어 국가사적 501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복원된 수영성내 영보정은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과 이항복, 송시열 등 세도가들이 아름다움을 극찬하며 찾던 주변 경관이 뛰어난 곳입니다. 또 오천면에는 표상이 된 도미부인의 설화를 품고 있는 도미의 묘지와 도미부인사당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천면은 역사성과 관광소재를 많이 갖추고 있다.
또한 보령8경의 하나인 오천항에는 키조개, 쭈꾸미 등 각종 수산물의 특산지로서 다양한 먹거리도 갖추고 있으며 200여척의 유어선이 연중 낚시객을 맞는 등 연간30여만 명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충청수영에 오는 동안 도미부인 사당을 볼까 했는데, 시간 관계상 그냥 지나와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아쉬움은 다음에 또 올 수 있는 동기가 될 듯합니다.
수영성 문입구의 좌우에는 여닫이 문이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망화문(望華門)터가 있습니다. 아래 내용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 忠淸水營城)
충청남도 기념물 ‘보령 오천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8월 24일 ‘보령 충청수영성’으로 명칭을 바꾸어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2만 5,326㎡.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수영(水營)의 성으로 1510년(중종 5)에 축조하였는데,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을 쌓아 성 안에서 성 밖을 관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성 안에는 영보정(永保亭)·관덕정(觀德亭)·대변루(待變樓)·능허각(凌虛閣)·고소대(姑蘇臺)와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 5개, 문 4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진남문(鎭南門)·만경문(萬頃門)·망화문(望華門)·한사문(漢舍門) 등 4문은 모두 없어지고, 서쪽 망화문터의 아치형 석문(石門)만이 남아 있다. 이 성은 해변의 구릉을 정점으로 쌓은 성이어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보령 충청수영성]
성문을 지나 조금만 올라 가면 보이는 건물입니다. 바로 앞으로는 바닷가도 보입니다.
충청수영 진휼청 忠清水營 賑恤廳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2호
Chungcheongnam-do Cultural Material No. 412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객사客舍와 삼문三門만이 남아 있다.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이 있다. 충청수영 고지도古地圖 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다. [글 출처: 진휼청 안내판]
그럼 조선시대 진휼청(賑恤廳)에 대해 더 알아 보겠습니다.
진휼청 (賑恤廳)
조선시대, 곡물가를 조절하고 재난을 당한 기민(飢民)이나 재민(災民)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
•이칭: 진제청(賑濟廳) / •약칭: 진청(賑廳) / •설치시기: 1511년(중종 6) / •폐지시기: 1894년 / •상급기관: 선혜청(宣惠廳)
진휼청은 조선시대에 곡물가를 조절하고 재난을 당한 기민(飢民)이나 재민(災民)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조선 초기에 재해 발생 시 임시로 설치되었으나 1525년(중종 20)에 광흥창 · 풍저창의 곡물과 여타 관고(官庫)의 잉여 곡물을 모아 진휼청을 설치한 뒤 상평청과 합쳐 흉년에는 진대(賑貸)와 기민구제를 담당하고, 평상시에는 물가 조절 업무를 맡게 하였다. 선혜청(宣惠廳)이 설치되면서 선혜청의 관리 아래 두었다. 17세기 후반에 상설 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으나,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청수영성 길을 따라 진휼청(賑恤廳)을 보고 나면 우측에 멋들어진 정자가 하나 보입니다. 당대에는 꽤 유명한 정자 중 하나로 이름은 영보정永保亭입니다.
영보정 永保亭
영보정永保亭은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李良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며 고쳐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였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 · 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 시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수영이 폐지되면서 없어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보정도永保亭圖가 전해온다.
현재의 영보정은 2015년에 복원된 것이지만, 과거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된 영보정永保亭에 올라 주변 경치도 보고, 안에 있는 현판과 편액도 살펴본다.
天上楼臺畵中江山(천상누대화중강산)이라 쓰인 편액을 본다. 뜻은 '높은 망루에 오르니 그림 같은 강산이 펼쳐진다.'라는 의미로 당시 정자의 위치에서 보는 주변의 풍경이 그림같이 멋진 모습이란 의미로 다가왔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4권 영보정연유기(永保亭宴遊記)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아래에 나오는 내용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의 내용이다.
永保亭宴遊記
世之論湖石亭樓之勝者。必以永保亭爲冠冕。昔余謫海美。嘗有意而未至焉。乙卯秋。始從金井獲登斯亭。豈於亭有分哉。余方以好奇遭貶。然凡天下之物。不奇不能顯。觀乎永保之亭。知其然也。山之在平陸者。非尖削峻截。不能爲名。唯突然入水如島。則雖培塿之隆。亦奇也。水之由江河而達于海勢也。雖泓渟演漾不足稱。唯自海突然入山爲湖。則不待波瀾之興而知其奇也。姑麻之山。西馳數十里。蜿蜒赴海中。如鶴之引頸而飮水。此所謂山之突然入水而如島者也。姑麻之湖。東匯數十里。環以諸山。若龍之矯首而戲珠。此所謂水突然入山而爲湖者也。永保之亭。據是山而臨是水。以之爲一路之冠冤。則曩所謂物不奇不能顯者非邪。時節度使柳公 心源 爲余具酒醴。而太學生申公 宗洙 詩人也。値中秋月夜。汎舟姑麻之湖。轉泊寒山寺下。復有歌者簫者。與登寺樓。令作流商刻羽之音。余遷客也。愀然有望美人天一方之思。竝書此以爲永保亭記。
세상에서 호우(湖右)*의 누정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永保亭)을 으뜸으로 꼽는다. 옛날에 내가 해미(海美)에 귀양갔을 때, 마음은 있었지만 가보지 못했다. 을묘년 가을에 나는 비로소 금정(金井)으로부터 이 정자(亭子)에 오를 수 있었으니, 어찌 정자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때 기이한 것을 좋아함으로 인해 좌천되었었다. 그러나 천하의 사물이 기이하지 않으면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영보정을 보고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산이 육지에 있는 것은 깎아 세운 듯 뾰족하고 잘라 놓은 듯 우뚝하지 않으면 이름이 날 수 없으나, 갑자기 물 가운데로 들어가 섬처럼 되어 있으면 작은 언덕[培塿]처럼 조그맣게 솟아오른 것이라도 기이하게 보인다. 물이 강하(江河)에서부터 바다로 흐르는 것은 부득이한 사세이므로, 비록 깊은 물이 넘실넘실 흘러가더라도 칭찬하기에 부족하나, 갑자기 바다에서 산 속으로 들어가 호수가 되면, 그 물결치는 흥취는 기대할 수 없지만 그것이 기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마산(姑麻山)이 서쪽으로 몇십 리를 내달아 꿈틀거리며 바다 가운데에 다다랐는데, 마치 학(鶴)이 목을 길게 빼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갑자기 물 가운데로 들어가 섬처럼 된 것이요, 고마호(姑麻湖)는 동쪽으로 돌아서 수십 리를 흘러나가는데,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고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물이 갑자기 산 속으로 들어가 호수가 된 것이다.
영보정은 이 산에 의지하고, 이 호수에 임해 있기 때문에 이 지방의 으뜸이 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사물(事物)은 기이하지 않으면 이름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 절도사(節度使) 유공 심원(柳公心源)이 나를 위해 술을 준비했고, 태학생(太學生) 신공 종수(申公宗洙)는 시인인데, 그와 함께 가을 달밤을 맞아 고마호에 배를 띄웠다가 길을 바꾸어 한산사(寒山寺) 아래에 배를 대었다. 여기에는 또 노래하는 사람과 피리 부는 사람이 있어 그들과 더불어 절의 누대에 올라 좋은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나는 귀양온 사람이므로,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저 하늘 한쪽에 계시는 임금[美人]을 우러러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이 마음 또한 여기에 같이 기록하여 영보정기(永保亭記)로 한다.
*호우(湖右)를 찾아보니 국어사전에는 "충청북도를 달리 이르던 말."이라 한다. 조선시대 8도를 생각하면 충청도에 부합한다. 또한 호우수영(湖右水營)이라 해서 전라우수영을 뜻하는 말로도 볼 수 있어 이 또한 내용과 부합된다. 종합적으로 충청도와 수영水營모두 관계가 있으나 문맥상 충청도의 누정이라 생각하는 게 정확해 보인다. [전주 럭셔리크로우]
박은(朴誾)의 영후정자(營後亭子) 7언 율시
땅이 끝나 머나먼 바다 다할 수 없지만 / 地迫未窮千頃海
산이 열려 한 가닥 조수를 받아들이네 / 山開猶納一頭潮
급한 바람이 안개 흩어 물이 거울 같은데 / 急風吹霧水如鏡
물가 근처엔 사람 없고 새들만 노래하네 / 近渚無人禽自謠
객지에서 매양 맑은 경치에 마음 심란하더니 / 客裏每爲淸境惱
먼 변경에서 새삼 고향 땅 멀다는 것 깨닫노라 / 日邊更覺故園遙
애써 시 읊느라 떠나지 못하니 새 시구가 부족한 탓 / 苦吟不去乏新語
석양이 먼 하늘에 잠기는 광경 시름겹게 바라본다네 / 愁見落暉沈遠霄
땅은 푸득푸득 새가 날려고 날개 치는 것 같고 / 地如拍拍將飛翼
누정은 한들한들 매인 데 없는 배 같아라 / 樓似搖搖不繫篷
북녘을 바라보매 구름 덮인 산 어디가 그 끝인가 / 北望雲山欲何極
남쪽에 오니 띠처럼 두른 산천 이곳이 제일이네 / 南來襟帶此爲雄
바다 기운은 안개가 되어 이내 비 뿌리고 / 海氛作霧因成雨
파도 기세는 하늘에 닿아 절로 바람을 일으킨다 / 浪勢翻天自起風
어둠 속에서도 새들이 우짖는 소리 들리는 듯한데 / 暝裏如聞鳥相叫
앉아 있노라니 나도 경계도 비어 있음 깨닫겠노라 / 坐間渾覺境俱空
이안눌(李安訥) 제영보정(題永保亭) 7언 율시
바다 문을 향해 서쪽으로 바라보니 숲과 언덕이 구불구불하게 펼쳐져 있고 / 海門西望林巒紆
그 안에는 만 이랑이나 되는 넓은 맑은 호수가 담겨 있네 / 中涵萬頃之澄湖
하늘 반쯤 솟은 누각이 성터를 압박하고 / 半空樓閣壓城塹
양쪽 기슭에는 깃발이 펄럭이며 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네 / 兩岸旌旗連舳艫
연로한 선비의 벽에 새긴 글귀는 아직도 남아 있지만 / 蓮老壁間記猶在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선비의 시를 짓는 사람은 더 이상 없네 / 翠翁詩後人更無
강산은 나에게도 푸른 눈길을 주고 / 江山爲我亦靑眼
두 스승의 유풍 또한 오늘날에도 외롭지 않네 / 二祖遺風今不孤
*이안눌(李安訥): 조선 인조 때의 문신·시인(1571~1637).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에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하백원河百源 영보정永保亭 7언 율시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의 「해유시화첩」이야기도 보겠습니다.
「해유시화첩」 속 충청수영성과 거북선
「해유시화첩」은 규남 하백원(1781~1844)이 1842년 보령지역 문인 5명과 함께 만든 기행시화첩으로 충청수영성 일대를 돌아보고 느낀 감상을 그림과 시문으로 만들어 엮은 화첩 형식의 책이다. 화첩에는 「영보정」 그림을 비롯하여 「송호」 (현재 보령화력 일원), 「황학루」 (충청수영 맞은편에 있던 정자) 그림과 각각의 풍경에 관한 여섯 사람의 시가 차례로 실려 있다. 특히 영보정도는 충청수영성에 정박 중인 거북선의 모습을 볼 수 있어, 19세기 중반에도 거북선이 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화첩은 총 6권을 제작하였으며, 현재 전남 화순에 있는 규남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규남 하백원의 해유시화첩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규남박물관 소장 사진입니다.
해유시화첩 海遊詩畵帖
해유시화첩은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1781-1844)선생님께서 충남 보령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고, 여러 선비들이 지은 시를 함께 묶은 시화첩이다. 1841년 석성(현재 부여군 석성면) 현감에 제수된 규남선생님은 토호들의 사주와 모함으로 1842년 보령으로 유배 되어 1843년에 석방되었다. 유배지에 머무른 1년 정도의 기간에 보령의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1842년 4월 15일 규남선생님과 경헌 이우명, 평천 이병중, 취죽 조순영, 국은 심사숙, 조일여 등과 배를 타고 송도와 안면도 사이를 지나 황학루, 영보정 등을 유람 하였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면 규남선생님은 그림을 그리셨고 여섯 사람이 각 풍경에 시를 지어 시와 그림을 함께 엮어 화첩을 만들었다. 화첩은 여섯권을 제작하여 각기 가보로 소장하기로 하였다.
현재까지는 규남박물관의 해유시화첩을 제외하고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해유시화첩 속의 내용은 <송호>와 <영보정> <황학루> 그림 3점과, 전서체로 쓰인 <서호기관> 글씨 한 점, 그리고 18편의 시문과 서문, 발문, 기문이 더해진 42쪽의 호접식 시화첩이다.
이 길을 따라 오천교회 아래에 충청수영의 장교청(將校廳)과 내삼문(內三門)이 나온다. 장교청과 내삼문의 사진이 없어진 관계로 문화재청의 공공누리 사진을 사용함을 밝혀드립니다.
충청수영 내삼문(忠淸水營 內三門)*
충청수영은 조선시대 충청수군절도사가 근무하던 관아로, 1896년(건양 1)에 폐영(廢營)되었다. 폐영되기 전, 충청수영의 배치는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지방도 가운데에서 「보령부 지도(保寧府地圖)」를 통해 알 수 있다.
「보령부 지도」에 그려진 충청수영을 살펴보면, 운주헌(運籌軒)이라는 객사와 공해관(拱海館)이라는 동헌이 각각 일곽을 형성하였고 그 뒤쪽에 내아(內衙)가 있었으며 운주헌과 공해관 앞쪽에 각각 삼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운주헌 앞쪽에는 내삼문과 외삼문 두개의 삼문이 있어 지금의 삼문은 ‘내삼문’이라는 이름과 충청수영 동북쪽에 있었다는 위치적 정보를 통해 객사인 운주헌의 내삼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문 가운데 칸에 ‘공해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공해관이 소실된 후 내삼문에 걸어둔 것으로 보인다.
충청수영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다. 장대석 기단 위에 방형초석을 놓고 튼실한 원기둥을 세워 3량가를 구성하였다. 보의 하부에 초각한 보아지를 설치하여 장식하였다. 가운데 칸이 좌우보다 높은 솟을 삼문형식으로, 지붕은 맞배에 기와를 얹었다. 삼문의 중앙에는 문짝을 설치하기 위해서 각기둥을 세우고, 판문을 달았다. 판문 중앙에는 태극문양을 그려 넣고 상부에는 홍살을 설치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210호 충청수영 내삼문
충청수영 장교청(忠淸水營 將校廳)*
◦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 장교청(객사), 내삼문만 남아있음.
◦ 장교청은 1833(순조 33년)에 만들어져 수영의 군간부들이 회의를 하던 장소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오른쪽 끝 한칸에는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세 칸은 넓은 대청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임. [글 출처: 문화재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1호 충청수영 장교청
보령 충청수영성(保寧 忠淸水營城) 내아영역(內衙領域) 발굴조사
관아는 크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생활하던 내아영역과 공무를 수행하는 외아영역(外衙領域)으로 나뉘며, 발굴조사에서 내아시설(內衙施設)과 함께 병고(兵庫), 문루(門樓), 매죽헌(梅竹軒), 객사(客舍): 운주현와 동헌(東軒) 등의 외아시설(外衙施設)이 조사되었다.
현재 확인된 관아영역은 축대를 이용하여 공간을 구성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와 수군절도사가 직접 공무를 수행하던 동헌을 배치하고, 남쪽으로 3단의 대지(垈地)를 조성하여 병고, 종각(鐘閣), 관청, 관덕루(觀德樓), 비장청(裨將廳) 등 관련 건물을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발굴 결과는 조선 후기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타나는 건물 배치와 일치하여 충청수영성을 비롯한 조선시대 관아의 운영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보령 충청수영성은 조선 5대 수군기지 가운데 한 곳으로 1896년(고종33년) 폐영까지 많은 역사에 등장하고 있었다. 현재 충청수영성은 사적 제501호, 충청수영 내삼문은 충남 유형문화재 210호, 충청수영 장교청은 충남 문화재자료 제411호, 충청수영 진휼청은 충남 문화재자료 제412호로 지정되어 보호·보전이 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天上楼臺畵中江山의 현판이 붙은 영보정은 1878년 불에 탔다가 137년 만에 복원(2015년) 되었다. 영보정永保亭의 뜻처럼 영원히 보전되는 우리의 문화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다산시문집 제2권에 나오는 "영보정에 올라" 라는 칠언 율시로 포스팅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전주 럭셔리크로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영보정에 올라 (登永保亭)_ 다산시문집 제2권
저수지라 물가에 성상의 붉은 누각 / 城上朱樓積水邊
주렴 가득 가을빛 쓸쓸하기 그지없네 / 一簾秋色澹蕭然
보름달 낀 조수는 빈 골짝에 달려들고 / 潮携滿月趨空壑
찬 구름 걷힌 섬은 하늘 끝에 떨어졌네 / 島綴寒雲落遠天
이함 살던 옛집에 스님 혼자 머무르고 / 李菡舊居僧獨住
박은이 남긴 명시구 기생 또한 전하누나 / 朴誾佳句妓猶傳
안개 수면 만릿길 어디로 장차 가려나 / 煙波萬里將何適
물가의 모래밭에 장사배를 구경하네 / 閒看沙汀估客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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