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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부여 백마강의 나루터 및 수북정(水北亭), 자온대(엿바위), 낙화암(落花巖)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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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의 푸르름을 따라 친구와 함께 당일코스로 익산(숭림사)를 시작으로 충남 강경(옥녀봉), 논산(견훤왕릉), 부여(가림성_성흥산성, 궁남지, 낙화암, 수북정)로 떠났었다. 어찌 보면 미루고 미뤄왔던 포스팅이다.

부여 수북정, 자온대(엿바위), 나루터, 낙화암의 위치
부여 수북정, 자온대(엿바위), 나루터, 낙화암의 위치

 

충청남도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錦江)백마강(白馬江)이라 한다.

백마강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 범바위(虎岩;호암)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185.5m) 부근까지 약16㎞ 구간을 말한다. 또 다른 이칭으로 사하(泗河), 백강(白江)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늘 전주 럭셔리크로우가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하는 곳은 백제의 역사를 긴 세월 함께 한 백마강 주변의 수북정(水北亭)규암 엿바위(자온대), 낙화암이다. 부여와 백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수북정(水北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수북정(水北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수북정(水北亭)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
수북정(水北亭)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
수북정 안내판

 

수북정(水北亭)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수북정부여 팔경의 하나로 백마강변의 자온대*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수북정(水北亭)의 현판
수북정(水北亭)의 현판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1557~1623)이 이곳에 와 살면서 지은 정자로 김흥국의 호를 따서 ‘수북정’ 이라 하였다. 백마강변의 약간 솟은 언덕에 있어 주변 경관이 트여 구드래 일원(명승 제63호)이 한눈에 들어와 시원한 느낌이 든다.

수북정(水北亭)의 내부
수북정(水北亭)의 내부

 

건물의 특징으로 기둥 배치가 외부 기둥과 내부 기둥을 가로줄에 맞추지 않았고, 내부는 별도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 모습이다. 천정도 가운데 기둥 부분의 서까래를 감춘 우물천정이고, 주변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았고,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 자온대: 백제 시대 왕이 백마강을 오가며 잠시 머물렀던 바위로 왕이 머물 때마다 스스로 따뜻해졌다고 하여 ‘구들돌’, ‘자온대’ 등으로 불리며, 암벽에는 송시열이 ‘자온대’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수북정 앞 규암나루터와 규암 엿바위 마을
수북정 앞 규암나루터와 규암 엿바위 마을

 

전통과 문화가 흐르는 규암 엿바위 마을

규암 엿바위 마을(규암리)은 탁월한 자연경관과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장소이다. 마을에는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백마강규암나루가 있고, 백제의 왕과 관련된 전설을 품고 있는 자온대(自溫臺, 속칭 엿바위)와 조선시대 건립된 정인 수북정(水北亭, 충남문화재자료 제100호)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수북정과 규암나루는 1920년에 지정된 신(新) 부여팔경수북정청람(水北亭晴嵐: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아지랑이)규암진귀범(窺岩津歸帆:규암나루로 들어오는 돛단배)이 포함되어 당시에도 빼어난 경관이었음을 알주 있다. 규암리가 엿바위 마을 이라 불리게 된 유래는 마을을 상징하는 ‘자온대’ 의 모습이 흡사 누군가를 몰래 엿보는 것처럼 머리만 조금 내밀었다 하여 엿바위(규암 : 엿볼窺 바위岩)라 하였으며,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침공 당시에 초병이 자온대에 숨어 사비성을 엿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규암 엿바위 마을은 마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자온대가 품고 있는 역사적인 이야기와 관련성이 깊은 곳이다. 규암 바위 마을 에서는 매년 정월에 자온당산 산신제 · 용왕제 및 거리제가 행해지고 있으며, 과거 대표 민속행사로 행해지던 관등놀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규암 엿바위 불놀이’ 라는 주민주도형 축제를 개최하는 등 마을의 정체성과 문화유산에 깃든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규암 엿바위 마을의 흥망성쇠
규암 엿바위 마을의 흥망성쇠

 

규암 엿바위 마을의 흥망성쇠(興亡盛衰)

규암지역은 규암나루를 중심으로 과거부터 상업활동이 활발했던 장소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강경, 군산 등으로 보내기 위해 곡물 등이 유입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36년 규암장이 개장되었으며 인근지역의 홍산장과 은산장, 그리고 강경포구를 잇는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당시 약 200호가 넘는 대촌을 형성하였으며, 부여지역의 경제활동 중심지로 큰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교육·상업·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마을 내에 우체국, 면사무소, 주재소를 비롯하여 소학교·보통학교·야학교, 교회 등 주요시설이 개설되었다. 또한 넓은 백마강을 건널 수 있는 규암나루가 있어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로 기능하였으며, 이로 인해 규암시장은 단기간에 부여읍 시장의 규모를 뛰어 넘는 대규모 장시로 성장하였다.

규암지역의 규암나루, 수북정, 자온대의 위치
규암지역의 규암나루, 수북정, 자온대의 위치

 

해방이후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1968년 백제교가 준공됨에 따라 규암나루의 주요 기능이 상실되자 지역 경제의 침체로 인해 주변지역이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오늘날 규암리는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이 집중되어 있는 규암면 소재지로 여전히 지역의 중심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규암나루는 유람선 선착장으로서 과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근현대기에 번성했던 마을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건물들이 남아 있어 당시 번성했던 마을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제교 서남단에 위치한 수북정(水北亭)
백제교 서남단에 위치한 수북정(水北亭)

 

낙화암 주변의 주요 위치
낙화암 주변의 주요 위치

▪낙화암(落花巖)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의자왕과 관련된 바위로 타사암(墮死巖)이라고도 한다.

 

▪백화정(百花亭)

낙화암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 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 북쪽, 낙화암 옆, 백마강변에 있는 절이다.

부소산성(扶蘇山城)길 이용안내
부소산성(扶蘇山城)길 이용안내

▪ 부소산성(扶蘇山城)

삼국~조선시대에 축조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는 산성으로 사비 도성이 한눈에 조망되는 군사적 중요 거점이다.

낙화암(落花巖)

부여 구두래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백마강 강역 · 조룡대 · 부산성 관련 유적일원. 사적 · 명승.

1984년 12월 6일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나 2009년 12월 9일 명승 부여구드래일원으로 재지정되었다. 지정면적 2,980만 175㎡. 이 지정구역 내에는 부소산(扶蘇山)에 접한 백마강 강역조룡대(釣龍臺) · 부산성(浮山城) · 나성(羅城) · 대재각(大哉閣) · 수북정(水北亭) · 자온대(自溫臺) · 왕흥사지(王興寺址) 등이 있다.

낙화암과 고란사선착장
부소산의 낙화암과 고란사선착장

내용

구두래부소산 서쪽 백마강나루터를 가리켜 부르는 지명이다. 백마강은 『삼국사기』에 사비하(泗沘河) 또는 백강(白江)이라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사자하(泗泚河)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금강이 부여읍을 우회해 흐르는 구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사자(泗泚)는 사비(泗沘)의 오기로 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현조에 보면, “백마강이란 소정방(蘇定方)이 백강에서 말을 미끼로 용을 낚은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산천조(山川條)에는 “고성진(古省津)은 바로 사자하(泗泚河)인데 부소산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사자하는 사비하를 말하는 것이다.

낙화암(落花巖) 앞을 흐르는 백마강
낙화암(落花巖) 앞을 흐르는 백마강

『삼국유사』에 보면 부여의 지명이 고려 때는 고성진(古省津)이기도 하였다. 이 고성진이 구두래이다. 구두래나루터는 백제 도성의 포구로서 중국이나 일본의 배가 드나들던 곳이다. 백제 왕도의 포구이름이 구두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왕도의 포구이름이 구두래
백제 왕도의 포구이름이 구두래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왕이 배를 타고 왕흥사에 예불하러 갈 때에는 먼저 사비수 언덕에 있는 십여 인이 앉을 수 있는 바위에 앉아 부처를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그 때 왕이 앉았던 반석이 구들처럼 저절로 따뜻해져 돌석(突石)이라고 하였다. 이 구들돌구두래의 어원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구다라’로 부른다. 이는 백제를 내왕한 일본의 배들이 백제 왕도의 포구이름을 국명으로 불렀던 것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구두래 일원은 백제 고도 부여의 가장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백제 때는 제왕들이 뱃놀이를 하고 잔치를 벌여 춤추고 노래하던 유연(遊宴)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 신선이 노닌다는 부산(浮山), 왕이 부처를 망배하던 자온대 등의 유적이 백마강과 부소산의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백제 고도의 역사적 명승을 이루고 있다. [글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드래나루터 앞을 지나는 유람선
구드래나루터 앞을 지나는 유람선

 

백마강(白馬江)을 지나는 유람선의 강 건너에는 왕흥사지(王興寺址)가 있다.

슬픈 전설을 가진 낙화암(落花巖)
슬픈 전설을 가진 낙화암(落花巖)

 

슬픈 전설을 가진 낙화암(落花巖)

의자왕(義慈王 599년~660년)으로부터 출정을 명령받은 계백장군이 집에 돌아가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출정하였다고 한다.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5천 결사대로 황산(黃山)벌*에서 신라의 5만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현재 부여 궁남지 동쪽에는 계백장군 휘하 백제 5천 결사대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이 있다.

*황산(黃山):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지역, 가족을 죽이고 5천의 결사대와 함께 출정한 계백은 황산벌판에서 5만의 신라군을 맞아 4번이나 물리치며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궁남지에 있는 백제 오천 결사대 충혼탑**
궁남지에 있는 백제 오천 결사대 충혼탑**

백제(百濟)의 멸망 앞에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적군에게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부소산 절벽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白馬江)의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훗날 전설이 된 이야기로 이 바위를 낙화암(落花巖)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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