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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충남 예산 가야사지, 남연군 묘, 남은들상여, 상가리 미륵불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3.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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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의 푸르름을 따라 친구와 함께 당일코스로 충청 수영성과 예산 가야사지로 떠났었다. 사진은 많지 않지만, 이야깃거리는 충분해 보여 이제서야 포스팅을 남겨본다.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 忠淸水營城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 忠淸水營城

 

2023년 4월에서야 포스팅에 올라갔던 "보령 충성수영성과 고문헌을 통해 본 영보정(永保亭)" 그리고 올리지 못했던 가야사지, 남연군 묘, 남은들상여, 상가리 미륵불을 오늘에서야 올려봅니다.

영보정 永保亭
영보정 永保亭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가야산(伽倻山, 678m)에 "가야사지, 남연군 묘, 남은들상여, 상가리 미륵불" 이 모여있다.

예산 가야사지-남은들상여-남연군묘-상가리미륵불 위치
예산 가야사지-남은들상여-남연군묘-상가리미륵불 위치

 

가야사지 건물터
가야사지 건물터

 

예산 가야사지 7차 발굴조사
▪조사위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107-27번지 일원
▪사업시행자: 예산군  ▪조사기관 : (재)누리고고학연구소
▪조사목적
-예산군에서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묘와 함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 예산 가야사지의 문화유산으로서의 유존가치를 확인하고, 향후 문화재 개발과 보수 및 정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연차적인 학술 발굴조사를 진행 중에 있음.
-이번 7차 발굴조사는 2013년 실시한 2차 발굴조사의 남동쪽에 연접하여 위치한 지역으로 조사를 통해 사역 범위 확인 및 향후 복원·정비에 대한 자료 확보를 위함. [누리고고학연구소]

예산 가야사지 7차 발굴조사
예산 가야사지 7차 발굴조사

 

가야사지 추정불전지_Site of Buddha Hall of Gayasa Temple Site(Presumed)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차례 진행된 가야사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8동의 건물지建物址가 확인되었다. 추정 불전지는 장방형의 평면구조를 가지며 조사된 건물 중 완전한 형태를 띠고 있다. 건물지의 내부에서 확인된 불단시설에서는 소형의 청동불두靑銅佛頭 1점과 소조나발塑造螺髮이 다량으로 확인되어 건물의 성격을 가야사지의 불전지로 추정 하고 있다. 추정불전지는 규모 18.2m × 14.2m의 대형 건물지에 속하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직심直心 및 초석礎石을 기준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 구조를 보인다.
추정불전지 동쪽으로는 3동의 건물이 이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군의 중앙에는 중정中庭이 배치되며, 불전지로 향하는 답도踏道가 조성되어 있다.
※문화재간판에서 정면으로 추정 불전지가 위치하여 있음.

가야사지 추정불전지
가야사지 추정불전지

 

가야사지 건물터
가야사지 건물터

 
예산 가야사지 문화재발굴조사 현황 (禮山 伽倻寺址 文化財發掘調査 現況)
Status of Excavation Survey of Gayasa Temple Site, Yesan
가야사지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하며, 고려시대부터 존속해 있다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이장하면서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청남도에서는 유적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가야사지(충청남도 기념물 재 150호), 남연군묘(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예산군에서는 가야사지의 보수 및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2014년 까지 총 3차례의 문화재 발굴조사결과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석조불상 8점, 청동불두 1점, ‘가량갑(사)加良岬(寺)’ 명 명문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사지에 대한 건물배치 및 사명寺名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3차 발굴조사를 통해 남연군묘의 제각시설이 확인되었다. 제각祭閣은 가야사지를 일부 파괴하고 조성되어 남연군묘 이장에 대한 기록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예산 가야사지 문화재발굴조사 현황
예산 가야사지 문화재발굴조사 현황

 

위 사진의 푯말이 있는 정면이 남연군묘 제각과 언덕 위가 남연군묘이다.

남연군묘 제각
남연군묘 제각

 

남연군묘 제각 南延君墓 祭閣 | Site of the Shrine for Tomb of Prince Namyeon
제각은 남연군묘의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건물로 1960년대까지 명맥을 이어오다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제각은 가야사지 3차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유적으로, 제각의 기초는 장방형의 통기초시설이 확인되었고, 주변으로 담장을 둘러 제각을 보호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제각의 방향은 가야사지伽倻寺址의 건물 방향과는 다르게 지어졌는데, 가야산伽倻山의 석문봉石門峰과 남연군묘가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지세와 일치하도록 묘의 방향과 제각의 위치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간판에서 정면으로 제각시설이 위치하여 있음

예산 가야사지 전경
예산 가야사지 전경

 

영화 <명당> 에서 나왔던 "두 명의 왕이 나올 천하명당" 의 존재를 가지고 나라를 지배하려는 세력들의 이야기가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풍수지리에서는 2대 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 한다. 영화 속의 2대 천자지지의 자리는 가야사였다. 현재 가야사터에 남연군의 묘가 위치한다.

영화 &lt;명당&gt;2대 천자지지
영화 '명당' 2대 천자지지
불타는 가야사
불타는 가야사

 

남연군의 묘 / 南延君墓 / Tomb of Prince Namyeongun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 Chungcheongnam-do Monument No. 80
남연군의 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것을 184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구?~1822는 인조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 에게 입양되어 남연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은신군이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서 죽자 왕족이면서도 불우한 삶을 보냈다. 아들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이하응이 아버지의 묫자리를 찾던 중 가야산에는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자리’가 있고,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야산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어 대원군은 절을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옮겼다. 훗날 대원군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고종高宗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쳤지만 관은 건드리지 못한 채 돌아간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남연군의 묘
남연군의 묘

 

특이하게도 주변에 넓은 암반이 형성된 곳에 묘가 있어 의아했다. 결과적으로 고종과 순종이 왕이 되었으니...인정?
남연군 분묘 앞 중앙에 장명등이 보인다. 장명등(長明燈)을 일명 석등룡(石燈龍) 혹은 석등(石燈)이라고도 한다. 좌측 우측 양쪽으로 8각형의 기단이 멋지게 조각된 망주석(望柱石)이 보이는데, 이는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으로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그리고 동자석, 무인석, 문인석은 보이지 않고 석양이 옆에 위치한다.

남연군의 묘 설명문
남연군의 묘 설명문

 
석양(石羊): 양은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석전대제)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희생 제물이었는데, 우리나라 무덤에 동물 조각상을 세우는 전통은 남북국시대(698~926C.E.)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양(石羊)
석양(石羊)

 
가야산(伽倻山, 678m)의 정상 가야봉(철탑)이 보이는 남연군 묘

가야봉(철탑)이 보이는 남연군 묘
남연군의 묘에서 가야산의 정상이 보인다

 

남은들상여 | Nameundeul Bier
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_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No.31
대원군(大院君)이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옮긴 후,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하사 했다고 전하는 궁중식 상여이다. 장강(長杠) 위에 구름 차일(遮日)을 친 용봉(龍鳳) 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 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노랑, 흰색 천으로 되어 근엄하면서도 호화롭다.


대원군은 종실(宗室) 중흥이라는 큰 뜻을 품고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덕산 가야산(伽倻山)으로 옮겼다. 시신(屍身)을 넣은 관(棺)을 운반 하는데에는 500리 길을 따라 한 지방을 통과할 때마다 그 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각 구간을 연결하여 모셔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매우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고, 이후로 마을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라고 불러졌다고 한다.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보관중에 있으며, 이곳 상여 보호각에 전시된 복제품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2012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비를 지원 받아 국립고궁박물관 진품 실측과 정밀 실측 보고서를 근거로 상여는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전흥수 대목장이, 유소[매듭]는 무형문화재 32호 배순화 매듭장이 제작하여 보호각에 전시하고 있다.
*마을: 남은들마을

남은들상여 보호각
남은들상여 보호각

 

남은들상여 설명문
남은들상여 설명문

 
창살과 유리로 막혀있는 보호각 안의 상여를 찍기가 너무 어려웠다. 빛 반사와 각도 모두...어렵게 1장을 남겨 왔다. 다시 공부한 남은들상여에 대해 알아본다.

보호각 안의 궁중식 상여(복제품)
보호각 안의 궁중식 상여(복제품)

 
남은들상여 (─喪輿)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 내려온 상여.
1974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상여를 보존해 온 마을의 이름을 따서 남은들상여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상여는 조선 고종의 할아버지이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묘소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동으로 옮길 때 쓰여졌던 것이라고 한다.
 
남연군은 1822년(순조 22)에 죽었는데, 초장지(初葬地)는 경기도 광주시 분원리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어떻게 초장을 하고 이장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 전해 오는 말로는 현재 남연군의 묘소가 있던 터는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터가 천하의 명당이라는 지관의 풍수설에 의하여 흥선대원군이 몰래 불을 놓아 태우고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남은들상여 [사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남은들상여 [사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그리고 이장을 하고 난 그 이듬해 둘째아들인 이재황(李載晃)을 낳았으며, 이 묘의 지덕(地德)으로 나중에 고종으로 등극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이전에 이장하였으리라고 보이며, 이 상여 또한 그 이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자료의 하나로, 고종은 즉위 이듬해인 1865년 남연군묘소에서 동쪽으로 2㎞ 정도 떨어져 다시 세워진 가야사를 보덕사(報德寺)라고 명명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남연군의 묘비에는 1865년으로 건립연대가 음각되어 있어, 고종의 즉위와 남연군에 대한 인식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남은들상여와 남연군에 얽힌 유래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상여의 구조는 기본틀인 장강채의 앞뒤 양끝 아래쪽으로 쇠고리를 달아 횡강채를 끼우도록 되어 있고, 중간에 소방상(小方狀:현지에서는 연초라고 부르고 있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장강에 세운 기둥 위에 배방목(排方木)을 끼우고, 그 위에 판첨(板簷:현지에서는 윗난간이라고 부르고 있다)을 올린다. 이 판첨은 상첨과 하첨으로 나뉘어 이어져 있는데, 유소를 단 ‘봉못’을 좌우에 4개, 앞뒤에 2개씩 끼워 배방목에 고정시켰다.

남은들상여 [사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남은들상여 [사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그리고 판첨 네 귀에는 유소를 단 봉수(鳳首)를 꽂았다. 판첨 아래로는 네 면에 검은 천으로 된 벽적(辟積:빈 곳을 가리는 데 쓰이는 천)을 둘러 소방상을 감싸고, 바로 판첨 아래에 붉은 비단띠에 노란 비단폭으로 만든 진용(振容:깃발 모양으로 작게 만들어 상여에 달아 흔들릴 때마다 펄럭이게 한 장식품)을 내려 드리웠다.
판첨 위에는 지붕과 같이 둥글게 만들고 앞뒤판에 용각을 새긴 만충연(彎衝緣)을 배방목에 달고, 겉에는 검은 천으로 씌운 별갑(鼈甲)을 설치한다. 그리고 그 위에 ‘용마루와 꼭두각시’라고 부르는 정자(頂子)를 중앙에 꽂은 용머리와 몸채를 새긴 연용(緣桶)을 올린다. 또한 소방상의 앞뒤에 네 개의 앙장채를 펴서 앙장(仰張)을 쳤으며, 네 개의 앙장채는 끈으로 장강채에 묶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였다.
 
장강채의 길이는 596㎝, 판첨의 길이는 196㎝, 너비는 76㎝, 높이는 16.5㎝이며, 별갑의 만충연의 길이는 69㎝, 너비는 52.5㎝, 높이는 35. 3㎝이고, 연용의 길이는 85㎝, 높이는 26.5㎝이며, 꼭두각시의 높이는 25㎝이며, 앙장의 크기는 284×185㎝이다.
 
전체 구조는 장강·소방상·별갑·판첨·앙장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어 왕가(王家)의 대여(大轝)와 비슷한 격식으로 되어 있으나, 소방상 밖의 주위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이러한 구조나 또는 그 부속품들의 조각수법과 4㎝ 두께의 목재를 사용한 점, 그리고 그 겉에 입힌 단청의 질이나 수법이 매우 뛰어난 점 등으로 보아, 왕가에 버금갈만한 가문에서 제작한 것이라 짐작된다.  [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상가리 미륵불 가는 길
상가리 미륵블 설명문

 

상가리 미륵불 | 上伽里 彌勒佛 | Mireukbul in sangga ri

문화재자료 제182호_Cultural Properly Material No. 182

남연군묘南延君墓에서 동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에 북향하고 있는 불상이다.

가야사伽倻寺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대원군大院君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묘를 쓰자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는 설도 있고, 북쪽 계곡으로부터 쳐들어오는 병마를 물리치기 위해 북향하고 있다는 설도 전해진다.

상가리 미륵불
상가리 미륵불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도관의 중앙에 화불 化佛이 장식된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임을 알 수 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고 눈은 반쯤 뜨고 있다. 코는 보수한 흔적이 있는데, 미륵불의 코를 떼어가면 아기를 못 갖는 아낙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코를 떼어갔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법의法衣는 왼쪽만 걸친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선線으로 새겼다. 미륵불은 투박하고 거칠게 조성된 듯하나 나름대로 볼륨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양팔을 몸에 붙인 채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배에 붙이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을 고려시대에 충청지방에서 널리 유행한 것이다.

상가리 미륵불_고려시대
상가리 미륵불_고려시대

 

영화 속에 나온 가야사지를 생각하고 여행을 떠났지만, 막상 가야사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지 않는 평범한 땅. 아니 오히려...크고 넓은 암맥이 있는 남연군묘가 위치한 곳이었다. 남연군묘와 관련하여 남은들상여가 바로 옆에 있었고, 직선거리 북쪽으로 150m 지점에 상가리 미륵불까지 모두 남연군묘와 관련된 이야기로 연결된 곳이라 둘러보기 좋았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풍수(風水)는 비보풍수가 맞는 것 같다. 바람과 물이 어디 머물러 있던가? 사랑도 움직이듯...ㅎ 생기가 흩어지고 머무는 현상에서 시작해 음양오행과 땅에 이치, 나아가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풍수지리는 자연환경이 세월에 따라 바뀌듯 시간이 지나면 바뀐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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