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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박물관(백제역사유적지구)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4.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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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의 푸르름을 따라 친구와 함께 당일코스로 익산(숭림사)를 시작으로 충남 강경(옥녀봉), 논산(견훤왕릉), 부여(가림성_성흥산성, 궁남지, 낙화암, 수북정)로 떠났었다. 어찌 보면 미루고 미뤄왔던 포스팅이다. 그리고 다시 가족과 함께 비슷한 코스로 부여 여행을 떠났다. 가족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UNESCO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정림사지박물관으로 오늘 포스팅 주제이다.

UNESCO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
UNESCO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

 

부여 정림사지_2022.05.07
부여 정림사지_2022.05.07

 

부여읍세부지도
부여읍세부지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서쪽방향)
정림사지 안내판
정림사지 定林寺址
정림사지 定林寺址

정림사지 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림사지 주요 위치도
정림사지 주요 위치도

Jeongnimsa Temple Site

▪Historic Site No. 301

Jeongnimsa Temple Site is a representative temple remain of Backje kingdom. It was located in the center of Sabi capital of Baekje(538~660) when the Baekje Kingdom moved its capital from Ungjin (now Gongju) to Sabi (now Buyeo). This temple site shows a typical layout of Baekje temple which a central gate, a stone pagoda, a prayer hall, a lecture hall were placed on a north-south axis and surrounded by linking corridors. Platforms of buildings were constructed by piling roof tiles. The tiled platform has a unique structure that was used for temple construction in Baekje. This characteristics had an influence on temples of ancient Japan.

정림사지의 주요 명칭
정림사지의 주요 명칭

 

정림사지 定林寺址_사적 제301호
정림사지 定林寺址_사적 제301호

정림사지(定林寺址)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한 가운데 위치한 백제의 가장 중요한 사찰이다. 중문과 탑, 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동서 회랑 및 건물지, 승방지 등이 확인되었다. 중심 사역의 규모는 동서 약 62m, 남북 약 120m이다. 발굴 결과 민무늬토기를 포함한 청동기시대 문화층, 정림사 창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삼국시대(백제) 문화층, 고려시대 문화층 등이 드러났다. 사찰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공방 시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사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Jeongnimsa Temple Site

Located at the center of the Sabi capital, Jeongnimsa was the most important temple in ancient Baekje. The middle gate, stone pagoda, prayer hall and lecture hall sites are all aligned in the north-south direction. In addition, sites for east and west corridor buildings, monks' dormitories and other buildings were also discovered. The main area of the temple is some 62m long in the east-west direction and 120m long in the north-south direction. Archaeological surveys have discovered the Bronze Age culture layer, where plain pottery was discovered; the Three Kingdoms Period culture layer (associated with Baekje), which can be subdivided into pre- and post-temple construction layers; and the Goryeo culture layer. There used to be workshop facilities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temple ryeo period.

정림사지 연지는 동.서로 구분된다
정림사지 연지는 동.서로 구분된다

연지(蓮池): 1984년 발굴조사 당시 지면에서 4m가 넘는 지하에서 탄화된 연꽃의 줄기와 잎 등이 발굴되어 연지가 확인되었다.  동측 연지 15.3m, 남북 11m / 서측 연지 11.2m, 남북 11m

 

정림사지 회랑지
정림사지 박물관 방향 뷰

회랑지(回廊址): 폭이 좁은 긴 통로 또는 복도를 뜻한다.

위 사진은 중문지에서 박물관 방향을 찍은 사진으로 앞에 보이는 건물지는 모두 회랑지이다.

 

중문지(中門址)
중문지(中門址)

중문지(中門址) Middle Gate Site

중문지는 석탑 기단에서 남쪽으로 약 14m 거리에 있다. 초석을 받치던 적심석(積心石) 8개가 동서 2열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정면 길이는 11.3m, 측면 너비는 5.3m이다. 고려시대 중문지의 기단은 바깥 부분을 깬돌(割石;할석)로 쌓아 마감한 석축기단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_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_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국보 제9호  (백제시대 / 높이 8.8m)

Buyeo Jeonglimsaji Five Storied Stone Pagoda

이 석탑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 세운 것으로, 백제 석탑의 시원 양식을 잘 보여준다. 탑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기둥이나 탑신석과 넓은 지붕돌을 따로 가공해서 조립한 것은 이 탑이 목조건축을 모방했음을 알려준다. 균형 잡힌 형태와 비례,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한다. 1층 탑신석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자신의 공적을 과시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_국보 제9호_백제시대_높이 8.8m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_국보 제9호_백제시대_높이 8.8m

 

건물 앞 잔디 부분이 금당지(金堂址)
건물 앞 잔디 부분이 금당지(金堂址)

금당지 金堂址 Prayer Hall Site

금당지는 석탑기단에서 북쪽으로 약15m 거리에 있다. 금당지의 하층기단에 적심석이 남아 있는데 북편 7개, 남편 6개, 서편 4개, 동편 7개, 건물 내부에 1개소이다. 적심석의 배치로 보아 건물은 (퇴칸을 포함) 정면 7칸, 측면 6칸으로 정면 18.7m, 측면 13.8m 크기이다.

 

부여 정림사지 강당지(講堂址)
부여 정림사지 강당지(講堂址)
강당지 설명문
강당지 설명문

강당지(講堂址) Lecture Hall Site

강당지는 경전을 연구하고 교육하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정면 39.1m, 측면 16.3m의 긴 사각형 평면의 건물이다. 고려시대의 강당지는 정면 31.8m, 측면 17.9m로 백제 때 보다 작아졌다. 백제 강당지의 기단은 여러 장의 기와를 비스듬히 맞대어 쌓아 만든 합장식 와적기단과 평평하게 쌓은 평적식 와적기단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강당지에는 고려시대 석불좌상의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설명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설명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108호 / 고려시대 높이 5.6m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으로 화재로 인해 심하게 마모되어 형체만 남아 있고,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좁은 어깨와 가슴에 올린 두 손의 표현으로 미루어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단정하고 균형감 있는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_보물 제108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_보물 제108호

 

강당지 좌측의 서편건물지
강당지 좌측의 서편건물지

서편건물지 설명문
서편건물지 설명문

서편건물지(西便建物址) Westside Building Site

서편건물지는 강당지로부터 약 1m 서쪽에 떨어져 있다. 강당지 동쪽에는 이 건물지와 대칭을 이루는 동편건물지가 남아 있는데, 남북 39.3m, 동서 12.1m 크기였다. 조사 당시 백제나 고려시대의 퇴적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였지만 부분적으로 기와열이 확인되었다.

 

북승방지 설명문
북승방지 설명문

북승방지(北僧房址) North Living Quarter

북승방지는 강당지 북쪽 기단에서 약 7m 지점에 위치한다. 적갈색사질토와 황갈색 사질 점토를 번갈아 다져 올린 성토층 위에 와적기단을 만들었다. 기단 내부에는 기둥을 놓았던 적심토가 남아 있고, 기단 동북쪽 모서리에는 계단 흔적이 확인되었다.

 

동편건물지 설명문
동편건물지 설명문

동편건물지(東便建物址) East Building Site

동편건물지는 강당지와 약 1.2m, 북쪽에 있는 북승방지와 4m 정도 떨어져 있다.건물의 남쪽 끝은 동회랑지와 연결되며, 평면 규모는 정면(남북) 39.3m,측면 (동서) 12.1m로 강당지 규모와 비슷하다. 기단부는 기와를 평평하게 쌓아 올린 와적기단으로 구축되었다.

 

Jeongnimsa Temple Site
Jeongnimsa Temple Site
부여 정림사지
부여 정림사지

 

UNESCO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
UNESCO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JEONGNIMSAJI MUSEUM
정림사지박물관 JEONGNIMSAJI MUSEUM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리었다.

역사를 조명한 명문 기와
역사를 조명한 명문 기와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

 

역사를 조명한 명문 기와

일제 강점기인 1942년 발굴조사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大藏當草)’라고 쓰인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리었음이 밝혀졌다. 그 이후로 이 절터는 정림사지로,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 기와에는 ‘대평(大平)’이라 새겨져 있다.

대평은 요나라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으로 추정되는데, 태평 8년을 환산해보면 현종 19년(1028) 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진(戊辰)년 역시 1028년과 동일하기에 해당 기와는 고려 현종 때 정림사의 대장전에 쓴 기와로 해석할 수 있다.

 

Roof Tile with Inscription that Cast Light upon History

Through an excavation conducted in 1942, which wa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 roof tile with the writing '8th year of Taepyeong, Mujin Jeongnimsa Temple Daejangdangcho" was discovered,

indicating that this temple was called Jeongnimsa Temple at the time of the 19th year of King Hyeonjong's reign of Goryeo (1028) Since then, the site of this temple and the pagoda located within the temple site have been called Jeongnimsa Temple Site and Five-story Stone Pagoda at Jeongnimsa Temple Site, respectively.

“The actual inscription on the roof tile reads 'Daepyeong.”

Daepyeong is presumed to be "Taepyeong," the era name of Emperor Shengzong of Liao. The 8th year of Taepyeong corresponds to the 19th year of King Hyeonjong's reign (1028). Mujin also corresponds to the year 1028. Therefore, this roof tile is analyzed to have been used on the Daejangjeon Hall of Jeongnimsa Temple during the reign of King Hyeonjong of Goryeo.

 

정림사지 인피니티 룸
정림사지 인피니티 룸

정림사지 인피니티 룸

무한으로 펼쳐진 공간 속, 정림사지 출토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진열장 조명의 복합 라이딩 쇼를 통해 유물들이 들려주고픈 빛의 노래를 경험하며, AR콘텐츠를 통해 유물의 자세한 정보를 살펴보고 컬렉션 할 수 있다.

 

소조상과 연꽃무늬 와당
소조상과 연꽃무늬 와당

소조상과 연꽃무늬 와당

소조상은 흙을 재료로 만든 조각상으로 불교미술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은 불상과 다양한 종류의 인물상, 동물상, 식물상이 포함되어 있다.

와당은 막새라고 하며 기와의 끝에 위치한다. 백제 기와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화문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되어 세련되고 우아한 느낌을 자아냈다.

 

정림사지관(제1전시실)
정림사지관(제1전시실)
끝나지 않은 백제, 정림사지의 미래를 이야기하다
끝나지 않은 백제, 정림사지의 미래를 이야기하다

백제 정림사지 복원 모형
백제 정림사지 복원 모형

백제 정림사지 복원 모형
백제 정림사지 복원 모형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상처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상처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상처

대당평백제국비명 (大唐平百濟國碑銘)

Wounds of the Five-Story Stone Pagoda of Jeongnimsa Temple Site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랜 세월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렸다. 이는 1층 탑신부에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전승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이란 제목의 비문 때문이다. 제목은 전서체(篆書體), 본문은 해서체(楷書體)로서 당현경(顯庚) 5년(660) 8월 15일에 건립하였으며 글은 하수량(賀遂亮)이 짓고, 글씨는 권회소(權懷素)가 썼다. 비는 1층 탑신 4면에 새겨져있는데 제1면은 24행, 제2면은 29행, 제3면은 28행, 제4면은 36행 등 총 117행*이고 각 행은 16자 또는 18자이며 자경(徑)은 4.5cm이다.

 

비문에는 당고종(高宗)이 신라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31대 의자왕, 왕자 융, 효 등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 이하 7백여 명을 중국에 압송하였고 당나라는 백제 멸망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또한 당시 백제 영토에는 24만호, 인구 620만 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에 항복하였으며 그 해 9월 3일에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인들을 포로로 잡아 당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소정방은 660년 8월 15일에 백제를 대표하는 정림사 석탑에 그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문을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만 알고 있지만 실제 글은 많이 써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정림사지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정림사지_ 2전시실(중층)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정림사지

Jeongnimsa Temple after the Unified Silla

통일신라시대 정림사지는 석탑지와 연지 구간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주름무늬 토기편이 발견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더 이상의 구체적인 실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 정림사는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명 기와의 발견을 통해 고려 현종 19년(1028) ‘정림사’라는 사찰로서 역사 속에 등장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정림사’명 기와를 비롯하여 토기대접, 청자편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정림사는 백제시대보다 작은 규모의 강당지 좌우로 북회랑이 연결되고 북회랑은 동·서회랑과 연결되어 남회랑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역 서편에 가마를 조성하였고 가마 내부에서는 다량의 토기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정림사에서 필요한 토기를 직접 제작하여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림사’명 기와는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소에 사용되는 기와라는 의미이므로 향후 고려시대 정림사의 사찰운영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백제시대 이후 법등을 이어온 정림사의 위상을 정확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08호 | 고려 | 높이 5.6m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축선상에 놓여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이며,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지권인(智卷印)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 대좌로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에 있는 고려전기의 석불대좌와 유사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眼象;안상)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봉안된 곳은 백제시대 정림사의 강당 자리로 이 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정림사지 유리건판
일제강점기 정림사지 유리건판
정림사지 전경 / 일제강점기
정림사지 전경 / 일제강점기
정림사명 기와
정림사명 기와

정림사명 기와(定林寺銘瓦)

Tile with the name of Jeongnimsa Temple

기와의 표면에는 생선 뼈무늬(어골문)와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데, 무늬는 아래와 위에서 각각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부에는 ‘태평팔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2행에 걸쳐 좌서체로 양각되어 있다. 태평팔년은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해당한다. 뒷면에는 전체적으로 헝겊 자국이 있고 그 위에 겹쳐서 네 방향으로 휘어진 굵은 선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Tile with the name of Jeongnimsa Temple

The tile has patterns like fish bones, which are facing opposite directions each on the bottom and at the top. Inside the tile,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 was embossed with two lines. This means Jeongnimsa Temple, 19th year of King Hyeonjong of Goryeo (1028). There is an overall impression of textile on the back side, with a thick line bent in four directions overlaid on it.

미래의 어느날 복원된 정림사지를 볼 수 있을까
미래의 어느날 복원된 정림사지를 볼 수 있을까

 

정림사지 & 정림사지박물관 입장료 및 시설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38 (동남리 401번지)

▪부지면적: 59,179㎡ / 건축면적: 3,148.68㎡

▪정림사지박물관 주요시설: 제1전시실, 브릿지, 제2전시실, 제2전시실(중층), 안내데스크, 중앙홀, 영상실, 뮤지엄샵, 카페테리아, 기획전시실, 화장실, 수유실

▪주차장: 소형 67대,대형 13대(박물관 주차장은 관람시간 내 무료 주차)

개인 관람료: 어린이: 700, 청소년: 900, 어른: 1500

정림사지

- 지정 휴무일 : 11, 설날, 추석

- 위 기간에는 무료로 관람 가능 합니다.

정림사지박물관

- 지정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1, 설날, 추석

- 임시 휴관일 : 박물관의 수리 및 보수 관리등이 필요한 경우

Jeongnimsaji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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