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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완주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 1편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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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9일 부처님 오신 날 완주 송광사를 찾았다. 전주에서 고산, 소양, 진안 등을 갈 때 자주 찾는 곳으로 이 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송광사에 모였다. 올 때마다 계절이 달라 자연 속에 있는 절은 그 느낌이 모두 다르다!

송광사 가는 길은 벚꽃(도로 양쪽으로 벚꽃 굴을 형성)으로도 유명하다.

 

송광사 "벽암각성기념관(21), 사운당(27), 인경당(28)" 와 연등탑 뒤로 종남산(608.3m)이 보인다.

 

송광사 측면에 연지가 있다.

 

송광사 연지

 

연등탑 뒤로 백련정(20)이 보인다.

 

백련정(白蓮亭)

 

012
白蓮亭

 


사실 전주 송광사(완주 5경)는 정문과 측문 두 곳으로 주차를 할 수 있다. 이곳은 측문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다시 정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전주에 살면서 송광사는 많이 와 보았으나 블로그에 올릴 생각으로 공부해 보니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지면을 4편으로 나누어 올릴 예정이다.

송광사 안내도(32번)
송광사 안내도(32번)

 

측면에서 정문쪽으로 걸어오면 정문(일주문) 좌측에 송광사 안내도가 위치해 있다. 송광사 안내도를 확대해서 봐야 각 건물들의 위치와 이름을 파악할 수 있으니 꼭 봐야 한다.

송광사 안내 그림
송광사 안내 그림

 

1_일주문 / 2_다래헌 / 3_금강문 / 4_천왕전 / 5_응향각(종무소) / 6_범종루 / 7_대웅전 / 8_삼성각 / 9_나한전 / 10_약사전 / 11_사적비 비각 / 12_부도전 / 13_감로당 / 14_첨성각 / 15_세심정 / 16_지장전 / 17_극락전 / 18_포대화상 / 19_미륵불 입상 / 20_백련정 / 21_벽암각성기념관 / 22_향로전 / 23_보현당 / 24_관음전 / 25_보경당 / 26_적묵당 / 27_사운당 / 28_인경당 / 29_해우소(여) / 30_해우소(남) / 31_사적안내 / 32_송광사안내

안내도 맞은편 돌탑

 

송광사 영문 안내도
송광사 영문 안내도

 

현재 이곳 사진이 32_송광사안내 위치이다. 읽어보니 사진으로만 보기에는 그냥 지나칠 것 같아, 공부도 할 겸 써봤다.

백화도량종남산송광사의 역사가 써있다
백화도량종남산송광사의 역사가 써있다

 

솔직히 송광사 사진만 올리면 될 걸 왜 이런 걸 쓰겠다고... 어떤 블로거들은 컨트롤+C+V로 편하게 하는 걸....
이제부터 아래 나오는 글의 출처는 바로 위에 사진이고, 송광사가 어떻게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르렀는지 살펴봅시다.

 

 

백화도량종남산송광사
(白華道場終南山松廣寺)

석가모니(Sakyamuni, BC 624-544)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연기를 깨달아 중도(팔정도)의 가르침으로 5비구를 교화한 이래, 불교의 역사적 전통이 가꾸어온 모든 사상과 문화, 제도 등은 중도를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송광사(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본사 금산사 말사)도 중도를 선양하기 위한 곳이다.

송광사는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 좋게 뻗어오다 더 이상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선(終南), 전라북도 완주군 종남산 끝자락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일찍이 백제 때 종남산 남쪽에 영험한 샘물이 있어 그곳에 절을 짓고 백련사(白蓮寺)라고 하였다.

백련사는 신라 말에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에 의해 송광사로 개칭되었다. 체징 선사는 설악산 억성사에서 도의(道義, fl.821) 국사의 수법 제자인 염거(廉居, fl.844) 화상을 스승으로 수행하다 선법(法)의 요체를 구하러 당나라에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에 머물렀다. 유학하고 귀국한 후에도 가지산보림사(전남 장흥군)와 이곳 종남산백련사를 오가면서 도의 국사의 선법으로 널리 교화하였다. 백련사가 선종의 종취에 따라 송광사로 개칭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소나무는 독특한 향이 있어 다른 식물과 함께 어울려 생장하지 않는다. 어떤 식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소나무가 생장하기 시작하면 금세 소나무 일색이 되고 만다. 선종도 그와 같아,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 등의 가르침이 토착화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종이 전래되고 나면 선종 일색이 되고 만다. 이를 소나무가 널리 자리한다(松廣)는 선종의 비유어로 백련사를 송광사(松廣寺)로 바꾼 것이다.

이래로 송광사는 선종 사찰로서 사격을 면면히 이어왔다. 고려 중기에 대각의천(義天, 1055-1101) 국사가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였을 때에는 송광사를 다시 백련사로 고치고 여타의 선종 사찰과 함께 천태종에 귀속되었다.

송광사 대웅전의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임진정유(1592-1598) 양난으로 전라충청 지역의 사찰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을 때 백련사도 전소되었다. 다행히 전란이 마무리된 후 조정에서 전소된 절들을 복원하자는 여론이 일어나. 광해군(r.1608-1623) 때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대사의 문도인 덕림(德林) 화상이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凈), 득순(得淳), 홍신(洪信) 등과 더불어 간고 끝에 시범사찰로 중건하였다. 송광사개창비(全州松廣寺開創之碑)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조(r.1623-1649)의 척족인 완산인 이취반(李就班, f1.1622)이 폐허가 된 절터를 사유하고 있다가 절에 다시 기증하였고, 1622年부터 2년간에 걸쳐 전면 7간 측면 5간 중층의 웅장한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송광사 대웅전의 낙성과 삼존불의 점안은 당대의 최고 도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진묵(震黙, 1562-1633) 대사가 직접 증명법사로 참여해 법회를 주관할 정도로 불교계의 큰 경사였다.

불교계 선문의 장로들은 벽암대사야말로 선단(禪壇)을 주관하여 법등을 사자상승시켜 나갈 적임자로 여기고, 무주 적상산에 머물던 대사를 찾아가 송광사에서 교화의 법석을 펼쳐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벽암대사는 장로들의 청을 받아들여 송광사로 옮겨와 무진 법문으로 교화하고, 체징 선사의 선수행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절 이름을 송광사라고 다시 고쳤다. 이에 인조송광사조선선종수사찰(朝鮮禪宗首寺刹)이라고 사액하였다.

이후 명부전(冥府殿, 1640), 천왕전(天王殿, 1649), 나한전(羅漢設, 1656), 일주문(一柱門) 등을 차례로 복원하여 선종수사찰로서의 사격을 온전히 갖추었다. 이를 두고 개창비는 "전각은 크고 높고, 곁채는 길게 뻗었으며, 층층이 높은 건물을 드러내고, 사방에 담장을 둘러싸니, 높은 것은 하늘과 만나고, 내려 보면 냇물에 담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송광사 1707年, 1814年, 1857年에도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특히 송광사대웅전중건상량문(1857)에 따르면, 전라도 순찰사 김병교(金炳喬 ), 관찰사 심경택(沈慶澤 ), 전주 부윤 홍종화(洪完和) 등이 백만 전을 지원하여 이층 구조의 금당(대웅전)을 49일 만에 허물고 53명의 장인이 7개월 만에 단층 대웅전으로 축소하여 중수하였다. 이러한 송광사 사적 전말은 全州松廣寺開之碑(1636), 庚辰年七月日西方山松廣寺十王造成訖功記(1640), 佛像造成施主目錄(1641), 大靈山十六聖衆五百 聲聞造成會願文(1656), 石槽造成記(1670), 虎溪橋重修有功記(1681), 三殿牌重修記(1792), 前嘉慶十九年甲戌法堂重修同參記(1814), 松廣寺大雄殿重建上樑文(1857), 松廣寺法堂初創上層化主德林(연대 미상) 등에 상세하게 전해온다.

보수된 송광사 나한전(2022.05.22.)


대웅전(보물 제1243호)에는 소조삼존불상(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보물 제1274호)목조삼전패(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가, 지장전에는 소조지장보살삼존상권속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이, 나한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에는 목조석가여래삼존상십육나한상 권속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이, 범종루(보물 제1244호)에는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사물(범종, 운판, 목어, 법고)이,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천왕전에는 소조사천왕상(보물 제1255호)이 봉안되어 있다. 그 밖에도 재가자들의 납골을 안치하고 있는 극락전금강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일주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삼성각 등의 전각이 있다. 당우로는 약사전, 첨성각, 감로당, 향로전, 보현당, 적묵당, 사운당, 인경당, 응향각, 보경당, 다래헌 등이 있다.

송광사에는 회주 도영대종사를 중심으로 사부대중이 중도의 선양을 위해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고 있다. 재가자들은 송광사신도회를 조직하여 산하에 송광사청년회, 전라북도불교발전협의회, 송광사종남회, 송광사지장회, 송광사일요가족법회운영위원회, 송광사불교학당, 송광정심원불자회 등 신행단체를 두고 있다. 그 밖에도 송광사는 송광정심원과 완주떡메마을, 송광백련마을 등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있다.

지세를 다듬고 그 터에 당우를 세우는 일은 중도의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함에 있다. 송광사는 관세음보살의 상주 설법도량(백화도량)인 만큼 법륜이 쉼 없이 굴러 부처님의 지혜가 더욱 빛나고, 인연 있는 모든 이들이 서로 부드럽게 화합하여 그들에게 평온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송광사 대웅전


한자에 약한 내가 이걸 쓰고자 하루를 공부했으니...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이 곳에 쓰인 한자의 오타를 찾아냈다.
파란 글씨로 쓰인 "송광사개창비(全州松廣寺開創之碑)" 가, 두 번째 쓰인 곳에서는 全州松廣寺開之碑(1636)로 잘 못 쓰여 있다. 원래 송광사개창비(全州松廣寺開創之碑)의 개창(開創)은 새로 시작하거나 섬. 또는 그렇게 세움. 이라는 뜻이고, 오타라 보이는 개창(開倉)은 관아의 창고를 열어 안에 넣어 두었던 곡식을 내던 일. 로 뜻풀이가 되니....
최종 수정 : 全州松廣寺開之碑(1636) [倉→創] 수정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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