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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전주 조경단(조선왕조 창업의 경사가 시작되다!)

by 전주 럭셔리크로우 2022.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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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가 조선왕조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조경단(肇慶壇)을 이야기하는데, 오늘은 2021.07.22, 2022.05.30에 다녀왔던 조경단을 소개해본다.

조경단 肇慶壇
조경단 肇慶壇

 

 

 

 

조경단(肇慶壇)의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 임금님숲(놀이터) 표지판이 있다.

임금님숲(놀이터) 표지판
임금님숲(놀이터) 표지판

하마비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큰대. 작을소. 사람인. 인원원. 다개. 내릴하. 말마. / 해석하면... 크고 작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종묘, 궐문 앞에 세워놓은 비석이다. 쉽게 생각해서 왕과 관련이 깊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래서 하마비가 있는 곳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 된다.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비석의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낙서가 있는데, 문화재 또는 관광지에서 낙서는 하지 말자. 지키지는 못할망정 훼손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전주(全州) 조경단(肇慶壇)
전라북도 기념물 제 3호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산28번지 | 면적:30,248 ㎡

조경단 안내판
조경단 안내판

 

조경단은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역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왕조를 세운 뒤 건지산에 있는 이 묘역을 각별히 지키게 했으며, 그 후 역대 왕들도 이의 보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특히 고종 황제는 광무 3년(1899)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관리를 배치하고 매년 한 차례씩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구)조경단 안내판
(구)조경단 안내판


비석에 새긴 「대한 조경단(大韓 肇慶壇)」이란 글씨와 그 비문은 고종 황제가 직접 쓴 것이다. 조경단은 경기전, 조경묘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조경단 안내판
조경단 안내판

조경단 안내판
조경단 안내판

 

조경단(肇慶壇) /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Jeollabuk-do Monument No. 3]

조경肇慶 '조선왕조 창업의 경사가 시작되다' 라는을 담고 있다. 조경단은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묘역이다.
이한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다.
영조 때에 이한의 묘소가 건지산 기슭에 있었다는 구전을 바탕으로 조경단 조성이 논의되었으나, 당시에는 무덤을 찾지 못하여 묘역 조성은 중단되었다. 고종 때에 다시 논의하여 광무 3년1899에 건지산 왕자봉 아래 단을 쌓아 묘역을 조성하고, 고종의 친필로 새긴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 비를 세웠다. 해마다 한 차례씩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1899년에 조경단을 조성하고, 1900년에 오목대에 ‘태조고황제주필유지’ * 와 이목대에 ‘목조대왕구거유지’ ** 라 새긴 비를 세워 황실의 뿌리를 공고히 하였다.

*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 태조 이성계가 잠시 머물렀던 곳
**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대왕이 전에 살던 터

안내판과 삼문(三門)이 보인다
안내판과 삼문(三門)이 보인다

 

좌측사진
좌측사진

 

조경단 안내판에 나온 이야기에서 "영조 때에 이한의 묘소가 건지산 기슭에 있었다는 구전을 바탕으로 조경단 조성이 논의되었으나, 당시에는 무덤을 찾지 못하여 묘역 조성은 중단..."의 역사를 좀 더 알아보았다.

 

조경단(肇慶壇)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1771년(영조 47)에 칠도 유생들은 조선왕조 시조인 사공 이한(李翰)과 동비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는 시조묘의 건립을 건의하였다.
태종대경기전(慶基殿,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을 세웠고 영조대에는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선원경봉지지로서 전주로 숙원을 굳혔는데, 동학혁명군으로 전주가 한때 점령되자 태조 영정과 함께 조경묘 위패도 위봉산성(威鳳山城)에 피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건지산(乾止山)에는 조경단을, 발산(鉢山)에는 목조의 유허비를, 오목대(梧木臺)에는 태조의 주필유지비를 세우게 되었다. 1899년 3월 11일에 궁내부특진관인 ‘조경단봉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으로 이재곤(李載崑)이 전주에 와서 건지산 묘소검분이 실시되었다.
설단(設壇)·수비(竪碑)·건재(建齋)의 후보지는 따로 지관이 정하기로 하고, 동서 3,360척, 남북 3,520척의 경내 묘소는 모두 없애버리고 창경토지나 단의 좌우 계곡에 인접된 전답은 본단 수봉궁에 속하게 할 것을 제언하였다. 마침내 고종 어필의 전제(篆題)와 찬문(撰文)으로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가 건립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조경단肇慶壇)]

좌측사진: 홍살문-단소-비각
좌측사진: 홍살문-단소-비각

 

홍살문(紅箭門)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중략)...이태극 및 빛을 넣는 삼태극 등으로 표현되어 있고, 태극 문양 위의 지창(枝槍)은 2지창과 3지창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고]
기본적으로 상징성을 가진 문(門)이라 볼 수 있다. 모양도 한자의 모양이다. 붉은 문지창화살은 악귀와 나쁜 액운을 막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서원, 향교, 능 등에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경단의 각 부위 명칭
조경단의 각 부위 명칭

 

조경단 삼문(三門)
조경단 삼문(三門)

 

삼문(三門)에 대해 잠시 알아보겠다.

통로가 총 3 곳이라 삼문(三門)이라 하며 옛날에는 각 문의 위치에 따라 통하는 사람 및 신분이 달랐다고 한다.
왼쪽 문: 향토의 양반이나 아전이 통하는 문 / 가운데 문: 수령, 사신, 귀한 손님이 통하는 문 / 오른쪽 문: 군관 또는 백성이 통하는 문이었다. 오늘날 서원, 향교 등을 보면 삼문은 내삼문(담 안에 있음)외삼문(밖에 있음)으로 구분한다.
현대에 와서 삼문의 중앙 문은 닫혀있고, 사람들은 우측통행 기준으로 출입과 출구를 이용하면 맞다.

삼문 지붕-하마석-홍살문-단소와 우측의 비각이 보인다
삼문 지붕-하마석-홍살문-단소와 우측의 비각이 보인다

 

우측사진-비각
우측사진-비각

 

조경단 우측에서
조경단 우측에서

 

담장 너머의 풍경을 찍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팔을 들어 어렵게 찍었는데 생각보다 사진이 잘 나왔다.

조경단 비각
조경단 비각

 

담장 너머의 조경단
담장 너머의 조경단

홍살문-단소와 우측의 비
단소와 우측의 비

홍살문-단소와 우측의 비각
홍살문-단소와 우측의 비각

 

우측 모서리에 측문이 있다
우측 모서리에 측문이 있다

 

우측 모서리에 오솔길이 있다. 건지산의 등산로와 연결되어 있어 길을 따라 다른 각도에서 조경단을 찍어 본다. 바로 옆으로는 편백나무 숲이 있어 공기가 신선하다.

건지산 편백나무 숲_조금만 더 가면 임금님 숲 놀이터가 있다
건지산 편백나무 숲_조금만 더 가면 임금님 숲 놀이터가 있다

 

조경단의 정문
조경단의 정문

 

담장과 나무 사이로 비각이 보인다
담장과 나무 사이로 비각이 보인다

 

비각과 단소가 보인다
비각과 단소가 보인다

 

비각(碑閣)
비각(碑閣)


비각(碑閣) 안에는 고종의 친필로 새긴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 가 있다. 들어갈 수가 없으니...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사진을 가져왔다.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

 

현재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 ’ 비碑의 탁본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앞면) 대한조경단_고종 친필
(뒷면) 조경단의 내력과 전주가 조선왕실의 본향임을 강조하는 내용

(앞면) 대한조경단_고종 친필 / (뒷면) 조경단의 내력과 전주가 조선왕실의 본향임을 강조하는 내용

우측 담장_비각_단소
우측 담장_비각_단소

 

단소
단소

담장과 의묘
의묘

우측 담장에서 본 의묘
우측 담장에서 본 의묘


이제 조경단의 정상 부근까지 올라왔다. 조경단 앞에 보이는 건물들은 전북대학교 기숙사(생활관)이다.

조경단 정상부근에서
조경단 정상부근에서

조경단 정상에서 본 비각과 단소
조경단 정상에서 본 비각과 단소

조경단 정상에서 본 비각과 단소
조경단 정상에서 본 비각과 단소

 

담장 옆 오솔길
담장 옆 오솔길


조경단 담장 옆 오솔길을 통해 다시 내려가는 길 다른 각도로 조경단의 모습도 담아 본다.

단소
담장과 비각 그리고 단소

담장과 비각 그리고 단소
비각 그리고 단소

조경단의 비각
조경단의 비각

 

항상 가깝고 늘 볼 수 있는 조경단(肇慶壇)의 역사를 알고, 공부를 해보니 그동안 멀리 있는 문화재가 아닌 가까이에 있는 문화재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경단(肇慶壇)
조경단(肇慶壇)

 

무엇보다 조경단(肇慶壇)의 역사와 진실을 알게 된 후 왜 고종(高宗_제26대 왕 / 재위:1863~1907)전주(全州)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를 친필로 쓰고 조경단(肇慶壇)을 만들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고종 때에는 대내·외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하는 어려운 시기였고, 러시아 및 일본 등 열강들 사이의 외교적 노력과 대한제국 수립 선포 등으로 자주권을 지키려 했던 부분에서... 전주(全州)가 조선왕조 발상지임을 상징하므로 더욱더 왕실의 권위와 황실의 뿌리를 견고히 하고자 했던 고종의 고뇌와 노력이라 생각했다.

또한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둘째 아들로 탄생한 훗날의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 순종(純宗_재위:1907~1910)에게 온전한 대한제국의 왕권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아마도 왕(王)을 떠나 아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조선왕조 발상지 전주(全州) 조경단(肇慶壇)에서 "전주 럭셔리크로우" 였습니다.
구독좋아요는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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